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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의 책들

『함께 살 수 있을까』 지은이 김고은 선생님 인터뷰

by 북드라망 2023. 6. 12.

『함께 살 수 있을까』 지은이 김고은 선생님 인터뷰

 

 


1. 『함께 살 수 있을까』의 부제는 ‘타인과 함께 사는 법을 고민하는 청년 인터뷰집’입니다. 이 책에는 함께 살아간다고 하면 ‘조화’보다는 ‘갈등’이 더 떠오르거나, 심지어 함께 살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기 힘든 상대와 함께 살아가는 청년 분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이 다섯 분과의 인터뷰를 세상에 내보내고 싶으셨던 이유가 있으실 텐데요, 그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이 인터뷰는 제 친구들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공황이 생겼다고, 출퇴근 길의 지하철도 타기가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또 다른 친구는 지나가는 말로 수면제를 잔뜩 먹었는데 깨어나 버렸다고 했습니다. 친구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큰 충격을 받았죠. 그때 친구들의 아픔에 대해서 생각해 보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비슷한 경험을 한 또래의 이야기가 지천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저도 그런 사람 중 하나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삶에 대해 생각 할 때 조화보다 갈등을 먼저 떠올리고, 어떤 존재들과는 함께 살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기 힘든 사람이니까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그런 것 같습니다. 고립되거나 단절되기는 쉽지만,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벼리기는 어려운 사회입니다.


친구들이 아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내 친구들과 같은 또래들이 수두룩하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 역시 그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먼저 느낀 건 무력감이었습니다.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한가로이 앉아나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뭐든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 싶었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가 꽤나 멋진 친구들을 알고 있더군요. 


인문학 공동체 <문탁네트워크>에서 생활하고 공부하며 배운 바에 따르면 연결은 ‘어떻게’의 문제입니다. ‘고립되어 있다’는 선언이나 ‘연결되어야 한다’는 당위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일상에서 조우하는 수많은 위험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언제 내게 위협적으로 변할지 모르는 타자와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와 같은 아주 구체적인 지혜이지요. 


이 책에 실린 다섯 명의 인터뷰이들은 바로 그와 관련한 지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대단히 멋진 말을 뽐내기보단 일상의 언어로 삶을 다지고, 빼어난 솜씨로 이목을 끌기보단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낯선 이들을 꿋꿋이 마주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면서 실패하고, 미끄러지고, 괴로워하고, 포기하고 싶어 하면서도 타자와의 만남을 끝끝내 외면하지 않지요.


인터뷰이의 이야기들은 결코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기승전결이 완벽한 성장 스토리나 환상적인 성공담도 아니지요. 실제로 그들은 인터뷰에서 관계를 외면하지 않았던 지난한 시간 속에서 어떻게 괴롭거나 행복했는지, 그로부터 어떤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답니다. 저는 이 사람들이 지난하게 보낸 시간 덕에 얻은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저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2. 우리는 ‘이질적’이라 하면 불편함부터 느끼지요. 그래서인지 우리 시대는 불편한 사람을 언제든 ‘차단’할 수 있듯이, 불편한 관계들을 피해 혼자 살기에 더 편한 방향으로 변화해 해 온 것 같아요. 이렇게 ‘이질적인 존재’들과 떨어져 살기에 편한 세상에서는 ‘함께 살기’의 필요성을 느끼는 게 어려워지는 것 같은데요,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왜 함께 살아야 할까요?

 

저도 그게 너무 궁금해서 시간상으로 첫 인터뷰이였던 <우주소년>의 현민에게 물어봤답니다.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이질적인 존재들과 함께 살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냐고요. 그랬더니 현민은 너무나 의아한 얼굴로 단박에 이렇게 대답하더라고요. “있다, 없다가 아니라… 해야 하지 않아요? 어쩔 수 없지 않아요?” 현민의 대답을 듣고 너무 놀라서 입이 저절로 벌어졌습니다. 

 

저는 함께 사는 것이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현민은 그게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제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던 거죠. 우리가 이미 함께 살고 있다는 것, 연결되어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 같은 것을요. 이미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끼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왜?’ 같은 질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함께 살지 않는 삶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싫든 좋든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의 구성만 봐도 그렇잖아요. 얼마나 많은 균들 덕분에 우리 몸이 살아 움직이던가요. 그런데 습관적으로 균을 나쁜 것이라고 혹은 만나면 어찌 될지 모르니 두려운 것이라고 상정해서 그들과의 관계를 없애려고만 하죠.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은 함께 살기 어려운 사회가 아니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어려운 사회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3. <새벽이생추어리>에서 돼지인 잔디를 마사지 해 주시면서 고기를 먹지 못하는 몸으로 바뀌었다고 하셨지요. <새벽이생추어리>에서 새벽이·잔디와 연결감을 강하게 느끼셨고, 행동의 변화까지 이어진 고은 선생님의 이야기가 인상 깊었는데요. 동시에 우리 일상에서는 비인간 동물과 연결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러한 상황에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비인간 동물과 연결감을 느낄 수 있을까요? 

 

작년 가을에 아기 고양이를 구조해서 함께 살게 됐어요. 제가 이 동네에 20년 가까이 살았는데요. 고양이랑 같이 살고 나서야 동네에 길고양이가 엄청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놀랍게도 그전까지는 동네에서 고양이를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답니다.


비인간동물은 어디에나 있지요. 지구에 인간만 사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데 그들과 연결되기는 정말 쉽지 않아요. 지구에 인간만 있는 것처럼 사는 데 익숙하니까요. 그래서 반드시 어떤 사건들이 필요합니다. 제가 우연히 SNS 피드에서 새벽이 사진을 본 것 같은, 혹은 길고양이를 어쩔 수 없이 구조하게 된 것 같은 사건들이요. 그런 사건들은 어떤 기척도 없이,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쳤습니다. 제가 손 쓸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다행히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한 것 같습니다. 내가 어떤 상황을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면적을 넓혀보는 건 가능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공부가 그 역할을 했습니다. 공장식 축산업을 공부했기 때문에 SNS에서 새벽이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고, 길고양이에 대해 공부했기 때문에 눈앞에 등장했을 때 구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비인간동물과 연결되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평소에 준비를 소홀히 하지 마셔요. 그리고 언젠가 어떤 비인간동물이 내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다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꼭 사건으로 만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이질적인 존재와 함께 사는 인터뷰이들의 ‘함께 살기’의 태도와 방법이 멋지고 흥미롭다고 느껴졌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인터뷰이들의 함께 사는 태도나 방법 중 특히 기억에 남으시는 것이 있으신지요? 혹은 독자분들에게 소개해주시고 싶은 ‘함께 살기 팁’이 있으시다면?


여성 독서 커뮤니티 <들불>을 운영하시는 구구 님의 팁을 소개해 드리고 싶네요. 구구 님은 때때로 남성들과 일을 하거나 대화하다가 무례한 말을 듣게 되면 가볍게 되받아친다고 하시더라고요. 예를 들면 “헐, 대박 무례해” 이렇게요. 가볍게 던진 말이니까 상대가 반박은 못 하는데 신경은 쓰게 되고, 구구 님 스스로는 훨씬 가볍게 흘려보낼 수 있게 된다고 하셨어요.


살면서 무례한 사람을 만날 일이 많잖아요. 그런 말들에 감정이 많이 상하기도 하고요. 그럴 땐 그 말을 붙잡기보단 흘려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그런데 흘려보내는 건 혼자 하기 어렵거든요. 그러니까 그 상황을 만든 상대를 초대하는 거죠. ‘내가 당신에게 어떤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는데, 그것을 간직하며 당신을 미워하고 싶지는 않으려 한다’면서요.
초대를 잘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엇?’, ‘아차?’하며 다시 생각을 해볼 테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 사람의 무의식 어딘가에는 흔적을 남길 수 있을 거예요. 이런 방식으로 이런 사람을 대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오는구나, 하고요. 그런 일이 반복되다보면 그 사람의 무의식도 꿈틀하게 되지 않을까요? 혹은 내게 그 말을 한 사람의 반응이 돌아와서 또 다른 관계의 장을 만나게 될 수도 있고요.


어쩌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조금이라도 연결되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무례한 말을 한 사람과 아무런 영향을 주고받을 수 없다면, 그래서 정말 그 사람과 연결되지 못한다면, 그건 모두에게 좋지 않을 테니까요. 무례한 말을 들은 사람만 불행한 게 아니지 않을까요? 무례한 건지 몰랐던 사람은 계속 모르는 상태로 누군가에게 상처 입히게 될 테고, 남을 무시했던 사람은 영영 다른 이들과 단절된 세상 속에서 고립된 채 살 테니까요.


5. 고은 선생님은 인문학공동체인 <문탁네트워크>와 청년인문학스타트업 <길드다> 등에서 공부하며 20대를 보내셨는데요. 선생님이 이런 공동체의 경험에서 배우고 터득한 ‘나와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공유해 주셔요.


제게는 20대를 함께 보낸 친구들이 있습니다. 5년 동안 <문탁네트워크>에서 함께 공부하고, 그 뒤로 5년 동안 <길드다>에서 함께 일한 이들이지요. 이 친구들과 10년 동안 함께 살기가 정말 쉽지 않았어요. 만약 청년이 귀한 이곳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더 많은 친구를 물색할 수 있는 곳에서 마주쳤다면 결코 친구가 되지 않았을 만큼 달랐는데요. 저는 그 친구들과 함께 살면서 기다릴 줄 알게 되었어요.


기다리는 건 참는 거랑은 좀 달라요. 참는 건 내 마음을 억누르고 억지로 양보하는 느낌이라면, 기다릴 때는 무작정 참지는 않습니다. 기다리며 화를 내거나 실망하고, 또 울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러면서도 장기적으로 보고, 언젠가 어떤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뭐가 올지는 정확하게 모릅니다. 만약 기다리는 게 정확하게 있다면 그건 분명 내가 원하는 것일 테고, 그게 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면 마음을 억누르는 느낌이 들어서 괴로울 겁니다. 


기다리는 건 언젠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걸 믿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방향일지는 모르지만 상대가 변할 것이라고, 마찬가지로 나도 변할 것이라고 믿는 거예요. 물론 드라마틱한 변화 같은 걸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변하는데 30년, 40년이 걸릴지도 모르고, 그 변화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고 사소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미 그러고 있다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무작정 믿는 겁니다. 


지금은 그 친구들과 함께하고 있지 않은데요. 그래도 여전히 친구들을 믿고 있습니다. 왜냐면 가끔씩 그 친구들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떠오르거든요. 친구들이 잘못했다고 믿고 있었던 그때 나는 얼마나 친구들을 몰아붙였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이제라도 조금 덜 깐깐하게 굴게 됩니다. 아마 친구들, 혹은 제가 만난 다른 누군가들도 그러지 않을까요? 무의식 중에라도요.


우리가 서로의 세포에 흔적을 남기는 존재라는 걸 생각하면 사람들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때의 제가 언제 어디서 그들을 만날지 모르고, 그들 또한 언제 어떻게 변하게 될지 모르니까요. 그러면 10만큼 미워할 것도 5만큼 미워할 수 있게 되고, 10만큼 괴로울 것도 2만큼 괴로울 수 있게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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