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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석기 시대

[나의 석기 시대] 고래 잡이의 마음

by 북드라망 2025. 2. 6.

고래 잡이의 마음


1. 암각화로 본 인류의 상상력
울산 태화강 하류 대곡천, 반구대에 그려진 암각화에는 다양한 종류의 고래들이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한다. 암각화는 선사의 인류, 그리고 여전히 야생의 사고를 활발하게 쓰는 무문자 사회의 부족들이 돌에 우주와의 소통을 염원하면서 남기는 무늬라고 할 수 있다. 암각화는 지역과 시대를 막론하고 다양한 장소에서 발견되면서도 그 패턴에 있어서는 비슷한 것이 많이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기하학 무늬를 들 수 있다. 예술의 진화란 ‘사실주의에서 추상주의로’라고들 한다. 그러나 인류사 전체를 놓고 보면 추상 기호가 사실 기호보다 먼저 출현했다. 선사의 인류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재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 있어야만 하는 세계, 그런 당위의 세계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있을 수 있는 세계, 가능성으로 꿈틀거리는 세계였다. 그런 세계여도 균형과 조화를 품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인류의 최고 기호는 기하학 무늬였다. 삼각형, 사각형,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동심원들. 이런 추상 기호는 세계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기하학 무늬 다음으로는 다양한 동물상들, 반인반수상들이 있다. 동물상들 대부분은 암각화 주변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동물을 모델로 한 것 같다. 건초한 초원 지대에서 갑자기 우림이나 한대(寒帶氣候)의 동물이 그려지지는 않는다. 이는 인간 상상력의 한계가 한편으로는 다양한 가능성을 희망함에도 자기 사는 터전의 한계를 넘어서기가 지극히 어려움을 의미한다. 이처럼 ‘인류가 사랑한 무늬의 역사’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넘어서고 싶은 인간과, 그 인간의 ‘자기 조건’ 사이의 길항 관계를 보여준다. 정답은 없지만 이런 긴장된 사태가 매우 흥미롭다. 

한반도는 대륙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다양한 육지 동물 암각화가 그려졌을 것 같지만 의외로 가장 큰 규모의 암각화에서 그려진 것은 바다 생물들이다. 특히 대형 바다 생물인 고래가 많이 그려졌다. 전세계 고래 암각화들을 찾아보아도 울산 반구대만큼 다양하고 역동적으로 그려진 것은 없다. 한반도의 선사인들의 기도는 바다를 향해 있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한반도 신석기 모델은 아무래도 바다 모델을 따랐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물론 극빙하기 한반도 서해 대평원이, 온난화의 물결을 타고 바닷속으로 다 가라앉았기 때문에 한반도 후기구석기와 조기(早期) 신석기유적은 지금 찾을 길이 없다. 확실히 한반도 신석기가 바다 모델에 기반했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다.


2. 고래를 사랑한 한반도의 선사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바다 생활의 역동성을 잘 보여준다. 다양한 종류의 고래들이 보이는 생태학적 특징들, 그들의 습속들, 무엇보다 고래를 찾아 나서고 마침내 잡는 어부들의 어로 모습까지 새겨져 있다. 확실히 고래는 한반도 동남부 선사인들의 훌륭한 먹거리였던 듯하다. 반구대 고래잡이들은 거대한 카누를 몰며 작살을 사용하여, 그물로써 고래를 잡고 있다. 실제로 한반도 동남부 신석기 패총에서는 다양한 고래뼈가 발견되기도 한다(울산 암각화박물관 편,『대곡천 사냥꾼 바다를 만나다(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발견 50주년 기념 특별전』, 18~23쪽). 대표적인 곳이 울산 황성동 유적, 부삼 동삼동 유적, 부산 가덕도 유적, 통영 연대도 유적, 여주 여서도 유적이다. 

일단 차례로 각 유적에서 발굴된 먹거리로서의 고래 흔적에 대해 알아보자. 울산 황성도 유적은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서 약 20km 떨어져 있다. 뼈작살이 박혀 있는 고래의 꼬리뼈와 어깨뼈가 발견되어 고래 사냥의 직접 증거가 된다. 고래류로는 이빨고래류보다 수염고래류 뼈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대형고래를 주로 잡은 것이다. 아래로 내려와 부산 동삼동으로 가보자. 동삼동 패총 유적지에서는 패총의 모든 층에서 고래뼈가 출토되었다. 대부분 의도적으로 파괴된 것처럼 잘게 부서져 있었다. 확인된 고래는 수염고래류인 혹등고래, 대왕고래에서부터 이빨고래류인 돌고래까지 그 종류가 광범위하다. 통영은 작은 섬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 섬들마다 신석기 유물과 그 안에서 발견된 고래 흔적이 있다. 그 중에서도 큰 섬인 연대도에서는 고래뼈 특히 이빨고래류의 것이 다량으로 나왔다. 이빨고래는 수염고래보다 크기가 작은데 섬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이 작은 고래들이 섬들 사이에서 잡힌 것이다. 여수의 여서도는 제주도와 완도군 사이에 있다. 이빨고래류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이 고래뼈가 덧무늬토기나 눌러찍은 무늬토기와 같이 출토되어서 연대도의 식탁을 더욱 궁금하게 한다. 고래 스프라도 만들었던 것일까? 

울산 장생포 고래박물관 :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현대의 고래잡이 도구들


『대곡천 사냥꾼 바다를 만나다(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발견 50주년 기념 특별전』자료집을 보니 좀 특이한 고려뼈 유적이 있다. 바로 부산 가덕도 장항유적의 고래뼈다. 가덕도 유적은 기원전 5,000년~4,000년 전 신석기시대 조성된 집단묘역시설이다. 총 48구의 인골이 그 주변으로 토기, 석기, 옥, 동물뼈, 조개팔찌 등의 껴묻거리와 함께 발굴되었다. 그 중 40대 여성으로 알려진 20호 인골은 고래 늑골과 함께 출토되었다. 껴묻거리로서의 고래뼈인 것이다. 고래는 단지 먹거리로서만이 아니라 저편 세계로의 입장을 돕는 상징적인 바다 동물이지 않았을까?   

물론 고래들이 한반도의 동남해만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고래 사냥과 관련된 유적은 중국 랴오둥 반도에서 한반도를 지나 일본 규슈까지 신석기시대 전 시기에 걸쳐 동북아시아 전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대곡천 사냥꾼 바다를 만나다』, 18쪽). 태화강변, 동삼동과 가덕도, 연대도, 여서도의 선사인들은 어떻게 고래를 잡을 생각을 했을까? 바다의 왕을. 고래를 잡으러 떠났던 그들 마음이 궁금하다. 껴묻거리로서도 활용될 정도로 고래는 신심 깊은 선사인들의 동반자였다.  
 

3. 고래잡이 배를 만들려면? 
고래 잡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이다. 숲에서 가장 큰 짐승 예를 들면 곰을 사냥한다고 상상해보자. 숲을 돌아다니며 곰의 흔적을 찾고, 단련된 사냥술로 일찌감치 준비해둔 날카로운 창을 사용하면 된다. 그런데 고래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똑같이 사냥꾼이라지만 포수가 포경까지 잘하기란 어렵지 않을까? 일단 고래를 잡으려면 두 다리가 아니라 배와 수영 실력이 필요하다. 먼저 배에 대해 생각해보자. 

고래를 잡아 끌고 오려면 한두 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 척이 필요할 수도 있다. 국제적으로 포경이 금지된 지금, 문화 유산의 보호 차원에서 허락을 받아 지구 최후의 야생 고래잡이들이라고 알려져 있는 인도네시아 라말레라족의 고래 사냥을 참고해보자면 전동 모터를 쓴 배를 가끔 이용한다고 해도(라말레라 부족은 고래잡이에 전동모터가 달린 배를 사용하는 것에 극도의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도 최소 열 척 이상의 배는 필요한 것 같다(더그 복 클락,『마지막 고래잡이』참고) 게다가 한 배에 사람을 여럿 태우고 나아가야 할 것이니 배가 뗏목 수준 이상이 되어야 한다. 

특히 급한 파도도 너끈히 탈 수 있을 정도여야 하고 고래를 향해 작살을 날릴 힘받이 부분이 따로 필요하다. 이는 울산 반구대에 그려진 고래잡이 배의 선두(船頭)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앞과 뒷부분이 특히 뾰족이 올라와 있다. 라말레라족의 고래 사냥을 보면 최후의 작살잡이는 배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어부여야 한다. 그는 마치 배구 선수가 공을 받아치듯이 하늘로 솟아 작살을 들고 고래를 향해 던졌다. 즉 이 작살잡이가 발돋움해서 탄성을 발휘할 수 있는 지점이 배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뗏목이라면 갑자기 힘을 모을 지점이 없어서 작살잡이가 높이 뛰어 오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대강을 상상해보면 수령(樹齡)이 많은, 즉 직경이 큰 통나무로 날렵하게 깎은 통나무배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바로 카누다. 카누라니, 한반도 태화강의 선사인들도 서태평양의 항해자들 못지 않았던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진 대로 한반도에서는 과연 카누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의외로 창녕 비봉리다. 창녕은 지금 완전히 내륙으로 들어와 있는 곳인데 여기서 7000년 전의 배가 나왔다면 당시 이 근처가 바닷물이 들어와 있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비봉리의 배를 보려면 우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갈 수 있다. 남은 나무등걸과 함께 전체 윤곽을 알 수 있게 철로 그 뼈대를 대강 이루어 놓았다. 과연 크고 성인 남자 5명 정도는 들어가서 노를 저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노도 발견되었는데, 노를 고정한 자리가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창녕 비봉리 배의 재질, 크기, 윤곽에 대해서는 지금 한창 리모델링 중인 국립중앙박물관 선사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봉리의 배는 아니지만 역시 신석기 배로 추정되는 울진 죽변리유적의 신석기 조각배와 노도 참고할 만하다. 죽변리의 배는 녹나무로 밝혀졌는데, 노가 길이 170cm 정도의 상수리나무로 만들었을 것이 추정되므로 카누 역시 최소 5인 이상이 몰 수 있을 만한 큰 통나무배였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죽변리 카누는 《국립 경주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죽변리 카누 유적이 보이는 신석기 녹나무의 재질이 돌같기도 해서 더 신비롭다는 생각이 든다.   
 

 

신석기 한반도의 카누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창녕 비봉리 패총 전시관》의 설명에 따르면, ① 도끼질을 하여 나무를 베고, ② 나무의 잔가지를 쳐내고, ③ 일정 기간 통나무를 물에 담구어 두고 ④ 통나무의 겉면을 조금씩 불에 그을린 다음 돌자귀로 파내어 나무배를 완성하고 ⑤ 어로에 나선다라고 되어 있다. KBS 역사스패셜 《신석기인들 바다를 건너다》((2005.5.13.)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는, 문화재 복원 전문가 윤광재 선생님의 5인용 신석기 카누 재현에 따르면 통나무(직경 1.5m, 길이 6.5m)를 잘라(여기에도 몇 명이 얼마나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지 아찔하다; 혈암을 숫돌에 갈아 날카로운 자귀를 만드는데 4시간이 걸렸다) 내부를 파려면 날렵한 간석기인 돌대패(숫돌로 필요한 돌면을 날카롭게 갈아 만든)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누 제작의 일차적 조건은 석기 제조 기술이다.   

다큐멘터리에는 현대의 배 만드는 장인이 재현된 신석기 간석기로 배를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모두 세 분이 출현하셨는데, 말씀에 따르면 신석기인들은 배의 한가운데를 불로 태워 숯으로 만들면서 작업한다고 한다. 그러면 단단한 나무를 보다 쉽게 깎아 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의 속도라면(기술자 몇 명이 필요한지는 논외로 하고) 6개월 이상이 걸릴 것이라고도 한다. 실제로 이 팀은 재현된 신석기 카누를 만들었는데 석기 방식은 아니었고 전동 대패 등을 이용했다. 그래도 거의 1달 이상이 걸렸다. 
 
이 배의 형태적 특징은 선두와 선미의 모양이 다르다는 점이다. 선미가 납작하게 깎인 모양은 일본 조몬 시대 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일단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점은 《창녕 비봉리 패총 전시관》의 재현물은 KBS 역사 스패셜이 재현하고 있는 카누와 다른 형태로 소개되어 있다는 점이다. 역사 스페셜 방영이 2005년이고 《패총 전시관》리모델링이 2017년에 되었으므로 그 사이 한반도 선사의 배 형태에 대한 학계의 의견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비봉리 배 재현물은 선두와 선미가 같이 완만한 삼각형을 가진 것으로 되어 있다. 2023년 여름 인문공간세종에서는 일본 홋카이도의 아이누 민속을 연구하기 위해 답사를 다녀왔다. 삿포로시 인근의 《니부타니 아이누 박물관平取町立風文文文化館》에서는 일본에서 제일 긴 카누가 전시되어 있었다. 이 모형은 《국립중앙박물관》과 울산반구대 고래잡이 배 암각화처럼 선두와 선미가 같은 형태다.  
 

홋카이도 니부타니 아이누 박물관의 배

 

카누 만드는 과정을 보고 있으려니, 석기 하나를 제작하던 공정과는 차원이 달라 아찔해진다. 이런 기술을 개발하고 전수하는 공동체의 규모며 전통에 대한 그들의 응집력이며가 궁금해진다. 과연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인류는 언제부터 배를 타게 되었을까? 바다를 정복한 최초의 항해자들을 연구한 브라이언 페이건에 따르면, 적어도 5만 년 전에 이미 동남아시아 본토 사람들은 노를 젓거나 돛을 이용해 섬에서 섬으로 이동하여 뉴기니와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진출했을 것이라고 한다.   

노가 아니라 돛까지, 5만 년 전에 말이다. 돛이라면 천을 짜야 하는 일인데 물레를 이용해 실을 잣지 않고 잎이 큰 식물들이나 갈대를 이용했다고 가정하더라도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무의 본성과 파도의 본성이 마주치는 힘 관계를 이용해서 배를 만드는 것에 더해 바람의 본성까지 취합해서 물살을 가르는 카누라니, 선사의 기술력에 입이 쫙 벌어진다. 그렇다! 어떤 최초가 있는 것이다. 일반인도 우주 비행선을 탈 꿈을 꾸는 세상이니 탈것의 기술 발달이 어디까지 뻗어갈지 가늠이 되지 않지만, 그 모든 것의 최초가 인류 기술 문명의 도달점보다 더 놀랍다고는 할 수 없다. 최초의 한 걸음을 뗀 그에게는 어떤 모델도 없었다. 

3만 년 전이 되면 동남아시아 사람들의 후손은 태평양 남서부 비스마르크 해협에서 아예 터를 잡았을 것이고, 기원전 8000년에 이르면 에게 해의 여러 섬들 사이로 바다를 종횡무진하는 배들을 쉽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창녕 비봉리의 배도 《창녕 비봉리 패총 전시관》의 설명에 따르면 8000년 전의 것이다. 배는 8000년 전에는 지구 곳곳의 인류에게는 친숙한 탈것이 된 모양이다. 
 
덧붙여 정리하면, 선사의 바다-탈것의 종류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갈대 보트와 나무껍질 보트, 그리고 통나무 카누다. 부산 영도의 《국립해양박물관》애는 파피루스배(갈대배), 통나무배, 가죽배, 페니키아 무역선 모형, 다우선 모형, 갤리선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내가 인상적으로 본 것은 갈대배다. ‘갈대를 이용하면 가벼운 배를 만들 수 있고 뭍으로 쉽게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삼일이 지나면 물을 먹어 쓸모가 없어진다. 예를 들어 초기 캘리포니아 인디언들이 앞바다의 섬으로 항해할 때 골풀 카누를 이용했지만 나흘 정도밖에 쓰지 못했다. 이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카누를 해변에 말려야 했다.’(『인류의 대항해』, 76~79쪽 참고) 골풀 카누를 엮고 말리고 버리고 다시 엮는 전 과정은, 어떤 물에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배를 욕망하게 했을까? 아니면 그 자체로 물을 이길 길은 어디에도 없다는 점을 깊이 깨닫게 해주는 기술의 한계 체험이었을까?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어떤 배도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 그 하나하나의 기술 발전에 달려들었을 인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뛴다. 
 

4. 우주적 지혜를 향한 포경(捕鯨)의 꿈
배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실제 바다 사냥술의 문제가 남는다. 사냥꾼 한 사람의 차원에서는 이런 문제가 예상된다. 숲에서 곰의 흔적을 찾으려면 나무 등지에 할퀴어져 있는 곰의 손톱 자국이라든가 방금 누고 간 똥의 냄새와 형태라든가를 추적하면 된다. 그런데 고래처럼 큰 바다 동물이 멸치처럼 몰려다니는 것도 아니니, 그들이 언제 출현할지는 알 수가 없다. 고래를 마주치기 위해 물 안에 들어가서 하루종일 잠수를 할 수도 없다. 숲과 바다의 가장 큰 특징은 바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래의 똥은 운이 좋다면(누구에게 좋은 운인가? 『블루 머신』, 333~335쪽 참고), 특히 대왕고래의 똥은 철분이 풍부하고 물에 오래 떠 있는데 바닷속에 좀 오래 남아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런 상상 자체가 어처구니 없다. 영양소를 필요로 하는 바다 생물들에게 고래의 똥은 중요한 음식일 수도 있고, 물길은 똥을 금방 바닷물에 녹여버리고 말 것이다. 바다에는 해류가 쉬지 않고 흐르니 고래가 남긴 모든 자취는 물길을 따라 순식간에 흩어져버릴 것이다. 바다는 냄새도 모양도 간직하는 법이 없다. 바다는 흔적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럼 포경사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는 정말로 바다의 위아래를 읽어야 한다. 위로는 멈춤 없이 부는 바람의 세계, 아래로는 육안으로는 다 구별 불가능한 깊고 푸른 해류의 질서. 게다가 수영 실력, 잠수 실력, 노를 젖는 실력, 흔들리는 배 위에서 작살을 던지는 기술까지도 부단히 연마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포경사들끼리 힘을 합치는 법도 계발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도 함께 저어야 하고, 잡은 고래도 함께 끌고 돌아와야 한다. 그 큰 고래를 마을에서 배분하려면 마을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철학(석기 제작 기술과 카누 깎는 기술을 전수하고 받을 이는 어떤 계층의 누구인가?), 구성원들의 위계에 대한 살핌(고래 고기와 가죽을 어떤 순서로 배분할 것인가?), 각자의 처지(이번 달에 누가 다쳤고, 누가 병들었고, 누가 아이를 낳았는가?)에 대한 섬세한 분석도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고래잡이가 곰사냥보다 압도적으로 어렵고 큰일처럼 다가온다. 고래잡이는 풍요로운 자연 전체에 대한 앎과 공동체 고유의 생활 윤리에 대한 통찰을 필요로 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통찰력을 갖추려면 도제식의 충실한 교육과 훈련이 있지 않았을까? 

카누 조종사가 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던 중 해양과학자 헬렌 체르스키Helen Czerski의 『블루머신』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헬렌 체르스키는 원래 ‘거품’을 연구하는 실험물리학자였는데 우연히 해양물리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해양물리학은 파도치는 바다의 표면과 거대한 해류의 역학이 구성되는 심해의 다양한 물리적 조건을 탐구하는 학문이기에 수영은 물론 스쿠버다이빙 실력까지 갖추어야 한다. 하얀 가운을 입고 직각의 실험실, 직각의 책상 위에서 네모난 서류 학술 보고서 작업을 했을 헬렌은 곡선밖에 없는 유동의 세계에서 연구를 하게 되었다. 헬렌은 『블루 머신』도입부에서 바다를 만나는 일, 바다의 물리학을 하는 일, 그 모든 것을 카누 타기에 비유한다. 
 

  “카누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설계된 단순한 물리적 물체가 아니다. 카누를 제작하고 운반하고 관리하는 것, 카누에서 노를 젓는 것, 카누의 모든 면이 팀워크의 상징이다. 팀워크가 이 섬나라들을 하나로 묶는다. 팀워크는 하와이어로 ‘오하나ohana’라고 하는데, 넓은 의미에서 가족 그리고 카누에 탄 사람들을 돌보는 행동이다. 해양은 육지와 다름없이 우리 안식처의 일부다. 바다는 변화무쌍하고 위험하지만, 우리가 겸손한 태도로 관찰하고 탐구하면 우리를 지지하며 도울 것이다.
  우리는 카훌루이Kahulhi 해만(海灣)에서 출발해 마우이섬의 두 번째 화산인 마우나 카할라와이Mauna Kahālāwai 주위를 돌아서 키헤이Kihei에 도착하는 항해를 시작했다. 항해를 무사히 마치려면 노련한 기술은 물론 날씨와 바다 상황이 좋은 행운도 따라야 한다. 중요한 점은 항해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우리가 함께 보내는 시간과 여정을 통해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이다. 적도에서는 해가 빨리 뜨기 때문에 의식은 단 몇 분간만 진행된다. 밝은 라일락색과 분홍색이 할레아칼라산 뒤편의 하늘을 가득 채우면, 키르케오가 노래를 부르며 의식을 마무리하고 우리도 동참한다. ‘에 알라 에E ala e’는 하와이 어린아이들이 가장 처음 배우는 중요한 노래로, 햇빛이 바다에 처음 닿아 만물이 시작되는 소중한 순간을 기념하는 내용이다.
  화창한 하늘 아래로 쏟아지는 강렬한 햇빛이 느껴지는 듯했다. 내 바로 뒤의 여섯 번째 좌석에 앉아 카누 방향을 조정하던 캠Cam이 외쳤다. “호오마카우카우Ho’omākauk” ‘준비’를 알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노를 들어 올렸다. 찬란한 햇빛이 눈앞 바다에 닿는 순간 노가 공중에서 마지막 정적의 순간을 맞이했다. “이무아imua!” ‘앞으로 나아가자’라는 구령과 함께 노 6개가 물에 들어갔다. 항해가 시작되었다.”(헬렌 체르스키, 『블루 머신』, 14~15쪽)

 

무역풍이 섬들 사이로 부는 하와이에서 카누 타기는 많은 의식을 동반하는 일이다. 지상의 모든 문제를 품고 대양으로 나아가 도움을 구하는 일이다. 어쩌면 카누 타기의 핵심은 항해의 성공 즉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에 있지 않고 바다에 대해 배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때 바다란 육지에서 보통 우주 자연이라고 하는 만물을 의미한다. 헬렌이 말하는 항해의 주체는 ‘내’가 아니고 ‘우리’이며, 이 우리라는 것에는 바람의 방향이나 세기 습도와 같은 대기의 상황과 바닷속 해류의 움직임과 그 변화 전부를 포함한다. 당연히 이런 범위 안에 카누 조종사가 들어간다. 결국 항해자는 내가 속한 세계를 배우기 위해 카누를 몬다.     

나는 아무래도 한반도의 선사인들이 그냥 배가 고파서 바다에 나갔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고래를 잡는 바로 그 순간조차, 항해사들이 느꼈을 것은 바다를 향한 친밀한 존경심이 아니었을까?  
 

글_오선민(인문공간세종)

 

 
※ 참고문헌 ※
‧ 더그 복 클락,『마지막 고래잡이』, 소소의책
‧ 헬렌 체르스키,『블루 머신』, 쌤앤파커스
‧『대곡천 사냥꾼 바다를 만나다(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발견 50주년 기념 특별전』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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