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雨)는 토기의 꿈
1. 토기의 다양한 용도
부산 《동삼동 패총 전시관》에서 아이의 시체가 들어 있었던 한반도 최초의 옹관묘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으로 죽은 몸도 있는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사람’이라고만 하지 않는다면 대개 식기류 그릇에는 죽은 생물이 담긴다. 선사의 옹관식 장례도 신의 밥상을 차리는 일이었을까? 후지하라 다쓰시는 변기가 사기로 되었다는 점을 들어 일종의 그릇으로 본다. 후지하라에게 있어 배변이란 자연의 밥상을 차리는 일이다(후지하라 다쓰시,『전쟁과 농업』).
장례를 신의 밥상을 차리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는 묘의 부장품으로 가장 많이 꼽히는 것은 토기다(나중에 더 찾아서 알게 된 사실인데 고대 제국, 예를 들면 이집트 투탕카멘의 무덤 부장품실에서도 가장 많이 발견된 것은 토기였다. 일본 신석기 조몬 장례 부장품도 핵심은 토기에 있다. 그릇과 죽음 의식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인류학적으로 필요하다). 선사시대부터 청동기까지 한반도 장례 문화를 연구 전시하고 있는 부산의 《복천 박물관》에서는 껴묻거리로서의 토기를 자세히 소개한다(껴묻거리란, 시신에 껴묻는 물건이라는 뜻으로 부장품의 고유말이다). 복천 지역의 청동기 시대 고위층 무덤에서는 본실(무덤 주인의 방) 옆에 다양한 형태의 토기를 따로 묻은 부실(껴묻거리 방)을 따로 두기도 했다(투탕카멘의 무덤에도 본실과 부실이 따로 있다).
껴묻거리의 종류는 다양했다. 복천동 38호 고분군의 경우, 덧널무덤(목곽묘)인데 길이 750cm, 너비 350cm, 깊이 150cm 크기로 구덩이를 파고 두께 10cm 가량의 나무판 수십 매를 사용하여 535*250cm 목곽을 만든 무덤이다. 곽과 구덩이 사이의 공간에는 모래가 섞은 흙과 점토가 번갈아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이 무덤에는 시신 주의로 400점 가량의 화살촉이 나란히 엮어 5열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무덤 서북쪽의 모서리 돌이 깔리지 않은 곳에서는 순장자의 흔적이 나왔다. 물론 이 안에서는 엄청난 양의 온전하거나 부서진 토기도 나왔다. 아마 원래는 완성된 형태로 묻었을 것 같다(일본 신석기 조몬의 장례 문화에서는 토기를 일부러 깨서 묻기도 한다). 부장품 하나하나의 의미를 재구하기는 어렵지만, 인신공양(人身供養)인 사람과 그릇, 화살 등이 전부 장례의 필수 유물이었다고 하니 죽음 앞에서 사람의 지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여하튼 이번 회에서는 신석기 혁명의 상징으로서 흔히들 거론되는 토기에는 곡식의 저장이나 가공 이외의 목적도 부여되어 있었다는 점에 대해 더 생각해보려고 한다.
손으로 음식을 바로 집어먹을 수도 있고, 불판에서 고기를 구워 바로 먹을 수도 있다. 인류 식사에 그릇이 필수품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식기를 따로 두고 있는 동물이나 식물은 없으므로 식기란 반자연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옹관묘를 통해 생각해볼 수 있듯, 어쩌면 그릇은 특별한 저장이나 가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음식 차림에 있어 격식을 갖추기 위해 도입되었는지도 모른다. 자연의 먹거리를 ‘누군가’ 가공하고, 그것을 또 다른 ‘누군가’와 나눈다는 점을 의식하면서 어떤 문화적 양식을 굳이 만든 것이 ‘그릇’의 시작 아니었을까?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의 모든 활동은 어느 하나 무의미하지 않은 것이 없다며, 먹는 일 역시 허기나 입맛을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미를 흡수하기 위한 활동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같은 고기라도 구워서 먹느냐(불판 필요), 끓여서 먹느냐(오목 그릇 필요)는 음식을 나누는 이들 사이의 관계를 중재하고 결정하는 문제이다.
불판 위에서 굽게 되면, 아주 섬세하지만 불판에 붙은 부분과 공기를 맞댄 부분 사이에 굽기의 차이가 생긴다. 지나치게 탄 것이 생기면 버려야 하니 대단히 사치스러운 요리법이며(귀족적이다), 구울 때 냄새가 사방에 진동하기 때문에 주변에 별로 관계없는 이들까지 군침을 흘리며 모여들게 하므로 개방적인 열린 밥상의 상징이 된다.
반면 끓이게 되면 그릇 안에는 맛의 차이가 없게 되므로 국을 나누는 이들 간에 고깃덩어리의 개수에서는 차이가 생길지는 모르지만 기본적으로는 평등한 관계가 가정된다. 하지만 이런 공평한 관계는 ‘그릇’에 의해 음식 양이 한정되므로 대단히 폐쇄적인 공동체성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국이나 찌개는 민주적인데도 베타적인 문화가 되어버린다(레비-스트로스,『신화학』).
껴묻거리로 아주 많이 사용된다는 점,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의 요리법에 대한 통찰에서만 보아도 그릇은 어쩌다보니 발명하게 된 기술이라고는 할 수 없다. 더 나아가면 토기는 죽은 자뿐만 아니라 산 자의 위세를 보여주는 용도로도 쓰였고 동삼동 패총 유적지에서도 알 수 있지만 대외 관계를 위해 현해탄을 건너는 원거리 교역물이 되기도 했다.
보통, 구석기와 신석기 문화의 결정적 차이로 제시되는 것이 ‘토기’다. 재배 기술이 고양되면서 저장과 축적의 필요가 생기자 그릇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릇은 자기 한 손의 능력과 범위를 보고 살아가던 채집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잉여를 관리할 수 있다고 가정해서다. 부족 안에 잉여 생산이 생기게 되면,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나오고 그들을 중심으로 권력과 예술이 싹트게 되고 마침내 잉여 생산의 분배를 담당하는 관료제와 국가가 출현하게 된다. 대량 이런 스토리가 신석기 ‘그릇’론의 핵심을 이룬다.
하지만 이처럼 그릇이 잉여 생산의 상징이 아니라 부족이 그들의 땅과 그들의 조상 사이의 관계를 중재하는 문화적 매개물, 동해 이편과 저편을 연결하는 관계의 상관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릇이 있었다 없었다 즉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갔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릇의 모양이라든가 특히 그 무늬에 주목하여 생각거리를 더 찾아보자.
2. 토기 제작, 흙과 불의 결혼
토기란 인류가 흙과 불을 결합시킨 것으로, 불을 고도로 다루게 된 증거가 된다. 전세계적으로 토기는 만 5천여 년 전부터 구워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도대체 누가 흙을 구울 생각을 했을까? 아마 맨 처음에는 누군가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나무에 불이 붙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그 불씨를 오래 유지할 궁리를 했겠지. 또 누군가는 불가에서 단단해지는 흙더미를 보고 또 보다가 문득 아예 모양을 빚어 구울 생각을 했을 것이다. 갖고 놀기에도 석기나 골기(骨器)의 돌이나 뼈, 바구니의 나뭇가지에 비해 더 편하고 재미있었을 수 있다.
일단 토기를 성형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반죽한 점토를 일정한 굵기의 반지 모양의 테로 만들어 쌓아 올리는 법으로 테쌓기(윤적법)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길고 납작하게 만든 점토 띠를 아래로부터 위로 감아올려 만드는 범으로 권상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점토 덩어리를 그냥 손으로 눌러 빚어 토기 모양을 만드는 법이 있다.
나는 양양 오산리의 《선사유적박물관》에서 첫 번째 방법으로 토기를 성형하고 있는 재현물을 보았다. 『토기와 도자기, 한국 도자기 문명사』에서는 한반도 신석기시대 이후로 삼국시대까지 대부분의 토기는 테쌓기 방법으로 성형되었다고 한다. 점토 덩어리에서 물레를 이용하여 한번에 토기를 뽑아올리는 기법은 통일신라시대까지는 개발되지 않았다고 한다(『토기와 도자기, 한국 도자기 문명사』, 26쪽). 이렇게 세 가지 방법 중 하나로 대강 형태가 만들어지면 차돌 등을 사용해 안과 밖으로 원하는 모양으로 성형을 하고, 마지막에 무늬를 새기개로 긋거나 눌러서 만든다.
이렇게 흙으로 빚는 것까지는 어찌어찌 되는데, 문제는 굽기다. 노지(爐址)에서 불을 바로 피우면 최고 온도는 700도가 되는데, 일단 순식간에 불이 올라가기는 하나 식기도 빨리 식어서 신속히 불에서 토기를 빼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구우면 쉽게 부서진다. 그래서 점토에 다양한 풀 등을 섞기도 한다. 토기의 무늬는 이렇게 잘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가 생선이나 소시지를 구울 때 보통 구멍이나 칼 금을 내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해석도 있다. 이런 대강의 방법만 떠올려보아도 토기의 재료가 되는 흙을 만지고 모양을 성형하는 데에는 흙의 성질에 대한 탐구, 불의 온도를 높이고 유지하는 기술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특히 높은 열을 내기 위해서는 화력을 일으킬 수 있는 땔감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전반적으로 보아 토기는 혼자서, 즉흥적으로는 만들 수 없는 물건이다. 흙과 불의 결합에 대한 심오한 철학과 기술의 실험이 필요한 것이다.
3. 토기의 무늬
이제 한반도 신석기 토기의 기본 형태와 무늬에 대해 알아보자. 흥미롭게도 직접 다녀 본 동해, 남해, 서해의 신석기 박물관에서는 각기 다른 토기가 발견되었다고 소개한다. 신석기 시대 바다 사람들에게는 각기 다른 취향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토기의 분류는 크게 한반도 전체를 대상으로 했을 때 ① 함경북도 굴포리 서포항을 최북점으로 하는 동북 지방 토기가 있고, ② 오른쪽 북단 끝을 평안북도 토성리로 하고 황해도 신암리 용연리 등을 주요 지점으로 하는 서북 지방 토기가 있다. ③ 북한의 평양시 금탄리부터 해서 서울 암사동까지를 포함하는 중서부지방 토기권에 시흥 오이도가 들어가고, ④ 양양 오산리부터는 부산 동삼동, 통영을 거쳐 왼쪽으로 흑산도까지는 남부 지방 토기권이 된다.
일단 동북 지방 토기와 중서부, 남부 지방 토기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바로 토기 바닥의 모습이 다르다. 동북 지방과 서북 지방 토기는 바닥이 납작한 것이 특징이다. 중서부 지방과 남부 지방은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한반도 신석기 대표 토기로 소개하는 모습인데 바로 아래가 뾰족한 것이 특징이다. 이런 모양의 차이는 동북과 서북 지방의 흙과 중서부, 남부 지방의 흙이 다른 데에서 기인한다. 중서부와 남부 지방은 주로 바닷가 유적지이고 그 흙이 질어서, 불에 구울 때 바닥이 매끈한 모습으로 나오지 않고 휘어질 가능성이 높아 아예 뾰족하게 만들어 바닥에 박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보다 중요한 것은 무늬다. 동북지방에서는 초기에 짧은 선이나 점으로 된 무늬를 몸통 윗부분에 새겼으나 중기에는 타래 무늬가 등장하고 아가리가 밖으로 약간 벌어진다. 후기에는 민무늬토기의 비율이 높아진다. 중서부에는 처음에는 바닥, 몸통, 아가리에 각기 다른 무늬가 새겨져 있었으나 점차 바닥부터 시작해서 몸통, 아가리 순서로 무늬가 없어지다가 청동기 시대에는 민무늬가 된다.
오산리와 동삼동을 포함하는 남부 지방 토기권을 확인하려면 《오산리 선사유적 박물관》에 가면 되고, 여기서는 덧무늬토기를 찾아볼 수 있다. 덧무늬 토기란 토기 바깥으로, 점토로 다시 가늘고 긴 줄을 만들어 붙인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남부 지방 토기들은 중서부 지방의 영향을 받아 점차 바닥이 뾰족한 토기가 되고, 무늬도 전기에는 아가리부분에만 무늬가 새겨졌었는데 전면 무늬로 차츰 바뀌다가 결국 나중에는 중서부 지방에서처럼 민무늬가 된다.
이렇게 점차로 가는 줄무늬에서부터 민무늬로의 전개가 있지만 신석기 토기 전반적인 무늬를 두고 우리는 빗살무늬라 한다. 빗살이란 ‘머리를 빗는 빗의 살’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하면 다양한 패턴의 직선들이다. 이 직선이 지그재그로 펼쳐져 있다. 그런데 이 빗살무늬는 한반도 고유의 것은 아니다. 지그재그 열(列) 모양의 무늬는 2만 5,000년~1만 2,000년 전의 후기 구석기시대의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흔하기로는 기원 전 3000~2000년기 유럽과 서아시아의 토기에서라고 한다.
이 무늬의 기원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아직 물레를 알지 못했던 신석기시대 초기에는 용기를 만들 때 점토 예비품에 끈을 연결하거나 짠 바구니에 점토를 발랐다고 한다. 앞서 한반도 신석기 토기 성형은 직접 점토를 만들고 다듬었다고 했는데, 전 세계적으로 토기 발달을 보면 일단 바구니를 먼저 짠 다음 그 바깥에 점토를 바르는 방식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이 흔적이 차차 전통이 됨에 따라, 아예 토기라고 하면 그런 무늬가 있는 것으로 가정되었을 수 있다. 이런 가설을 뒷받침하는 것이 부산 동삼동에서 발견된 ‘그물무늬 토기’ 파편이다. 이 토기는 그물로 짰던 바구니를 토기로 구현하지 않았을까 생각될 정도다.
둘째는 ‘비’에 대한 염원설이다. 빗살무늬는 근동과 동남유럽의 신석기 시대에 널리 인정받은 무늬다. 그래서 단지 바구니의 연장이라고만 설명할 수는 없다. 고대 상징 연구자들은 지그재그 다발의 의미를 ‘비’로 보았다. 이란에서 기원전 4000년 무렵 나온 토기의 경우, 간혹 수직의 평행 지그재그 그림의 윗부분이 잘려나간 경우가 있다. 아리엘 골란은 이런 중간 끊어짐은, 잘린 부분 바깥에서 그림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본다(아리엘 골란,『세계의 모든 문양』, 38쪽) 마치 위에서 비가 내려와 토기 안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말이다. 우랄의 여러 암화(巖畵)에는 비를 선물하는 신을 향해 기원하는 장면도 있다고 한다.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전시회를 했다. 북미 선주민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의식주 유물이 소개되었는데, 여기에 전시된 토기 중에는 새를 형상화한 미국 남서부 인디언의 토기가 있었다. 새는 특히 건조한 사막 지대에 사는 주니족에게 비를 부르는 동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토기에 새를 그림으로써 그들은 비를 염원했을 것이다. 그릇에 비의 상징을 그렸다니, 토기란 그저 가재도구이기만 하지 않고 하늘과 땅을 잇는 물길로서도 존재한다. 그릇의 무늬란 있는 것을 담기 위해서가 아니라 없는 것을 부르기 위해서도 덧붙여진다. 그릇이 그릇이 아닌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어째서 후대로 갈수록 토기의 무늬가 점점 없어지는가 하는 점이다. 불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해서 무늬를 통해 형태를 잡을 필요가 없어졌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을 품고 있다가 조몬 토기를 보게 되었다. 놀랍게도 조몬 토기는 그 모양이나 무늬의 범위가 대단히 다양한데 화염무늬 토기를 조몬 시대 최고(最高)로 꼽는다. 불을 다룰 만큼 다룰 줄 알았던 조몬 사람들은 토기 자체가 아예 불이라고 생각했던 것같다. 이처럼 정교한 무늬를 손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수준을 자랑했을지도 모른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두 개의 신석기 문화권에서 한쪽은 시대를 거듭할수록 그 무늬를 걷어내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다른 한쪽은 더더욱 화려한 무늬를 계발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한반도의 토기를 장식했던, 저 강렬한 빗살무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정답은 없다지만 나는 한반도 신석기의 빗살무늬 토기가 한편으로는 바구니의 기억을, 다른 한편으로는 비의 염원을 간직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상상하며 큰 감동을 느낀다. 겨우 한 점의 토기, 한 줄의 빗금이라지만 흙과 불의 만남이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를 잇고 하늘과 땅을 이으려 했던 인간의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글_오선민(인문공간세종)
※ 참고문헌 ※
후지하라 다쓰시,『전쟁과 농업』, 따비
레비-스트로스,『신화학』, 한길사
김종일‧권오영‧장남원‧한혜선,『토기와 도자기 : 한국 도자기 문명사』, 들녘
아리엘 골란,『세계의 모든 문양』, 푸른역사
'나의 석기 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석기 시대] 기도는 손으로 하는 일 (1) | 2025.01.23 |
---|---|
[나의 석기 시대] 신석기의 무덤들 (1) | 2025.01.09 |
[나의 석기 시대] 조개 가면 미스테리 (0) | 2025.01.02 |
[나의 석기 시대] 외모 지상주의의 기원 (1) | 2024.12.26 |
[나의 석기 시대] 바다는 사람과 공동체를 기르네 (1) | 2024.12.19 |
[나의 석기 시대] 채집, 어디까지 해봤니? (0) | 2024.12.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