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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석기 시대

[나의 석기 시대] 신석기의 무덤들

by 북드라망 2025. 1. 9.

신석기의 무덤들


1. 조개 가면과 저승
동삼동 패총 유적지에서 마주한 조개 가면을 보니, 한반도 신석기 사람들이 지금 여기와는 다른 어떤 세계, 일상적으로는 직접 마주하기 어려운 어떤 세계를 보고 있었음을 알겠다. 그것은 죽음이다. 


한편 동삼동은 패총 유적지다. 패총은 조개무지 즉 조개 무덤이라는 뜻으로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자리를 말한다. 한때의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한 폐허다. 활발하게 일상이 영위되던 그 시절에도 생활 쓰레기 같은 것을 모아둔 곳이었을 수도 있다. 우리네 집에도 화장실이나 부엌과 같이 먹고 씻은 생활의 찌꺼기가 나가는 곳이 있다. 마을을 이루고 살던 선사인들에게도 그런 공동의 쓰레기장이 있었을 것인데, 세월이 지나 사람들이 그 마을을 떠나게 되자 남아 있는 흔적 전부가 원래의 쓰레기터를 중심으로 다 쓰레기장이 된 것일 수도 있겠다. 


선사의 흔적들 자리를 왜 꼭 ‘조개 무덤’이라고 할까? 조개의 석회 성분 때문에 생활 흔적들을 잘 보존할 수 있어서다. 조개는 인간에게 있어 먹이기도 하고 남기기도 하는 존재이다. 동삼동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보통 바닷가 패총 유적지에는 선사의 토기, 석기, 뼈연모, 토제품, 생활도구, 집자리, 화덕시설까지가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 더 중요하게 추가할 것이 바로 무덤이다. 동삼동 패총 유적지에서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독무덤이 나왔다(동삼동 패총의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7천 오백년 전에서 3천 5백년 전까지로 추정된다고 한다). 

 

동삼동에서 출토된 옹관묘의 부분

 


한반도 신석기 무덤은 보통은 간단히 땅을 파고 시신을 매장한 움무덤(토광묘)과 거주공간을 무덤으로 이용한 동굴유적이 있다. 자연장이라 할 수 있는 동굴무덤을 제외하면 신석기 무덤의 형태는 출토지 기준 패총 무덤과 노지 무덤으로 나눌 수 있고, 다시 개인 무덤과 공동 무덤으로 나눌 수 있다. 움무덤은 통영 연대도, 욕지도 패총, 부산 범방 패총, 안도 패총에서 발견되었다. 안도 패총에서는 2구의 시신이 합장된 것도 있다. 독무덤은 동삼동과 상촌리 유적에서 확인된다. 이 중 통영 연대도 패총은 여러 구의 인골이 합장된 집단 매장 유적이다. 공동 묘지로 노지형인 곳은 동해 바다, 울진의 등기산 언덕 위에 있는 후포리 유적이 있다. 조개 가면을 생각했던 신석기 사람들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돌아가는 어떤 곳을 상상했다. 오늘은 이 각각의 매장법과 관련해서 생각할 거리들을 차례로 말씀드려보고 싶다. 
  


2. 독무덤, 그릇의 다른 의미 
신석기시대 독무덤은 진주 상촌리 유적과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발굴되었다. 상촌리 유적에서는 2개의 독널이 확인되었는데 그 중 1기는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전세계적으로 발견되는 독무덤은 대체적으로 바닥이 뚫려 있다. 앞 회에서 다룬 것처럼 시체가 부패할 때 발생하는 여러 오염물을 땅속으로 돌려보내고 뼈만 깨끗하게 남기기 위한 정화 장치로 보인다. 그런데 상촌리에서 발굴된 또 다른 독널은 수직으로 땅에 꽂힌 상태로 발굴되었고, 내부에서는 화장(火葬)한 인골편이 검출되었다. 독널의 바닥이 막혀 있었다는 의미다. 


토기 즉 흙으로 빚은 그릇이라고 하면 안에 음식을 담을 것 같은데 시신을 담을 수도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시신이란 대지(흙)의 음식이니까 장례란 자연의 식탁을 차리는 일이기도 하다. 농생태학자 후지하라 다쓰시는 화장실을 하나의 성소로 본다. 변기 역시 토기이며 인간의 배설물은 자연의 음식이라는 의미였다. 그는 배변을, 입에서 장을 지나 항문을 통과한 뒤 변기를 거쳐 대지로 돌아가는 긴 여정에 참여하는 생물의 활동으로 본다. 그래서 배변은 자연의 밥상을 차리는 일이라고까지 말한다(후지하라 다쓰시,『전쟁과 농업』). 그런 관점을 확장해본다면 독에 시신을 묻은 것을 격식 있게 대지신의 밥상을 차리는 일이라고 보아도 될 듯하다.  


동삼동 패총의 독무덤은 어깨 부분에 둥근 손잡이가 여러 개 달린 큰 항아리를 썼다. 함께 출토된 유물로 보아 7천 년 전쯤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길이 60cm, 너비 30cm 정도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항아리를 옆으로 묻은 형태다. 발굴 당시에는 항아리가 깨져 있었다. 옆이라면 동과 서, 남과 북, 어디를 향했다는 말일까? 상촌리에서처럼 세로로 묻었을 경우와 죽음관에서 어떤 차이가 있었다고도 할 수 있을까? 위와 아래의 방향, 좌와 우의 방향이 가지는 인류학적 의미가 궁금해진다. 레비-스트로스는 지구가 동에서 서로 향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인류 대부분의 항해자들이 서쪽으로의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네안데르탈인들도 장례를 치루었을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는데, 네안데르탈 매장들은 동-서향을 선호하는 강한 정향성을 보여준다고 한다. 패총 자료집의 설명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은데 아쉽다. 

 

동삼동의 독은 크기가 작아 유아용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런데 로베르 에르츠도 말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류의 2차장은 집단의 영속에 큰 의미를 지니는 자의 상실을 복원하는 의미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생전에 부족에게 어떤 유의미한 일을 했을 리 없는 아이의 장례를 독까지 마련해가면서 치루었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로 보인다. 동삼동의 아이는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여기의 단서를 러시아 숭기르 유적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모스크바 근처 숭기르Sunghir(지금으로부터 28000년 전)에서도 호모 사피엔스의 아이 무덤이 나왔다. 숭기르의 매장들 중 하나는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를 합장한 것인데 머리를 맞대고 서로 길게 드러누운 형태다. 숭기르에서는 만 개가 넘는 상아 구슬, 매머드 엄니 핀, 원판, 치레걸이, 매머드 엄니 조각상 하나, 여우 이빨 벨트, 뿔 방망이들, 붉은 적철광 가루가 묻은 마연한 인간 대퇴골, 바르게 편 매머드 엄니로 만든 창이 나왔다. 쌍둥이였는지, 왕의 자재들이었는지, 왕의 대리자들이었는지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하나 확실한 것은 엄청난 부장품으로 보아 부족 내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위치가 대단히 높았으리라는 점이다. 상아 구슬을 만 개 넘게 만들려면 그 제작에 동원된 장인은 얼마나 많았겠으며 기간은 또한 얼마나 길었겠는가? 어쩌면 시신이 부패하는 속도를 늦추어야 했을지도 모르는, 그런 2차장이 떠오른다. 동삼동의 어린이도 숭기르의 어린이도 단지 나이로만 따질 수 없는 어떤 위대한 힘의 존재자였을지도 모른다. 
    


3. 코끼리는 장례식장에 간다 
인간을 다른 종들과 차이나게 하는 것으로 도구 제작, 상징적 의사 전달 등을 꼽지만, 죽음관에 있어서도 인간은 특별하다고들 한다. 장례의 의례에 매우 집착하며 집단의 고유한 문화 논리를 장례를 중심으로 짜기에 그렇다. 특히 인간은 동종인 다른 이의 죽음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죽음, 심지어 물건이나 건물의 죽음에도(남대문, 노트르담 성당 화재) 큰 상실감을 느낀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그렇다고는 하나 동물들 중에서도 애도를 하는 종이 있다. 개, 갈가마귀, 오랑우탄, 거위, 침팬지는 모두 사별의 표시를 한다. 영장류 중에서 어미-유아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면 양쪽 모두 크게 풀이 죽는 기색이 나타나는 종이 있는데, 침팬지의 경우 어미가 죽으면 새끼들은 급격히 무기력해지며 신체 발달에도 문제가 생긴다고 한다. 제인 구달은 나무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은 어떤 수컷 성체 침팬지 때문에 다른 침팬지들이 시신 둘레에서 격하게 흥분하고 당황해하는 장면을 기록하기도 했다. 

 

육지 젖먹이 동물들 중에서 인간처럼 애도를 중시하는 것은 코끼리다. 아프리카 코끼리는 묘지를 만들지는 않지만 사체에는 심각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자기 종에 속하는 사체의 뼈에 주의를 집중하는 일은 일반적이고, 발과 코로 사체 특히 머리뼈와 엄니를 건드는 일도 있다고 한다. 사체를 식별할 의도가 있는 것 같다는 연구도 있다. 물론 우리는 코끼리의 애도가 인간의 애도와 똑같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가까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상실감을 코끼리가 어떻게 해결하려 하는지는 연구해볼 만한 주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 호모 사피엔스로의 진화 직전에 활약했다고들 하는 네안데르탈인들도 무덤을 만들었을까? 독특한 장례 문화를 발달시켰을까? 스티븐 미슨과 같은 인류학자들은 인류의 죽음 의식 발달과정에서 급격한 변화가 6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 사이에 있다고 본다. 거의 빅뱅 수준의 혁명이 일어났다. 호모 사피엔스의 뇌에 인지 유동성이 활발하게 형성되어 자연과 문화 사이, 기술과 언어 사이, 이 모든 것 사이를 동시에 넘나드는 유동적 정보 처리 능력을 갖게 되어 마침내 ‘초월’에 대한 감각이 생기고 그것을 다양한 상징을 통해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스티브 미슨,『마음의 역사』). 


스티븐 미슨이 들고 있는 증거는 부장품으로서의 장신구에 있다. 동삼동의 옹관묘나 순기르의 무덤에서 다양한 장신구가 나왔던 것처럼 말이다. 장신구란 자연에 덩그러니 존재하는 물체를 인간에게, 그것도 인간이 생각하는 이편의 삶 너머의 공간을 의식하면서 만든다는 의미에서 초월에 대한 감각을 들어 있는 상징물이다. 


그런데 장신구만 빼면 네안데르탈인들에게도 죽음 의식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많은 네안데르탈인 매장지에서는 뼈들이 전체 혹은 부분적으로 접합된 형태로 발굴되었으며(동물들이 먹었다면 그런 식으로 정돈하여 뼈를 남겼을 리 없다), 샤니다르 인골 유적지에서 나온 화분(花粉)은 초여름에 개화하는 식물의 것이다(이 무덤은 가을에 발굴되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네안데르탈인들은 동-서 방향으로 무덤을 만드는 경향이 강했으며, 이스라엘 아무드Amud 동굴과 시리아 데데리예Dederiyeh 동굴에서는 결정적인 부장품이 나오기도 했다. 아무드에서 발굴된 유아의 인골에서는 고라니 위턱뼈가 골반 위에 놓여 있었다. 데데리예 아이는 팔을 펼치고 다리는 구부린 채였는데 머리에 석회암 판이 있었다. 데데리예의 동굴 퇴적층에서는 석회암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일부러 갖다 놓은 것이 아니겠는가?(참고,『죽음의 고고학』, 275) 화분이라고 하니 충북 청주의 두루봉 동굴에서 발견된 흥수아이도 떠오른다. 4~6세 정도로 추정되는 아이의 인골인데 주변에 화분이 놓여 있었다. 흥수아이의 연대는 4만 년 전이다.  


비록 구슬을 깎고 목걸이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아무드 아이 유골과 함께 묻힌 고라니 위턱뼈는 분명 부장품이라 할 수 있다. 부장품과 관련해서 더 문제적인 네안데르탈인의 무덤은 돌니 베스토니체의 3인 매장 유골이다. 이 유골들 위에는 적철광 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심지어 이 유골은 영원한 삼각관계를 표현하는 듯 양쪽의 두 남자 사이에 한 여인이 누워 있는 모습이다. 특히 발굴자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 왼쪽의 남성은, 그 자신에게 거의 등을 돌리다시피하고 있는 여인(이 여인의 몸이 기대고 있는 남자는 이 여인으로부터 멀어지려고 또 고개를 반대로 하고 있다)의 음부에 손을 갖다 대고 있기까지 한다. 네안데르탈인도 매장을 할 때 죽은 이들의 관계나, 그들의 사후 운명에 대해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이들 인골 위로 적철광이 뿌려져 있는데(붉은 색은 강렬한 재생의 색으로써 장례식 때 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조몬의 붉은 토기의 경우), 세 사람의 머리와 가운데 여성의 골반뼈에서만 그렇다. 묘 안에서는 탄화된 나무조각들이 발견되었고, 구멍이 뚫리지 않은 조가비, 그리고 구멍이 뚫린 늑대 및 여우 이빨들이 있었다고 한다. 돌니 베스토니체에서 구멍이 뚫린 조가비가 나왔다면 동삼동 패총의 조개 가면과도 연결이 되었으련만, 그렇지는 않았다. 그런데 특별한 돌을 갈고 구멍을 뚫은 것은 아니지만 동물의 이빨들에 구멍을 뚫었다면 돌니 베스토니체인이 장신구를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 끈이 식물상이었다면 썩어 없어졌을 테니 충분히 장신구로의 이행이 있었다고 간주할 수 있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 대부분의 무덤에서 부장품과 장신구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아무드와 돌니 베스토니체의 무덤은 지극한 예외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부산 동삼동에서 출토된 옹관묘의 부분


   

4. 초월의 출현
신석기 동삼동 사람들이 독무덤을 평지에 두고 전시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땅밑에 두고 있었다고 본다면, 동삼동 사람들은 죽음 위에서 일상을 꾸려나갔다고 할 수 있다. 동삼동만이 아니라 패총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골이 많이 발견된다. 일상의 생과 비일상의 죽음이 한 마을 안에 자연스럽게 공존했던 것이다. 나는 동삼동 신석기 마을의 지면 배열이 궁금해진다. 동삼동과 문화적 교류가 활발했던 것으로 보이는 현해탄 건너 일본의 조몬 문화(일본 신석기)권에서는 특히 조몬 초기부터 중기까지 마을의 지면배열에 있어 무덤의 위치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조몬 사람들은 마을 정중앙에 공동체의 무덤을 만들었다. 이 중앙 무덤을 중심으로 장례식뿐만 아니라 마을의 중요한 의례가 치러졌을 것이다. 

 

이런 지면 배열은 남아메리카의 보로로족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어떤 개간지의 중앙에 있었는데, 그곳은 한쪽으로는 강과 경계를 이루었고, 다른 쪽으로는 숲이 연결되어 있었다. 채소밭들이 그 숲의 한쪽 귀퉁이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고, 나무들 사이로 저 멀리 붉은 사암이 가득한 언덕의 배경을 희미하게 볼 수 있었다. 이 개간지를 빙 둘러서 내가 거처하는 것과 동일한 형태의 오두막이 모두 스물 여섯 채가 있었다. 이 오두막들은 원을 그리고 있었으며, 중심에는 적어도 길이가 20미터, 폭이 8미터나 됨직한 오두막이 한 채 있었는데, 이것은 다른 오두막보다도 훨씬 큰 ‘바이제만나제오’(남자들의 집)였다. 미혼의 남자들은 모두 이곳에서 잠을 잤고, 사냥이나 고기잡이 또는 어떤 공식적인 의식을 치르기 위해 밖으로 나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낮 동안에는 부락의 모든 남자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부락민들이 춤을 추는 곳은 이 독신자 숙소의 바로 서쪽 편에 있는 커다란 타원형의 장소였다. 여자들이 이곳에 출입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었다. 여자들의 거주지는 이 오두막을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오두막들이었으며, 남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잣나무숲 사이의 길을 따라서 그들의 회합 장소와 부부가 거주하는 곳을 왕래하였다. 나무 꼭대기나 지붕 위에서 내려다보면, 보로로족의 마을은―독신자 숙소가 바퀴의 중심을 이루고, 주위로 뻗은 소로들이 바퀴의 살을 이루며, 가족이 거주하는 오두막들이 바퀴의 가장자리를 이루고 있는―마치 하나의 수레바퀴 같았다.(『슬픈 열대』, 413~414쪽)

 

 

레비-스트로스의 소개에 따르면 보로로족은 ‘바이테만나제오’라고 하는 남자들의 집을 마을 한가운데에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다양한 의례에 쓰일 악기나 제구(祭具)를 만들도록 한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일상적인 식사와 수다를 하기도 한다. 바이테만나제오는 두 개의 반족으로 나뉘어 있는 집단을 의식적으로 결합하는 역할을 하는데, 주변을 빙 둘러싼 작은 집들은 여자들의 공간으로써 여기서는 오직 죽음이 없고 탄생만 있다. 보로로인들은 삶이 죽음을 둘러싸는 마을 배치도를 그려놓고 그 안에 ‘생명 그 자체로서의 여성’과 ‘죽음과의 통로를 열기 위해 스스로를 문화적 존재로 추상화시킨 남성’을 집어넣는다. 다양한 제사 준비와 죽음에 대한 명상으로 분주한 보로로의 남자들은 오직 생명으로서의 충만함만을 누리는 여성들을 부러워했을 것같다.  


선사의 조몬 사람들도 현대의 보로로족도 마을 한가운데에서 죽음을 보고 살았다. 그런데 조몬 후기가 되면 무덤의 위치가 점점 마을 밖으로 빠진다고 한다. 장례 공간이 일상의 외부로 밀려 나가는 것이다. 한반도 신석기 유적에서도 무덤 위치와 관련해서 비슷한 변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하나는 부산 가덕도고 다른 하나는 울진 후포리다. 전자는 무덤 위치의 수평적 이동을, 후자는 그것의 수직적 이동을 보여준다. 


나는 지난 여름 인문세 한반도 석기시대 유적 답사에서 친구들과 울진 후포리에 다녀왔다. 그때의 코스는 동삼동 패총에서부터 울산 고래 박물관을 거쳐 동쪽 해안가를 달려 울진 후포리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해에 비해 조수간만의 차가 적은 동해의 해안선을 따라 후포리까지 올라갔는데 신석기 어부들의 낙원이었을 장생포부터 생각해도 먼 길이었다. 나는 달리는 차 안에서 저 바닷가는 살만한가, 또 저 바닷가는 살만한가 계속 생각했다.

 


후포리는 지름 4m 안팎의 불규칙한 구덩이를 파고 40구 이상의 시신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묻은 세골장 형태의 신석기 무덤터다. 집단 움무덤인데다가 뼈를 씻어 따로 묻은 2차장의 형태로서, 한반도 유일이다. 이곳에서는 특히 패총이나 청동기 이후 대부분의 무덤에서 껴묻거리로 함께 발견되곤 하는 토기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길고 매끈하게 다듬어진 돌도끼들(가장 긴 것 기준 길이 42cm)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후포리의 유적은 공동묘지다. 그런데 이 무덤은 등기산이라고 하는 산 위에 조성되어 있다. 직접 가 보니 더욱 확실해졌는데, 등기산 아래로 구불구불 꺾여 들어간 작은 만마다 몇 십 가구가 모여 살만한 집락촌 같은 것이 형성될 법했기 때문이다. 신석기 시대 후포리는 여러 마을이 모여 공동 묘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묘지를 산 위에 두고 아래로 마을을 두고 살았으니, 형태로만 보면 죽음이 위에서 아래를 내리누르는 듯하다. 죽음이 생을 누르고 있는 ‘수직’의 출현이다. 


그런데 수직이라고 해도 거대한 신전처럼 산 자를 깔고 앉는 방식으로 억압적이지는 않다. 답사를 갔을 때 과거 공동묘지였을 그 인근을 산책했었다. 망자의 입장에서 보면 보일 것은 아래 마을이 아니라 그 앞으로 쫙 펼쳐진 바다다. 후포리의 사자(死者)들은 망망대해 앞에서 멈추지 않고 부는 바람을 맞았다. 이 무덤에서 칼이 나온 이유는 과거 후포리 사람들이 삶과 죽음이 푸른 대자연 앞에서는 공평하게 나뉨을 이해하려 해서가 아니었을까?

 

울진 후포리 신석기 유적지 유물 설명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 참고문헌 ※
‧《동삼동 패총 유적지 자료집》
‧《복천 박물관 자료집》
‧ 레비 스트로스,『슬픈 열대』, 한길사
‧ 케이틀린 오코넬,『코끼리도 장례식장에 간다』, 현대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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