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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 애니미즘

<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 애니미즘> 황야를 방황하는 욕망의 감옥

by 북드라망 2024. 2. 29.

《하울의 움직이는 성》 ①배경

 

《하울의 움직이는 성》움직이는 성 -  황야를 방황하는 욕망의 감옥  

 


결벽증의 온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공개되었을 때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현대의 피카소가 나타났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움직이는 성이라니? 아래는 닭다리에 몸통은 여기저기서 갖다 붙인 이런저런 건물의 부속품들, 예를 들면 다락방이라든가 발코니라든가 굴뚝이라든가 여러 외관을 가진 방을 덕지덕지 붙인 형태인데 마치 유바바처럼 큰 얼굴을 지닌 괴물 같다. 벌린 입으로 혀가 나와 있어 무거운 방들을 붙인 덕분에 걷기가 힘들 때면 헉헉거리기까지 한다. 미야자키가 ‘성’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은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었지만 움직이는 성이라니? 솔직히 날아다니는 성보다 더 충격적이다. 


미야자키는 움직이는 성으로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공간적 동선으로만 보면 여주인공 소피가 공장도시에서 할머니로 몸이 바뀌는 저주에 걸리는 바람에 시내 바깥의 황야에 갔다가, 움직이는 성에 들어간 뒤로 마법의 힘에 의해 항구도시와 국왕이 사는 킹스베리를 방문하고 다시 황야로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움직이는 성은 기본적으로는 황야를 걷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성의 입구가 마법의 통로가 되어 이 도시 저 도시의 건물들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덕분에 식구들은 여기저기를 쉽게 다녀올 수 있다. 치히로가 현실 세계와 신들의 휴식처 두 개의 세계를 왔다갔다 했던 것, 마히토가 현실 세계와 아래 세계를 왔다갔다 했던 것처럼 하울의 움직이는 성도 도시와 황야라고 하는 두 개의 층위를 움직인다. 다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훨씬 더 쉽게, 자주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이동할 수 있다. 

 

출처 - 다음 영화


움직이는 성의 의미 분석을 위해 성과 이어진 세계들을 분석해보자. 먼저 도시들이다. 공장도시, 항구도시, 왕의 도시는 외관상으로는 많은 굴뚝들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난다든지, 바닷가의 어시장이 활발하다든지 화려하고 높은 궁전이 근사하다든지같은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도시 사람들은 전쟁통을 불안해하며 피난을 간다든가 정신이 없다. 항구도시에서는 자기에게 마법 하나 걸어 달라고 잰키스네 마법 가게 앞에서 구걸을 하는 할아버지도 있다. 소피가 모자가게를 꾸려가던 시내를 보면 이 도시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 수 있는데 골목골목마다 주정뱅이가 앉아 있고 군장을 부려놓은 군인들은 착한 아가씨들을 꾀어 잠깐 놀 생각뿐이다. 


그런데 전쟁으로 하루하루가 불안하다지만 케이크 집은 불티나게 호황이다. 소피가 일하는 모자가게에도 동네 아가씨들이 잔뜩 모여 있다. 엄마는 킹스베리에서 유행하는 최신 모자를 구매해서 오기까지 한다. 미야자키는 특히 소피의 예쁜 여동생이 베이커리에서 얼마나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지를 길게 묘사한다. 이런 사치스런 분위기와 전쟁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사람들은 몇 푼 안되는 돈으로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찾아 다닌다. 소피의 여동생 레티 앞에는 군인들, 젊은이들이 예쁜 아가씨와 몇 마디 섞어보려고 안달이다. 소피와 달리 예쁜 얼굴에 화장까지 신식으로 하고 있는 레티는 소피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언니! 언제까지 모자가게에 있을 거야? 꿈은 스스로 정하는 거야!’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설정이지만 레티의 이 말을 통해 도시적 삶이 왜 자꾸 전쟁에 휘말리는지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자기 욕망을 붙들려고 안달인 것이다. 이 ‘자기’를 확대하면 우리 가족, 우리 민족, 우리 나라가 된다. 국왕은 강한 마법사 설리반을 끼고 자기 왕국을 확대할 전쟁을 하고 있다. 소피는 이런 상황 속에서 집안의 가장으로 아버지가 남긴 모자 가게를 꾸려가려고 혼자 애쓴다. 자기 꿈 같은 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다. 소피는 어떤 예쁜 모자를 써도 자기에게 안 어울린다고 거울을 보며 생각하는데, 자기가 지닌 어떤 것도 아름답지 않다고 느낄만큼 자존감도 없다. 소피는 왜 ‘자기의 꿈’ 갖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까? 


실은 소피는 비교하고 있었다. 자기보다 더 예쁜 동생, 모자가게의 더 예쁜 손님들. 베이커리의 손님과 종업원들이 레티에게만 말을 그렇게 걸려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레티가 ‘제일’ 예쁘기 때문이다. 즉 ‘자기의 꿈’이라고들 하지만 레티를 비롯해 실은 자신이 ‘모두의 꿈’이 되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킹스베리에서 유행하는 모자를 쓴 여자, 모두가 생각하는 예쁜 얼굴의 여자,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자기의 꿈’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으면 모두가 원하는 그것을 가지기 위해 전쟁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저마다 내가 공주라며 우기고 머리카락 쥐어 뜯게 될 것이다.  


미야자키는 킹스베리의 마법사 설리반의 온실을 통해 이런 자기애의 비겁함을 보여준다. 미야자키는 온실을 좋아한다. 천공의 성도 상층부 전체는 온실이나 다름 없어서 거신병이 꽃과 새를 돌보고 기르고 있었다. 설리반의 온실도 방탄유리 안에 온갖 희귀한 식물과 고급 대리석의 바닥을 갖추고 있어 뭔가 정돈된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멋지고 귀하고 마땅한 삶이 왕국에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소피가 딱 꼬집듯이, 설리반은 노인을 초대해놓고 높은 계단을 알아서 오르게 한다거나 손님에게 앉을 의자 하나 내지 않는 오만한 마법사다. 하울이 딱 지적하듯이 강철보다 두껍고 단단한 정원의 유리창은 어떤 폭탄도 피할 수 있기에 그 파편은 모두 인근의 도시로 튕겨 떨어진다. 모두를 위한 전쟁이라지만 실은 설리반 한 사람을 위한 전쟁인 것이다. 설리반은 예쁜 얼굴을 한 괴물이다. 설리반은 하울이 자기가 부르는 대로 오지 않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움직이는 성을 찾아 박살내려고까지 했다. 멋지게 안온한 궁전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욕심밖에 몰라야 하는 것이다. 설리반의 온실은 자기를 살리려는 단 하나의 욕망으로 자기 말을 듣지 않는 모든 것을 씻어버리는 결벽증의 증거다. 

 


변심하고 변신하는 잡동사니
움직이는 성이 돌아다니는 황야는 킹스베리의 궁전과 완전히 대비된다. 일단 황야에는 어떤 방호물도 없기 때문에 엄청나게 거센 바람이 사방에서 분다. 소피가 황야의 마녀를 찾으러 나섰을 때, 노인이 되서이기도 하겠지만 바람도 너무 세서 그녀는 중간에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설리반의 온실에 있던 멋진 열대 야자수 같은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황야 여기저기는 돌무더기뿐이다. 그래도 키 작은 잡풀이 돌 틈에서 자라고 있고 사이사이로 야생화가 피어 있다. 황야 뒤로는 멀리 만년설에 뒤덮인 듯한 설산이 빼곡히 있고 그 아래로 깊은 숲도 보인다. 황야는 그 누구의 손길도 타지 않은 채로, 있는 그대로 바람이 허락하는 만큼 피고지고 구르고 하는 식물과 광물의 세계다. 


미야자키가 황야를 먼저 생각하고 움직이는 성을 배치했을까? 아니면 움직이는 성을 먼저 구상하고 그것이 돌아다닐 장소로 황야를 떠올렸을까? 후자일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공간은 움직이는 성이니까 말이다. 황야는 움직이는 성의 본성을 보다 확장적으로 표현해주는 배경이다. 마음도 황량하고 그것을 품은 세계도 황량하다는 말이다. 

 

그럼, 움직이는 성으로 들어가보자. 지브리가 펴낸 『아트북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펼치면 하울의 얼굴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을 넘기면 성의 초기 작화가 나온다. 다시 한 페이지를 넘기면 정말 멋지게 황야의 호수를 배경으로 편하게 앉아서 쉬는 성이 나온다. 정말 사람이 앉아서 편안한 오후를 보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미야자키가 움직이는 성으로 말하고자 했던 바가 실은 어떤 심리 상태라는 점이다. 미야자키는 움직인다는 것의 본질, 그리고 움직인 자는 쉬어야 한다는 점을 깊이 생각해보려 했다.

미야자키가 성을 어떻게 보여주는지를 보자. 성의 몸체를 특징짓는 것은 본체가 사람 얼굴을 닮았다는 점이고 하체가 닭을 닮았다는 점이다. 잘 보면 눈도 있고, 귀도 있다. 특히 입이 큰데 혀가 쑥 나와 있을 때는 엄청 피곤해보인다. 눈이라든가 입, 귀 등이 실제 성안에서는 다양한 기능의 방이 된다. 하지만 이 각각을 합했을 때는 우리가 사람 얼굴에서 표정을 통해 그 마음을 짐작하듯 어떤 분위기가 포착된다. 그래서 킹스베리에서 소형 탈것을 타고 돌아오는 소피 일행을 마중할 때의 모습은 기다리는 것 같다. 호숫가에서 쉬며 빨래를 말릴 때는 편안히 여유를 누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상적인 것은 비행기를 몰고 오는 소피를 마중 나가서 반가움에 헉헉거리기도 하고, 그 비행기를 받기 위해 입을 크게 벌렸다가 얍하고 다무는 모습이다. 이때 성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듯하다. 

 

출처 - 다음 영화


하체 부분에서 중요한 외관적 특징은 항문과 다리다. 항문이 입구라는 것은 이 성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이 쓸데가 없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설리반의 화려한 계단 입구와 비교하면 초라하고 별 볼 일 없다. 그러나 온천장을 떠올려보자. 유바바의 집무실보다 중요한 것은 엔진이 작동하는 온천장의 맨 하부다. 미야자키는 밑바닥 즉 어떤 구조물을 움직이고 작동시키는 근본 바탕에 관심이 있다. 항문은 잘 먹은 증거가 세상에 짠하고 얼굴을 내미는 곳이며, 우리 몸에서 잘 나온 똥이 논과 밭의 거름이 되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항문은 중요하다. 내가 얼마나 잘 먹고 어떻게 세상에 기여할지를 계산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성에서 또 재미있는 점은 다리다. 유바바 얼굴처럼 뭐가 많고 무거운 것을 닭다리 같이 가느다란 다리 네 개가 지탱한다. 걸을 때마다 끼익끼익 힘들어 보인다. 물론 나중에는 가볍게 하늘을 붕 나는, 날개 보조장치로 변신한다. 미야자키는 원래 일본 사무라이의 튼실한 다리와 조류의 다리를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링크) 확실히 닭다리는 탁월한 선택이다. 가냘픈 다리 네 개는 상부와 하부의 밸런스를 위태롭게 하면서 성의 움직임을 과장한다. 성의 본체가 사람 얼굴을 닮은 것이 성주나 가족들의 감정을 나타내기에 좋다면 다리는 이 식구들의 관계가 어떻게 삐걱대고 편해지는지 그 움직임의 무겁고 가벼움으로 드러낼 수 있다.  


이제 성안으로 들어가보자. 소피는 성에서 2층 이상으로는 잘 올라가지 않는다. 치히로가 맨 아래에서 꼭대기까지 작품 초반에 이동한 덕분에 관객이 온천장의 거대한 규모를 추측할 수 있었듯, 작중 인물의 동선은 공간 파악에 있어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움직이는 성에서는 하울의 침실과 욕실, 그리고 2층 복도의 테라스가 잠깐 나올 뿐, 우리는 마르클의 방도 알 수 없고 맨 꼭대기 층은 아예 상상 불가다. 복잡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2층 이상을 잘 보여주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소피의 청소를 따라가다보면 성이 커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1층은 주방, 2층은 하울 방, 3층은 아마 마르클 방? 정도로 내부가 심플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이 큰데도 구석구석 별로 잘 이용을 못한다는 이야기이고, 그만큼 하울이나 마르클이나 자기 집에 관심이 없었다는 말도 된다. 구석구석 모든 공간의 ‘존재감(있었고, 있고, 있을 것이다)’을 표현했던 온천장과는 다르다. 소피가 막 도착했을 때 성은 폐가처럼 버려져 있었다. 


성의 1층에서 중요한 곳은 부엌 겸 응접실인 불의 악마 캘쉬퍼의 화로 앞이다. 이 화로는 온기로 사람을 위로하며 쉬게도 하고,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불의 악마 캘쉬퍼가 성을 조립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가히 성의 심장부라 할 수 있다. 소피가 들어오고부터는 소피의 침실도 겸하기 때문에 하나의 장소가 다양한 목적과 기능을 품게 되는 식이 된다. 이런 부분은 가마지의 작업장이자 침실이었던 가마터를 닮았다. 1층이 캘쉬퍼의 불이고 2층이 하울의 욕실인 점도 온천장의 지하가 가마터이고 그 지상층이 온천장인 것과 닮았다. 신들의 온천과 마법사의 온천이 모두 2층에 있다.   

 

 


집 안의 인테리어는 계속 변한다. 처음에는 순수한 잡동사니 천국이었다. 외모는 아름답지만 성 내부는 결코 아름답다 할 수 없는 쓰레기통이었다. 이는 외모는 수수하지만 작업실 내부는 아름다운 것들로 꽉 채워져 있었던 소피의 작업실과도 대비된다. 소피는 성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줄곧 청소를 한다. 중간에 황야의 마녀가 찾아오게 되고 강아지까지 키우게 되면서 필요한 방식대로 자꾸 물건을 옮기기도 한다. 움직이는 성의 가장 큰 특징은 청소 때문에 내부도, 욕망 때문에 외부도 계속 변한다는 점이다. 이는 첫 번째 장면과 마지막 장면만 비교해도 얼마나 큰 차이가 성을 통해 표현되는지 알 수 있다. 혀를 길게 빼고 힘들게 네 발로 걷던 성이 어떻게 저토록 정돈된 모습으로 가볍게 하늘을 날아오를 수 있는가? 이 큰 변화 사이에 소피의 청소가 있다. 그리고 소피의 손길이 미치는 만큼 성은 구석구석 빛나는 멋진 장소가 된다. 움직이는 성은 온갖 것들이 마구 엉겨 붙은, 단 하루도 정돈이 어려운, 변심하고 변신하는 잡동사니이다.    

 


부유하는 욕망의 벌판
지금까지 성의 외관을 살펴보았다. 이제부터는 이토록 다채로운 변화의 원인, 움직이는 성이란 결국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 성은 불의 악마 캘쉬퍼의 마법으로 움직이고, 캘쉬퍼는 성주 하울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 성은 실은 하울의 마음을 표현한다. 하울이 실연했을 때, 머리염색이 잘 안되어 자기 외모에 실망했을 때 성은 휘어지고 압축되면서 찌그러진다. 하울의 마음이 움직이듯 성도 움직인다. 그러니 성은, 우리 마음이 그렇듯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그런데 이렇게 솔직하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성의 내부는 왜 이렇게 지저분할까? 특히 하울의 방은 발디딜 틈 없이 예쁜 쓰레기들로 꽉 차 있고, 하울의 목욕탕은 알록달록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더러움으로 녹아 내리는 곳이 되어 있다. 변기 뚜껑에까지 아름다운 무늬가 가득했지만, 소피는 목욕탕의 더러움에 질려 입을 다물지 못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외관 역시 단정한 모습은 아니다. 캘쉬퍼가 있는 대로 여기저기서 주워모아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 것처럼, 여러 가지 모양을 가진 방들이 대충 덕지덕지 붙어 있다. 좋은 말로 하면 ‘브리콜라주’이고, 안좋게 표현하면 ‘정신 없다’. 모든 사람들이 왕이나 그의 마법사를 쳐다보게 설계되어 있던 킹스베리의 높은 궁전을 떠올려보자. 하울은 레티와 달리, 모두가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은 되지 않으려고 했다. 같은 욕망을 뜯어 먹고 사는 도시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그래서 온갖 욕망을 하나하나 성에 긁어 모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쓰레기통이다. 소피가 성에 들어가서 첫 식사를 하는 장면을 보면 끔찍하다. 요리를 하는 소피를 지켜보는 마르클을 기준으로 그 뒤편에 식탁이 하나 있는데, 왼쪽 끝에서부터 오른쪽 끝까지 타다 남은 초, 먹다 남은 사과, 책, 깨진 그릇, 잘린 치즈, 펜과 잉크, 오래된 봉투, 그 뒤쪽 책장에는 온갖 허브 말린 것, 책, 아 더 읊을 수도 없을 온갖 잡동사니 천국이다. 여기서 먹고 자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는 제정신일 리 없다.  

 

출처 - 다음 영화


하울은 최고 마법사인 설리반 선생이 후계자라고 생각할 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그는 솔직하고 자유롭게 살기를 원했기에 설리반 선생님을 떠나 황야로 갔다. 그런데 솔직하고 자유롭다는 것이 뭔가? 하울의 경우로 생각해보면, 그때그때 이끌리는 대로 몸을 움직이면서 중간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안보거나 치워버리거나 하는 태도다. 하울의 방을 자세히 보면 예쁜 것 전부가 다 부적이다. 자신이 재미있어서 다가갔다가 무서워서 피한 황야의 마녀가 나타날까 두려워하며 만들어 붙인 경고의 주물(呪物) 같은 것으로 온통 도배되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분석에 따르면 자유를 동경하는 자는 간섭을 두려워하는 자다. 이것저것 자기 마음 안에 쓸어 담은 모든 것은 타인을 멀리하기 위한 물건들뿐이다. 걸치면 걸칠수록 그는 모두와 멀어지게 될 것이다. 도시의 사람들은 하울의 멋진 외모를 동경했지만 그를 만나기를 두려워했다. 그가 예쁜 자기 외모를 지키기 위해, 자기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괴롭힐 것을 알아서다.  


그렇지만 하울의 마음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소피가 갑자기 쳐들어와서다. 방어적인 자기 욕망밖에 없던 하울의 마음 안에 소피가 들어오고, 소피를 따라 무 대가리가 들어오고, 황야의 마녀가 들어오고, 설리반의 개 힌까지 들어오게 되면서 성의 걸음걸이가 바뀌기 시작한다. 그리고 끝에는 완전히 부서져 무너져버린다.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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