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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 애니미즘

[미야자키하야오-일상의애니미즘] 있었고 있고 있을 것인 세계

by 북드라망 2024. 2. 8.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①배경

 

있었고 있고 있을 것인 세계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고작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든다. 치히로의 모험 이상으로 삶을 풍요롭게 바라보게 하는 작품은 없다. 이 작품은 무기력하게 자의식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용기를 확실하게 준다. 유바바의 온천장에서 청소를 조금 하다 나왔을 뿐인 소녀의 모험담에 어떤 숨겨진 장치가 있기에, 관객은 삶의 지극한 다채로움에 감탄하며 감사하게 되는 것일까?


일차적 원인은 공간 설정에 있다. 아빠와 엄마와 이사를 오게 된 시골의 도로에서부터 갑자기 빠지게 된 저편 세계 온천장까지, 미야자키는 구석구석 엄청난 사물과 사람, 괴물과 신을 배치함으로써 개별 공간의 입체감을 상상 그 이상의 방식으로 엮는다. 마녀 유바바 온천장이 지니는 입체적이고 복잡한 건축 양식은, 움직이는 성이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기괴한 건물이 등장하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예고한다. 미야자키는 인간의 공간만이 아니라 마녀와 신이 머무는 장소까지 철저하게 구상한다. 치히로의 모험 동선을 따라 공간 구성의 비밀을 알아보자. 

 


터널을 지나, 불연속 모험 속으로     
치히로의 이동에 따라 공간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막 이사 오게 된 낯선 도시가 있고, 갑자기 빠져 들게 된 유바바의 온천장이 있다. 마지막으로 치히로는 신들의 휴식처인 저편 세계에서 유바바의 온천장을 나와 그 쌍둥이 언니가 있는 제니바의 ‘늪 바닥’까지 여행한다. 유바바의 온천장에 도착하는 것은 밤이다. 제니바의 늪 바닥 오두막에 이르게 되는 것도 밤이다. 그래서 전체적인 이동이 어둠 속으로 더 깊게 내려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미야자키는 나중에 《벼랑 위의 포뇨》에서 한 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다시 또, 이렇게 저편 세계로 두 번 이상 내려가는 구도를 차용한다. 이렇게 저 세계의 차원이 훨씬 더 깊이 있기 때문에 치히로, 포뇨, 마히토의 모험은 근본적인 것이 된다.  


현실과는 평행하면서도 심오한 또다른 차원이 있고, 그곳을 다녀오면 인간보다 더한 인간 즉 영웅이 된다는 설정은 미야자키 고유의 것이 아니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인 《길가메쉬 이야기》나 고대 그리스의 영웅담인《오딧세이아》, 기독교 이전 북유럽 신화에서 지옥에 다녀오는 영웅이 많이 나온다. 이런 신화는 필멸하는 인간과 불멸하는 신 사이에서, 한번은 죽음을 경험한 자를 아예 ‘영웅’이라고 한다. 그런 신화적 전통에서 보면 치히로는 온천장에 다녀왔다지만 영웅이 된다.  


영웅에게 제일 중요한 저편 세계를 탐색하기 전, 먼저 현실 세계를 고찰하자. 영화는 치히로와 부모가 자동차를 타고 이사를 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사를 하고 새 마을에 들어선 아이들로는 《이웃집 토토로》의 메이와 사츠키 자매가 있었다. 자매가 삼륜 이사 트럭 짐칸에서도 과자를 나눠 먹으며 노래 부르고 즐거웠던 것과 달리, 치히로는 고급차 뒷자석에 타고도 심드렁하다. 이유의 첫 번째는 뒷자석 물건들이 모두 근사한 쇼핑백에 담겨 있고 어떤 것은 ‘기노쿠니야’라고 유명한 서점 로고까지 박혀 있어 모두 비싸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 근처에는 과자 부스러기와 종이 포장지 쓰레기가 뒹굴고 있다. 거기에서 치히로는 드러누워 전학 선물로 받은 꽃 포장지를 만지작거리며 꽃 한 송이 구겨진 것도 불만인 얼굴이다. 

 

출처 - 다음 영화

 


치히로가 뚱한 것과 달리 엄마 아빠 기분은 산뜻하다. 하지만 오늘은 이삿날이 아닌가, 산뜻할 겨를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사실 부모는 이삿짐센터에서 알아서 해 줄 것이라며 자기 집 이삿날인데도 어디 소풍 갈 분위기다. 돈을 믿고 만사 느긋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신들의 세계에 있는 온천장 입구 식당가에서 쎄한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주인 허락 없이 식당 음식을 마구 먹어 치운다. 치히로가 출발하는 현실 세계는 이처럼 풍요롭지만 나이브하고 오만한 세계다. 이 세계에서 자란 치히로는 고작 10살인데도 이미 다 늙어버린 얼굴이다. 


이렇게 답답하고 한심한 세상에도 구멍이 있다. 구멍에 대해서는 토토로-공간편(『일상의 애니미즘』9화⇒링크)을 보자. 치히로의 가족들 앞 갑자기 나무 터널이 나타난다. 그 끝에 터널 같은 입구를 가진 건물이 있어 마침내 길은 끊어진다. 이 언저리에는 《모노노케 히메》의 사슴신이 머물다 갔을 법한 오래된 삼나무가 서 있고, 그 주변으로는 작은 신들의 집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잘못 든 길에서 아빠가 과속을 해서 아슬아슬하게 터널 입구의 비석과 부딪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캄캄한 터널 역시 금방 나오게 함으로써, 현실보다 비현실의 저편 세계를 훨씬 더 역동적이고 아름답게 그릴 것을 예고한다. 영화 시작하고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주인공이 터널에 이르게 하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작품과도 대비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터널이라는 장치를 좋아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터널의 입구와 출구에서 마주하는 세계가 완전히 이질적임을 강조한다. 인간의 현실과 신들의 비현실, 이렇게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한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터널로 이어진듯 하지만 두 세계는 등장하는 인물들이 인간인가 신인가에 따라 확실히 구분되기에 불연속적이고, 심지어 주인공은 두 세계에서 각기 다른 이름을 쓴다. 나중에 하쿠는 부모와 친구를 멋지게 구한 치히로에게 뒤돌아보지 말라고 한다. 치히로는 신들의 온천장에서 있었던 멋진 일들과 소중한 친구들을 모두 잊게 될 것이다. 이렇게 미야자키는 터널로 삶의 불연속성을 표현한다. 


삶이 불연속적인 점들의 경유에 불과하게 되면, 구간 구간의 경험은 축적되지 않는다. 소위 말해 ‘경력 단절’이다. 인생을 경력 단절의 연속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하루하루에 불성실하게 될까? 내일 아무 의미도 없을 일을 오늘 해야 하는 것에 답답해하게 될까? 미야자키 하야오에 따르면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난다고 한다. 치히로는 자신이 온천장에서 열심히 일하게 되면 부모를 구할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구체적으로는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치히로는 부모를 구할 때 쓰려고 했던 마법 경단을 하쿠나 가오나시를 살리는 데 썼고, 부모 구하기도 바쁜 마당에 하쿠 잘못을 대신 사과하러 늪 바닥까지 갔다. 치히로는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계산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하나하나 진실된 마음으로 돌파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삶이 축적을 모를 때, 우리는 오히려 더 겸손할 수 있고 지혜로울 수 있을지 모른다.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의 인과를 하나하나 계산하느라 마음 바쁘기보다는, 당장의 미션에 집중하면서 먼 미래가 아니라 오늘 이 순간의 소중함에 절박하게 될지 모른다. 삶이 다만 지점들의 ‘통과’일 뿐일 때, 우리는 하나하나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한 국면으로 느끼며 생활할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전체적으로 불연속적 평행 세계를 제시하기에, 치히로는 자기 모험을 통해 성숙해지지 않는다. 새로운 능력을 장착해서 더욱 더 훌륭해지지 않는 것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잊혀지고 말 어떤 경험을 하고 사는 일상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기를 촉구한다.   
    

 

건축 양식의 브리콜라주 
하쿠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으로 모험을 하게 될 무대는 인디아나 존스가 나올 듯한 열대도 아니고, 요술램프가 필요할 듯한 아라비아도 아니다. 온천장이다. 겨우 목욕탕이다. 이런 설정이 놀랍도록 황당하다. 신들이 이용하는 휴식처이기 때문에 더 고급스럽긴 하지만 여기서 뭐 그리 흥미진진한 사건이 나올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느 마을에나 하나쯤 있는 목욕탕, 누구나 좀 씻고 쉬고 싶을 때만 찾을 수 있는, 안으로 밖으로 뻔한 그곳이 어째서 치히로가 모험을 할 만한 장소가 되는가 말이다. 


그런데 온천은 실로 문제적이다. 온천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역시 터널 역할을 하는 다리를 통과해야 한다. 이 공간은 단 한 마디로 설명되기를 거부한다. 일단 온천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하단부로 직원 숙소라든가 주방, 여타 기계실이 있는데 가장 밑바닥에 있는 보일러실로 대표된다. 둘째는 온천장 중앙부로 신들을 위한 대중탕 몇 개와 프라이빗한 개인 탕이 잘 구획되어 있고, 욕장 바로 위에는 신들의 휴게 유흥 시설이 있다. 병아리신들이라든가 도깨비신들이라든가 각 신들이 그룹을 지어 맛있는 요리를 먹고 함께 춤도 추며 회식을 한다. 마지막으로 최상부가 있는데 유바바의 집이자 개인 집무실이다. 


이 세 부분은 건축 양식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전체적으로는 수직으로 높이 솟은 한 채의 건물인데, 언뜻 보면 온천이 있는 거대한 테마파크 같기도 하고 열심히 돈을 버는 기업 같기도 하다. 제일 하단부는 메이지 시대에 출현한 근대적 공장처럼 증기기관이 쉭쉭 소리를 내며 작동한다. 중앙부는 온천 주변에 앉은 자리가 있다든가, 쉬는 방이 다다미식이라든가, 탕을 둘러싼 외벽 장식이 둥글게 말아 올린 기와지붕 형태인 점을 보면 일본 에도시대 전통 온천 숙박시설 같다. 그런데 최상부는 또 화려한 청나라 도자기가 복도를 가득 채우는 듯하면서도 집무실이 완전히 서양풍이라 화려한 유럽 궁전을 연상시킨다. 

 

출처 - 다음 영화


이때까지 미야자키 하야오는 배경을 그릴 때, 철저하게 로케이션 헌팅을 하면서 작품 공간의 사실성을 높이려고 해왔다. 《토토로》에서는 1950년대 시골집을 그렸는데, 근대 초기에 일반적이었던 일식과 양식의 조합을 잘 살렸고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인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도 충실하게 이런 건축풍을 복원하려고 했다.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는 전쟁이 없는 유럽을 연상하면서, 북부 유럽의 항구 도시를 꼼꼼하게 찾아 검토해서 작품 안으로 들여왔다. 《붉은 돼지》는 1940년대 아드리아해의 항구 도시들을 잘 조사해서, 밀라노의 공장 지대라든지를 당시 분위기를 살려 잘 복원했다. 《모노노케 히메》의 경우, 미야자키는 무로마치 시대 에미시 부족의 건축이라든가 마을 양식, 당시 제철소 등을 조사했을 뿐만 아니라 과거 시장의 풍경 사람들의 옷차림과 장신구까지를 철저히 조사해서 고증에 힘썼다고 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이런 고증학에서 미야자키가 한껏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천의 양식을 일본의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이런 식으로 조합할 때 완전히 미야자키만의 방식으로 조합해버렸기 때문이다. 각각의 부분은 실제 역사 속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는 건축의 세부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세부를 응축하고 조합해내는 자유로움에 있어서는 과감하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구상할 때 자주 방문하곤 했던 장소가 있다. ‘에도 도쿄 건축원’이다. 박물관은 도쿄도 코가네이시에 있는데 일본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가옥과 상점 등을 복원해 전시해놓았다. 특히 상점가에 가보면 가마지 할아범이 일하는 가마터의 약통들과 닮은 정리함을 갖춘 문구점이 있고, 온천장과 같은 입구 모양을 한 근대 목욕탕도 있다. 미야자키는 다양한 시대의 건축물들을 관찰하고 또 한 뒤에, 온천장 여기저기에 다 붙여버린다. 

 

  처음에 감독이 ‘신이 들어가는 온천장 이야기’라고 말했을 때는 뭐가 뭔지 잘 몰랐지만, 설정이 만들어짐에 따라 거리나 온천장 내부는 여러 가지 건축양식이 혼합된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기와지붕과 검고 반들반들한 나무기둥 등, 영화를 본 사람들이 그리운 정취를 느끼게 하는 풍경, 그것은 동시에 감독의 심상 풍경이기도 하죠. 저 자신도 하쿠가 치히로를 구하는 밤 장면은 내가 살던 거리의 분위기를 참고해서, 캄캄하게 만들자고 생각하며 그렸습니다. 저도 좋아하는 장면이죠.

  온천장 자체는 전에 지브리 사원여행 때 갔던 시코쿠의 오래된 온천여관을 참고로 했는데, 그것 말고도 닛코의 토쇼구 신사나 메구로 가죠엔을 참고로 한 부분이 있고, 코가네이시에 있는 ‘에도 도쿄 건축원’에 견학을 가서 거기 옮겨진 다양한 시대의 건물들의 특징을 모아 그리기도 했습니다. 가령 가마 할아범의 보일러실이며 약초장이 그렇습니다. 천장이나 장지문에 그려진 꽃무늬도 니죠 성 등 실제로 있는 것을 참고로 했고, 감독의 레이아웃에 없는 부분은 우리가 그려 나갔습니다. 스테프들 중에는 그런 무늬 그리기가 주특기인 사람이 있어서, 굉장히 섬세하게 마무리해 줬죠. 그러자니 다른 부분도 적당히 넘길 수가 없어서 더 시간이 걸렸습니다(웃음). 그것이 좋은 효과를 냈다고 생각합니다.(『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아트북』, 96쪽) 

 

 

여기서 끝이 아니다. 미야자키는 양식들을 종합하면서도 그 내부는 아예 계산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게 펼쳐 놓는다. 예를 들면, 중간에 치히로가 엘리베이터를 몇 번이나 갈아타면서 유바바의 집무실이 있는 꼭대기 층까지 올라가는데, 한번에 끝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없을 정도로 층마다 층고가 다르다든지, 구획된 방식이 층마다 다르다든지 해서 전체 규모를 알 수 없게 해놓는다. 치히로가 가마지 할아범이 있는 맨 아래층에 가기 위해 외벽 계단을 타고 내려갈 때 도대체 몇 층을 내려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종으로도 깊이 파악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횡으로도 어려운데, 이는 최상부층에 내린 치히로가 집무실 바로 앞까지 가기 위해 엄청 높고 크고 많은 문들을 휙휙 지나가야 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8만의 공간, 8만의 신, 8만의 인연
세부를 더 들여다보자. 치히로의 동선을 따라 가마터, 유바바 집무실, 그리고 온천욕장이다. 


가마터는 온천의 핵심이다. 미야자키가 《붉은 돼지》에서 엔진 지브리를 강조했듯이 온천장도 가마가 없으면 끝장이다. 가마터는 특이하다. 치히로의 입장에서 막 가마터에 들어갔다고 보면, 왼편에 보일러가 있어 석탄으로 열을 내며 물을 덥힌다. 오른쪽 벽면 전체는 한약방처럼 다양한 약초 상자로 빼곡하다. 팔다리가 거미처럼 많은 가마지 할아버지는 가마터 정중앙에 조금 높은 단을 쌓아놓고 앉아서, 어떤 팔로는 숯검댕이들이 석탄을 져 아궁이 안으로 던지도록 채찍질하고, 어떤 팔로는 여기저기 함에서 약초를 꺼내어 빻아가며 온천물을 스페셜하게 만든다. 설정만 보면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타타라 마을이다. 타타라 마을에도 가장 중앙에 제철소가 있었고, 구석에 에보시가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면서 일하도록 했던 치유의 정원이 있었다. 여기 마당에 재배되고 있던 풀은 약초였을 테니, 가마지가 하는 일은 에보시의 한센병 환자 돌보기와 같다.  


막 가마터에 들어온 센의 눈에는 엄청나게 뜨거운 증기를 쉼 없이 뿜어대는 용광로가 신기하다. 별사탕을 먹으며 작은 몸으로 천근인 석탄을 들어 나르는 검댕먼지도 신비롭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것보다 더 낯설고 기이한 부분이 있다. 바로 가마지의 담배 재떨이, 마셨던 컵, 그리고 너무 읽어서 종이가 부풀어 오른 두꺼운 책들과 중국 도자기, 쉬어야 할 때 할아버지가 마셨을 법한 사기 잔이나 구식 시계이다. 미야자키는 왜 저렇게 많은 디테일들을 가마지의 일터에 배치했는가? 저걸 다 그리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컷이 필요한가? 미야자키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저 모든 디테일들은 가마지가 어떤 연유로 온천장 바닥에 있게 되었는지, 그는 어떤 성격을 지녔으며 어떤 취미가 있는지를 암시한다고 말이다. 채찍질로 숯검댕이들을 다그치는 악덕 관리자처럼 보이지만 그는 차를 즐기고 소설책도 읽으며 온천을 돌리는 자기 소임에 대한 책임감에 짓눌리지 않는 인생의 멋과 여유를 아는 일꾼인 것이다. 


또한 가마지의 일터는 미야자키가 삶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도 말해준다. 이곳은 손님이 오시기 전에 미리미리 불을 때야 하고, 그들이 탕에 들어갔을 때 바삐 약물을 공급해야 하는 작업장이다. 그렇지만 일이 끝난 시간에는 할아범의 집이 된다. 할아버지의 부하들에게도 이는 마찬가지다. 약초 상자 밑으로 숭숭 뚫린 구멍들은 모두 검댕먼지 맨션이다. 가마터는 일터이기도 하고 쉼터이기도 하다. 이 점을 온천 전체로도 확대해서 해석할 수 있다. 온천장 하단부는 일꾼들의 공동 숙사다. 여기에는 이발소를 비롯, 직원들만 이용할 수 있는 레스토랑도 있다. 하나의 건물이라지만 신들에게는 쉼터요, 개구리 아저씨와 민달팽이 아가씨들에게는 일터가 된다. 


여기서 여직원 숙소를 들여다보자. 큰 방에 많은 직원들이 나이 가릴 것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자게 되어 있다. 하지만 어떤 창문에는 커튼처럼 보자기가 쳐 있고 어떤 창 아래서는 그런대로 버틸 만한지 해가 떠도 가림막이 없다. 이불 모양은 저마다이다. 유바바의 온천장에서 직원들은 모두 유니폼을 입는다. 하지만 이들은 직원 1, 직원 2같지가 않다. 건물 하나가 아래, 가운데, 위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되어 있고, 하나의 장소라도 낮과 밤의 목적이 다르며, 똑같은 자리에 뭉쳐 있지만 저마다 둘러 쓰고 있는 것이 다르다. 온천장은 실로 모든 이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이용하는 복합성이 극대화되어 있는 장소인 셈이다. 


공간의 복잡성이 실로 가리키는 바는, 그 공간을 쓰는 사람들이 얼마다 다양하고 복잡한 시간을 보내는가이다. 하나의 장소에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숨 쉰다. 센이 가마터에 내려갔을 때, 감독의 시선은 입구 오른쪽 한 켠에 놓인 세면대와 수건을 비추었다. 그 앞에는 얼굴 하나만 제대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거울이 하나 있었다. 세면대의 위치와 거울 높이를 대략 계산해보았을 때 다리는 짧고 팔이 많은 가마지가 이용하기에는 어쩐지 불편해 보였다. 그렇다면 저 세면대에서 방금 손을 씻고 닦은 수건을 걸어 놓은 이는 누구일까? 


미야자키는 왜 이렇게까지 디테일 설정에 공을 들이나? 치히로의 부모 구하기라는 주제를 표현하는 데에는 하나도 쓸모가 없는 세부묘사에 불과하다. 그뿐 아니다. 미야자키는 치히로가 유바바의 오피스로 올라가는 두 번째 엘리베이터를 타기 직전에 신들의 연회장까지 이어지는 긴 복도를 보여준다. 그곳에는 누가 정리했는지 알 수 없는 온천장의 기타 짐들, 작은 교자상이라든가 큰 회의 테이블이라든가가 잘 정리되어 있다. 미야자키는 참으로 정성스럽게 그 복도를 그 자리에 있을 법한 것들로 꽉 채운다. 그 자리에 있을 법한 물건들은, 그 자리에 있게 한 누군가의 정교한 손놀림을 금방 떠올리게도 한다. 

 

온천장의 구조 자체로만 보면 하부에서 상부를 버텨주는 일꾼들은 계층적으로 ‘낮다’고 해야 한다. 일꾼들은 전부 유바바의 지시를 받아 물건들을 정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바바의 명령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해내느냐는 전부 일하는 개구리, 민달팽이 씨들의 몫이다. 이런 합작품으로서의 온천장은 지위나 빈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연결을 생각해보게 한다. 이 세상에 누군가의 손길이 가닿지 않은 곳이란 하나도 없다. 치히로의 엄마는 온천장 앞 상가 거리에서 ‘아무도 없는 곳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밤에 그곳은 8만 신의 구미를 자극하는 번화한 상가가 되었다. 터널을 막 나왔을 때 그곳은 그저 아무것도 없는 들판으로 보였다. 하지만 밤에는 큰 물이 흐르는 강이 되었다. 나의 편협한 시야로 모든 것을 볼 수 없다. 아무도 없는 곳은 없다. 텅 비어 보이고 무의미해 보여도,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다. 잘 보이지도 않는 그들과 함께 나는 살아간다. 실로 나는 온갖 이야기들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출처 - 다음 영화

 


마지막으로 유바바의 꼭대기 오피스에 가보자. 유바바의 공간은 화려함으로 치히로를 압도한다. 《라퓨타》의 욕망 덩어리 도라 할머니가 꿈꾼 세계가 완전히 구현된 듯하다. 공간이 서양풍이다보니 유바바의 복장도 드레스가 되어 버렸다. 이 서양풍은 미야자키의 과도한 유럽 애호를 보여주는 걸까? 서양적인 것은 고대 일본의 전통과는 어딘가 확실히 다르면서도 다양한 차원의 풍부함을 바로 가리키는 장치이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미야자키에게는 다양한 양식의 응축과 종합이 과제였지 서양 건축의 재현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로쿠메이칸이며, 메구로가조엔입니다. 일본인에게 호화라는 건 호화주택과 서양풍(의양풍)과 용궁성이 뒤섞인 것으로, 거기서 서양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원래 온천장은 지금의 레저타운 같은 곳으로, 무로마치시대에도 에도시대에도 있었던 겁니다. 결국 저는 일본을 그린 거예요.(『반환점』, 221쪽) 

 


유바바의 공간은 정리정돈이 기막히게 잘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호화롭다. 이 번쩍이는 풍요로움의 의미는 무엇인가? 책들이 가지런하게 정리된 서가며, 주방의 번쩍이는 도자기 셋트로 된 식기라든가는 유바바가 얼마나 일을 능률적으로 하고 자기 직업에 철저한지를 보여준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유바바는 정말 일머리가 장난 아닌 워커홀릭이다. 담배를 뻑뻑 피우며 서류를 검토하는 그 꼼꼼함에 부하 직원들이 남아날 리 없다. 온천장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신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유바바의 확고한 사업 철학과 꼼꼼한 일처리이다. 많은 이들이 함께 일하고 쉬며 지내는 이곳이 무질서하지 않고 철저하게 잘 조직되어 움직인다는 것의 상징이 유바바의 금은보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부유함이란 수많은 관계들을 정돈하는 능력에서 나온다고. 유바바는 오물신을 맞이할 때나 가오나시에게 맞설 때나 참으로 전략적으로 잘 싸웠다. 미야자키가 생각하는 부는 닥쳐오는 많은 문제 앞에서 모두와 함께 물러섬 없이 지혜를 발휘하는 능력인 것이다.  

 


번뇌 많은 이여 온천에 가라
왜 하필 온천일까? 온천장을 방문하는 8만 신들의 수만큼이나 온천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양하다. 목욕을 한번 했다고 다시 안 할 수가 없듯, 일한 자는 쉬어야 하고 더러워진 것은 깨끗해져야 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로 깨끗한 상태도 있을 수 없다. 구석구석 어딘가는 더 빨리 더러워지고 어딘가는 조금 더 버틸 만한 것이 우리 몸이다. 삶의 복잡함, 그만큼의 어려움, 그에 따른 피로와 그 덕분의 휴식. 이 모든 것이 온천장의 복잡한 공간을 통해 예감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한참 극장에서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당시는 9·11 테러가 막 발발한 때라 전 세계가 ‘내가 정의다!’고 하는 일신교적 세계관에 말려들고 있었다. 미야자키는 전작 《모노노케 히메》에서 일신교적 세계관은 지구 전체를 자멸시키는 괴물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면 문제는 ‘그런 세계관’에 있음을 더욱 알 수 있다. 공간의 복잡함만큼이나 우리 각자의 삶은 복잡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바케스에서 무, 병아리와 강물까지 모두 신이라고 하는 다신적 관점을 온천장의 복잡한 건축 양식과 함께 표현한다. 중요한 것은 수많은 삶이 나와 공존함을 놓치지 않고 보는 일이다. 유바바의 온천장처럼 나의 몸 또한 온갖 부분들로 이루어진 복합체이다. 우리 장부도 연속체는 아니다. 눈의 욕구와 발의 욕구가 다를 수도 있음을 이해하자. 그 덕분에 따라오는 고민을 긍정하자. 자,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내 몸 구석구석의 노고를 신들의 그것처럼 바라보며 격려하자.   

 

다만 저는 세상은 속이 깊고 다양성이 많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너희가 사는 세계엔 무수한 가능성이 있고 그 속에 너는 있다. 이 세계는 풍족하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너 자신도 그런 세계를 갖고 있다고. 그리고 저는 그 애들한테 ‘괜찮아, 너는 잘 해 나갈 수 있어’라고 진심으로 전하고 싶어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반환점』, 230쪽)

 

 

글_오 선 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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