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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 애니미즘

<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 애니미즘>치히로 – 이름이 많은 모험가

by 북드라망 2024. 2. 22.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③ 캐릭터

 

치히로 – 이름이 많은 모험가      

 

 

표정이 멋진 아이
미야자키 하야오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가장 공들인 것은 아마 치히로 표정의 변화일 것이다. 우리는 《붉은 돼지》의 썬글라스에서 시작해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애매한 얼굴들까지, 미야자키가 캐릭터의 얼굴 변화에 대단히 신경을 쓴다는 것을 보았다. 치히로 얼굴이 당당하고 침착하게 바뀌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표정이 풍부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된다. 크고 반짝이는 예쁜 눈이라든가 오똑한 코나 갸름한 볼살 같은 것, 그가 입고 두른 값나가는 것, 이보다 만들기 어려운 것이 바로 매력적인 표정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낯선 세계에 떨어져, 전에 없던 문제에 부딪혀 분투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자주 그린다. 나우시카는 멸망의 부해(腐海)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고민하며 오무와 함께 살 길을 모색했다. 시타는 천공의 성을 없애지 않으면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평화가 없을 것을 직감하고 목숨을 건 선택을 한다. 키키는 부모의 도움 없이 혼자 바닷가 마을에서 마녀 수련을 받았다. 아시타카는 인간과 숲이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전쟁을 벌이게 된 상황 속으로 홀로 걸어 들어갔다. 소피는 황야의 마녀 저주를 받아 순식간에 할머니가 되어 움직이는 성의 청소부로 취직하게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미션을 수행한 결과 주인공이 슈퍼스타가 되는 일은 없다. 미야자키 감독에게는 인간이 ‘성장’한다고 하는 관점이 거의 없어 보이기도 한다. 통과의례를 거쳐 새로운 능력을 장착하게 되는 영웅서사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스스로도 어떻게 그렇게 큰 짐을 그녀에게 지웠는지 놀랄 때가 있다고 했던, 메시아에 가까웠던 나우시카조차 원작이 된 만화 안에서는 바람 계곡으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고 부해를 떠도는 난민들의 전설로 끝난다. 깨달아야 했던 진실이란 것도 부해가 정화되는 날이 인간이 멸종할 그날이라는 것이었기에, 나우시카는 자신의 발견을 영원히 마음속에 묻고 가까이 있는 이들을 돌보는 간호사로 살아간다. 10년 가까이 연재되었던 만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통해 고찰해보면, 그녀는 영웅에서 시작했지만 평범한 수도자가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체 작품 세계를 통해 조망해보면 확실히 영웅이 사라지는 방향으로 그림이 그려진다. 나우시카는 생물학 박사, 정원사, 비행기 조정사, 정비사, 주술사, 치유자 등 모든 능력을 그 한몸에 다 장착한 초인이었다. 그 뒤에 나온 《천공의 성 라퓨타》의 시타는 멸망의 주문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마력면에서는 나우시카에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 키키는 중간에 마법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아시타카는 아예 저주에 걸려 괴물이 된다. 마지막 작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주인공은 영웅은커녕 보통도 되지 못하는데, 소년은 새엄마를 괴롭힐 뿐만 아니라 자해를 할 정도로 삶에 대해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치히로는 이런 영웅의 퇴조를 확실히 보여주는 캐릭터다. 능력이라고는 전무하다 할 정도다. 자랑할 만한 재주가 없는 것은 물론이지만, 부모를 구하기 위한 일도 겨우 청소다. 그 정도는 사실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능력 아닌가? 자기 몸을 움직여 씻고 쓸고 닦는 것이야 우리 모두가 매일 같이 하고 있는 일이다. 미야자키는 왜 이런 평범한 아이 얼굴에 주목했을까?  

 

출처 - 다음 영화

 

유바바 말대로 ‘굼뜬 응석받이에 머리 나쁜 울보’인 치히로는 평범한 일상의 노동을 통해 멋진 표정을 가진 아이로 변한다. 멋진 표정의 근저에 놓인 자신감과 아름다움이 바로, 그 누구라도 가진 능력에서 온다. 치히로는 나중에 온천장의 영웅이 되기는 한다. 통통하고 작은 쥐로 변한 보우와 아기 까마귀가 치히로가 마법 도장에 붙은 주물(呪物)을 퇴치하는 것을 흉내 내며 노는 점, 작품 끝에 온천장 식구 전부가 치히로의 미션 해결을 축하한 점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모두의 관심과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치히로는 이렇게 얻은 평가를 모두 두고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치히로는 개구리 아저씨와 민달팽이 언니들 틈에서 땀 흘리며 일했던 것, 바다 위를 기차로 달렸던 것, 용을 타고 하늘을 날았던 것, 그 어떤 일도 기억하지 못하고 다시 또 미숙한 10살의 전학생이 되어 칭얼대며 하루를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미야자키 하야오는 경험이 우리를 성장시킬 것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성숙의 서사를 거부한다. 대신 자기 표정을 만드는 이야기를 한다.  

 


타인의 인정을 구하라
치히로 얼굴 변화의 과정을 더듬어가보자. 표정 변화는 둘째 치고, 치히로는 신들의 세계에서 아예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몸을 가져야 얼굴도 있을 터이니 일단 여기에 머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세계에서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이곳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누가 흘린 것을 주워먹거나 몰래 훔치지 않는다면 이곳의 ‘음식’을 먹을 수는 없다. 음식이란 일차적으로 조리된 것이기 때문이다. 치히로의 부모는 훔쳐 먹었기 때문에 돼지로 변했으므로 치히로가 살길은 누군가로부터 음식을 선물 받는 방법뿐이다. 치히로는 하쿠가 준 작고 빨간 경단을 먹고 겨우 몸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쿠는 치히로가 힘을 낼 수 있게 주문을 건 오니기리도 따로 만들어주었다. 치히로는 하쿠가 준 삼각김밥을 먹으며 놀랜 가슴을 눈물로 진정시켰다. ‘힘들었지? 더 먹어봐’라는 하쿠의 격려만한 보약이 또 있을까? 이후로도 치히로는 린 언니가 슬쩍 건네 준 찐빵을 먹고 제니바 할머니로부터 케이크와 쿠키 차를 대접받는다. 


여기서 생각해볼 수 있는 장면이 가오나시의 폭식이다. 가오나시는 누군가로부터 음식을 받을 수 없어서 가짜로 금을 만들어 온천장 사람들로부터 음식을 사다시피했다. 하지만 가오나시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온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가오나시는 개구리, 온천의 부집사, 여자 종업원까지 먹어치우면서 겨우 얼굴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부집사의 것이고 표정은 개구리나 민달팽이스러웠다. 종업원들 눈에 가오나시는 ‘가오나시’로 보이지 않고 그저 굶주린 괴물로만 보였다. 이런 존재는 이 세계에서 ‘사라져야만’ 한다. 여기서 우리는 미야자키가 ‘이곳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라는 조건 안에 어떤 진실을 숨겨놓았는지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준 음식을 먹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 명령문은 ‘친구가 준 음식을 먹어야 한다’로만 작동한다. 그래서 가오나시는 자신을 알아봐주고 ‘그곳에 서 있으면 비를 맞잖아요’라며 호의로 온천장의 옆문을 열어두었던 치히로에게 집착한 것이다.  


‘친구가 준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새로운 마법의 회로를 연다. 친구란 둘이 엮는 관계다. 따라서 친구로서 누군가에게 음식을 줄 수도 있어야 한다. 치히로는 더러움을 꾹 참고 유명한 강의 신의 목욕을 도왔다. 그 덕분에 강의 신으로부터 무엇이든 고칠 수 있는 ‘쓴 경단’을 선물로 받았다. 드디어 자기 노력으로 먹을 것 하나를 구할 수 있었던 치히로는 두 눈에 힘을 팍 줄 수 있게 된다. 이 약으로 치히로는 고통에 사로잡혀 버둥거리는 하쿠의 날카로운 이빨들 사이에 겁 없이 손을 넣어 먹이기도 하고, 자신을 먹으려는 가오나시의 쫙 벌린 입 안으로 재치있게 던져 넣기도 한다. 이런 치히로를 보면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나 자신에게 어떤 위험이 처하더라도 친구를 구해야 한다는 결심, 친구인 내가 주는 음식이니까 충분히 너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다음 작품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는 더욱 심해질 텐데, 미야자키는 서사의 구멍들을 완벽하게 메울 생각이 없다. 키키가 왜 마법을 잃어버리게 되었는지에 대해 명쾌한 설명이 없었던 것처럼, 하울이 왜 황야의 마녀랑 사이가 나쁜지 구체적인 단서가 제공되지 않는 것처럼, 관객인 우리는 왜 치히로가 이 경단이 하쿠와 가오나시 둘 다를 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지 알 수 없다. 나중에 치히로는 마녀의 퀴즈를 가볍게 푸는데, ‘이 돼지들 중 네 부모는 누구냐?’라는 유바바의 질문에 ‘여기에는 우리 부모가 없어요’라고까지 대답할 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치히로는 직관적으로 해야 할 일을 알게 된다. 아니다,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다. 사실 치히로는 일자리를 구하러 가마터에 갔을 때부터 다른 모습으로 움직였다고 할 수 있다. 과로로 쓰러지기 직전의 한 검댕먼지가 숯덩이에 깔리게 되자 자연스럽게 그것을 들어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살게 되면서부터 치히로는 자기 안에 있는 기본적인 도의심을 끄집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치히로의 착한 마음씨를 보고 가마지도 마음을 돌려 소녀를 돕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일단 일을 하게 되면 유바바도 그에 상응하는 답례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주면서 린 앞에서 치히로는 자기 손녀로 소개하기도 했다. 


미야자키는 우리가 발휘할 수 있는 능력 중 최고는 타인을 도우려는 마음이라고 본다. 이보다 더한 재능은 없다. 그리고 이것은 누구나의 마음에 내재되어 있으며 다만 발휘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치히로가 그토록 다부지게 하쿠와 가오나시에게 경단을 먹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결과 하쿠의 상태가 더 악화되고 가오나시가 엉망진창으로 폭주하더라도 다시 또 도울 길을 찾겠다는 자기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상영 뒤 관객이 어떻게 치히로가 부모가 없음을 알 수 있었냐고 질문하자, 미야자키는 이 정도 경험을 하면 그 정도는 알 수 있다고 답했다 한다.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는 정언명령에 집중하는 자는, 자기 과오를 감당하면서 계속 나아가게 되고 결국 친구나 가족을 살린다.  


하쿠도 가오나시도 치히로 덕분에 살만해진다. 이렇게 정리하다 보니 재미있는 점 하나가 발견된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모가 준 음식이 아니라 친구가 준 음식을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왜 부모가 아니라 친구일까? 부모가 준 음식으로 응석받이가 된 치히로였다. 치히로는 먼저 하쿠의 친구가 된 뒤에, 가마지라는 할아버지를 얻을 수 있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치히로는 그 무서운 유바바에게도 ‘할머니’라고 부른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에서 가족은 타인의 허락을 얻어 친구가 된 다음 만드는 것이다.  

 

  


생기로운 행방불명 
치히로의 표정이 확실히 변하는 순간은 큰 강의 신을 도와주고 난 뒤부터다. 치히로는 하쿠를 구하기 위해 유바바의 집무실, 그 높은 곳을 온천장 건물 외벽을 타고 올라간다. 이때 마땅한 계단이 없자, 앞으로 튀어나와 있는 방들 사이의 환기통 위를 달릴 생각까지를 한다. 처음 온천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가마터까지 내려가는 계단도 제대로 못 내려가던 아이였다. 치히로는 수직으로 아슬아슬하게 솟은 계단을 하나하나 잘 잡고 끝까지 올라간다. 그리고 죽어가는 하쿠를 구하기 위해 돌아오는 기차표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도 길을 나선다. 자신이 돌아오기 전에 부모가 신들에게 잡아 먹힐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자신을 돌봐 준 친구를 죽게할 수는 없으므로 당장 몸을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치히로는 서두르지 않는다. 다만 지금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침착하게 자기 할 일을 파악한다. 이때부터 치히로는 아무리 빨리 뛰어도 넘어지지 않는 아이가 된다. 


그런데 온천장을 출발하기 직전에 자신이 열어준 문으로 가오나시가 들어와 온천장의 풍기를 해치고 직원들을 괴롭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선 이를 문책하는 유바바의 심한 야단에도 끄떡없이 잘못을 인정한다. 일자리를 달라고 애원할 때 두 눈을 크게 뜨고 벌벌 떨었던 것과 확실히 대비되는 모습이다. 게다가 엄청나게 많은 음식들을 먹어 치우느라 엉망이 된 연회장에서 거대해진 가오나시 앞에 혼자 무릎 꿇고 앉아서도 당황하지 않는다. 이때 치히로는 가오나시에게 ‘너는 어디서 왔니? 부모는 누구니?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해’라고 말한다. 아주 말씀이 척척이시다! 시키는 일을 겨우겨우 해내기 바빴던 온천장 말단 직원의 입에서 어떻게 이런 근본적인 질문이 나올 수 있었을까?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가오나시를 이해하기 위해 치히로는 온천장에 떨어져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게 된 자신을 떠올렸을 것이다. 치히로는 폭식 중인 가오나시가 느끼는 두려움을 짐작했을 뿐만 아니라, 그 외로운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찾아가야 함을 이해하고 있다. 결국 치히로는 아무래도 온천장에서는 일자리를 찾을 수 없을 가오나시를 데리고 나오기로 결심하고 늪 바닥으로 가는 여행을 함께 한다.    

 

맨 처음으로 돌아가면 치히로에게는 하쿠가 없으면 사라질 뻔한 위기도 있었다. 검댕먼지의 응원이 없으면 가마지의 지지를 받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가오나시가 준 팻말 덕분에 겨우 강의 신을 도울 수 있었고. 린 언니의 은근한 보살핌 덕분에 낯선 곳에서 마음 붙이며 일할 수 있었다. 이렇게 누군가의 도움으로 치히로는 온천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치히로가 하쿠와 가오나시를 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두 어깨에 그들 삶의 무게를 싣게 된다. 제니바를 찾아 늪바닥으로 갈 때에는 친구를 셋이나 책임지고 떠나기도 한다. 돌아올 기차표가 없다는 가마지의 걱정에도 선로를 따라 돌아오면 된다며 돌아올 약속까지 한다. 치히로는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보우와 아기 까마귀를 돌보고, 여섯 번째 역에 제대로 내리기 위해 졸지도 않고 창밖을 주시한다.   

 

이 세계에서 사라지지 않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자기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먼저 누군가의 벗이 되어야만 하지만 그럴 때조차 자기 이름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실 이 명제도 숨은 진실을 작동시키고 있는데, 핵심은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는 데에 있지 않다. 이름이 두 개여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치히로는 센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일단 자기 이름을 버려야 일꾼들 중 하나로 이 세계에 머무를 수가 있다. 새 이름 없이는 살 수 없다. 하지만 ‘센’으로만 살면 일만 잘하는 사람이 된다. 고유명을 잃고 번호나 직함으로 불리는 현대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이런 상황이 잘 들어온다. 따라서 늘 자기 마음속에 친구와 가족이 부르는 치히로라는 이름을 품고 있어야 한다. 물론 치히로라는 이름만 있으면 응석받이가 된다. 하지만 작품에서 치히로의 이름을 알고 있는 이는 부모, 하쿠, 그리고 유바바와 제니바다. 치히로는 제니바를 할머니라고 부르며 자기 이름을 알려준다. 치히로는 가오나시와 하쿠를 구하면서 자기 이름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으리라. 남을 도우려는 마음을 지닌 아이로 스스로의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서 마녀 시스터즈를 조모처럼 가깝게 여기고 자기 이름을 불러달라고 할 수 있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잃어버린 이름을 찾으라’는 두 번째 조건이 아니라 근본적 조건이다. 


자기 이름에 긍지를 가지게 되는 것. 자기의 성품과 착한 마음을 믿는 것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긍지라는 단어를 음미해보자. 긍지는 자신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가지게 되는 당당함이다. 이 능력은 타인을 향한 헌신에 쓰인다. 자기 내면에서 이런 힘이 불쑥 솟아나온 것을 경험한 이는 자신을 믿게 된다, 사랑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겸손한 확신을 갖고 행동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특별한 재주 같은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타인의 어려움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고 뭔가를 해주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이런 자신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명장면 중 명장면은 진짜 치히로가 쓰러진 검댕먼지로부터 숯덩이를 들어준 대목이다. 이때 검댕먼지와 치히로는 심지어 친구 사이도 아니었다. 그런 치히로도 이름을 두 개나 가지가 되고,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8만 신들에게도 불릴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온천장의 애니미즘 
원령공주의 애니미즘이 숲과 동물들이 정념을 갖고 있다는 데로 설명한다면, 행방불명에서는 이 정령적 존재들의 사생활을 다룸으로써 그 존재론적 동등성을 더 철저하게 제시한다. 이 정령적 존재들이 굳이 말하자면 잡신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구석구석의 신들이다. 그런 신들조차 세상의 일에 지쳐 일단은 쉬면서 에너지를 회복해야 할만큼 피곤한 것이 삶인 것이다. 다양한 수준의 신들이 저마다의 피로를 풀고 위로를 받는 이야기라는 것 자체가 일신교적이지 않고 다신교적이다. 그 다신들의 생명력이 어떻게 창발하는지를 분석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2D의 애니미즘에 대한 본격적 연구작이 된다. 

 

에두아르도 콘에 따르면 숲의 애니미즘 즉 다종다기한 생태계에서 생명의 활력 즉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관점을 경유하는 능력이 필요함과 동시에 반드시 타자에게 유의미하도록 읽힐 필요가 있다고 한다. 숲의 포식계 안에서 보면 재규어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재규어의 관점을 경유해, 재규어에게 재규어로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만약, 자기 관점 즉 인간으로서의 관점만 고집한다면 그는 포식자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애니머시(animarcy) 즉 활기란 타자의 관점으로 들어가고 타자의 관점에서 파악되는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 여기서 하나 주의해야 할 점은 숲에서는 재규어만 있지 않다는 점이다. 다종다기한 이 숲에서 조금 더 긴 구간을 주파할 수 있도록 ‘자기’를 밀어가려면 다채로운 수준의 타자들의 관점으로 들어가고 나오며 적극적으로 타자들에게 해석되지 않으면 안된다. 에두아르도 콘은 만약 이 능력을 잃는다면 그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지 않은 존재가 되기 때문에 혼맹(魂盲)이 되어, 타자들의 먹이가 되고 활기를 잃는다고 한다. 


이런 논의에서 보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테마인 ‘이름을 되찾다’는 콘의 애니미즘 논리에도 딱 들어맞는다. 유바바는 이름을 빼앗는 방식으로 상대를 포석해서 온천장에 묶어 둔다. 이름을 빼앗는다는 것은 그를 무수히 다양한 타자의 관점에 들어갈 수 없도록, 혹은 특정한 관점에서만 읽히도록 하겠다는 말이 된다. 치히로(千尋)가 센(千)이 되었을 때, 센은 숫자 ‘천’으로서 단순히 셀 수 있는 자들의 부분이라는 관점에 붙들리게 되었다. 센이 치히로라는 자기 이름을 겨우 기억하고 결국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하쿠가 그 이름을 기억해서이고, 센 역시 하쿠가 원래 ‘고하쿠’라는 이름의 작은 시내였다는 것을 기억함으로써 하쿠의 생명력을 되돌려줄 수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미즘에서도 생명력(animarcy)은 타자의 관점에 친구로 읽히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의 도입부가 흥미롭다. 온천장 밖에서 그냥 떠돌면 안되냐고? 그러면 사라지게 된다. 반드시 그곳에서 난 음식을 먹고 온천장에서 일을 할 수 있어야 저승에서나마 살아갈 수 있다. 즉 어떤 관점에 귀속되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이런 곤경을 맞닥뜨린 치히로는 하쿠 덕분에 한입을 얻어 먹어, 관점 안으로 들어갈 기회를 얻는다. 그런데 하쿠는 이런 ‘누군가의 선의’로서는 여기서 살 수 없다고 말하며 반드시 온천장에서 일거리를 얻어야 한다고 한다. 일거리란 온천장의 다양한 업무 중 하나이다. 거대한 조직의 일부가 되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서 에두아르도 콘의 해석에서처럼, 타자의 관점이란 ‘타자들’의 관점임을 알 수 있다. ‘너희’로서의 타자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우리’가 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혼자만의 생각을 생각이라고 하지 않는다. ‘타자들로 이루어진 우리’에게 받아들여지는 생각을 비로소 ‘생각’이라고 한다.    


그럼 치히로는 이 타자들의 관점을 어떻게 얻는가? 누군가의 허락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치히로는 석탄을 잘 나르지 못하는 검댕먼지를 도왔고, 그럼으로써 가마지의 일터에서 일꾼으로 인정받으며, 마침내 검댕먼지의 친구가 되어 떠나온 세계의 신발을 맡길 수도 있게 된다. 한번 가마지에게 인정받은 뒤로는, 할아범의 손녀가 되고, 인사하는법을 잘 배웠다는 이유로 선배언니 린에게도 인정을 받게 된다. 그래서인가, 유바바의 온천장에 가기까지 실로 치히로는 무의 신에게 도움을 받고, 꼭 도움은 아니지만 적절한 때에 끼어들고 울어주고 한 여러 신들 덕분에 마침내 정신없는 틈을 타 유바바와 계약서를 쓸 수 있게 된다. 타자들의 관점을 경유하기란 타인을 도울 수 있는 능력에서부터 찾아진다. 

 

캐릭터 구현의 측면에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아주 마음에 든다. 주인공의 성품이 얼마나 훌륭한가라든가, 그가 어느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어서가 아니다. 아시타카의 경우 이 두 가지 요건을 만족시키는, 미야자키 하야오 최고의 남자 주인공이다. 그는 절제의 품격을 아낌없이 보여주며 자기 저주에 갇히지 않고 숲과 제철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새로운 삶의 비전을 제시했다. 치히로는 아니다. 치히로는 온천장 식구들, 심지어 유바바에게까지 인정을 받았지만 그 세계를 떠난다. 현실로 돌아간 치히로는 전학 간 학교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자기 내면에 깃들인 어떤 능력을 발견했기에, 자신감을 얻었기에 치히로는 걱정 없다. 

 

늪의 마녀 제니바도 ‘너는 괜찮을 거다’라고 격려했다. 미야자키는 이 점을 온천장을 씩씩하게 떠나는 치히로의 생기 있게 된 눈빛으로 확실하게 보여준다. 슈퍼맨처럼 초능력을 가져야 영웅인 것이 아니다. 아이언맨처럼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아야 구원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네 마음의 선의를 믿으라. 감사함을 표하고 어려움 앞에 도망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너는 누군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위대한 존재가 된다.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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