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최경열의 자기만의 고전 읽기

노자의 목소리, 시인의 언어와 철학자의 언어(7) 노자 : 시인과 철학자(1)

by 북드라망 2021. 3. 19.

노자의 목소리, 시인의 언어와 철학자의 언어(7)
노자 : 시인과 철학자(1)

 


시인 노자

- 노자 문장의 리듬

 

시인이란 누구인가. 말을 다루는 사람이다. 소설가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시인은 운문의 리듬감에 언어를 맡긴다. 운문의 리듬은 산문의 리듬과 다른 것인가. 운문은 압축하고 덜어 낸 응집된 언어를 음악의 집으로 만들기에 산문과 거리를 둔다. 강조점은 리듬과 응축에 놓인다.

 

『노자』를 읽다 보면 제일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이 문장의 리듬감이다. 여기서는 의미보다 원문에 집중해 보도록 하자. 유명한 첫 장. “道可道 非常道;名可名, 非常名.” 세 글자로 두 구절을 이루되 운韻(道와 名)을 넣어 규칙적인 율동감을 주었다. 의미도 의미이지만 읽을 때 음성에 실리는 리듬에 먼저 반응한다. 의미 이전의 소리에서 벌써 쾌감을 느낀다. 간결한 언어에 리듬이 부여되고 의미가 실려 전달된다. 

 

 

노자에는 이런 언어들이 가득하다. 4장에서도 유사한 리듬이 반복된다.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道는] 예리함을 꺾고, 엉킨 것을 풀며, 환한 빛을 누그러뜨리고, 티끌[세상사람]과 함께한다.) 挫銳解紛, 和光同塵이라는 사자성어가 생긴 말이기도 하고 실제 사자성어대로 써도 무방한 말이다. 노자는 其라는 글자를 끼워 넣어 세 글자로 두 구절의 단락을 쌍으로 만들었다. 이 구절은 첫 장과 패턴은 같아 보이지만 차이가 있다. 첫 장은 道可道, 非常道가 名可名, 非常名과 대칭구조를 이루는 데 비해 4장의 진술은 네 구절을 열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글이든 네 구절이 반복되기 때문에 단순한 리듬이 지속되는 것은 지루한 느낌을 줄 위험이 있다. 당연히 이어지는 글은 반복되는 리듬을 깨면서 불규칙하게 진행되는 문장이 온다. 4장의 경우는 이렇다. “湛兮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道는] 맑구나,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나는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네. [만물을 주재하는] 상제보다 먼저인 것 같구나.) 앞 문장에서 세 글자 씩 네 구절을 열거했으니 5자, 6자, 4자로 받아서 문장을 끝맺었다. 3글자로 된 문장을 쓰지 않으면서 다양한 문장을 구성했다. 이는 앞 문장의 규칙성을 파괴하면서 불규칙성으로 새로운 리듬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앞 문장의 정형성이 있기에 자유로운 행문(行文)이 가능했다는 점도 지나쳐서는 안 된다.

 

한문은 네 글자를 사랑한다. 사자성어는 4자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사자성어란 말 자체가 4자 아닌가. 노자는 3자를 사랑하는 것일까. 3자로 된 문장이 무수하게 등장한다. 3자로 된 말은 4자로 된 말에 비해 한 문장을 만들기 까다롭다. 때문에 위에 인용한 구절처럼 두 구나 세 구로 문장을 이룬다. 47장도 마찬가지다. “不出戶, 地天下;不闚牖, 見天道.”(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창밖을 보지 않아도 천도를 안다.) 이 구절은 첫 장과 동일한 구조다. 노자는 3글자로 만드는 문장에 능한만큼 4글자의 문장도 훌륭하다. 45장을 보자. “大成若缺, 大盈若沖,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위대한 성취는 모자란 것 같고, 위대한 채움은 빈 것 같으며, 위대한 곧음은 굽은 것 같고, 위대한 솜씨는 졸렬한 것 같고, 위대한 말솜씨는 더듬는 것 같다.) 大자와 若자를 써서 문장을 운용했지만 大자가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라는데 문장의 묘미가 생긴다. 

 


- 비유의 문제

 

능숙한 언어구사로 빼어난 시인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위대한 시인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노자의 진가가 발휘되는 곳은 비유다. 노자는 비유를 즐겨 쓴다. 흔히 비유를 수사법의 한 방법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농후한데 경계할 일이다. 중국의 고전을 읽을 때 비유를 만나게 되면 섬세하게 이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서양의 레토릭(rhetoric)에서 말하는 테크닉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서양에서도 비유를 깊이 고민한 사람이 있었다. 프랑스 상징주의의 위대한 시인 말라르메는 시에서 비유를 회피한다고 했다. 이유는 비유에 쓰이는 이미지가 너무 강해 원관념을 해친다는 통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보자. 유명한 시 「내 마음은」에는 이런 구절이 보인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문학 교과서에서는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한다. 내 마음=호수. 비유에는 은유와 직유가 있는데 여기서는 은유를 쓴 비유다, 문학의 비유법은 내 마음이라는 원관념에 호수라는 보조관념을 도입해 원관념을 시각화하거나 감각화해 일반 사람이 막연하게 느끼는 것을 확실하게 감지하게 해준다, 또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상관관계가 멀어 의외성이 클 때 비유의 힘도 세져서 예기치 않은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라고. 
틀린 말은 아니다. 문학 교과서니까 유치하다고 아니할 수 없지만 쓸모는 있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래서는 비유가 비유법이라는 문장 테크닉의 한 방편 정도로 이해수준이 묶여 다르게 사고하는 방법을 배제한다. 문학이야말로 다르게 사고하기가 핵심인데 말이다. “내 마음은 호수”라는 말은 시인이 다르게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다. “내 마음은 돌이 아니다”라는 말은 시경에 등장하는 오래된 표현이다. 이 말을 보면 비유는 인류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으레 연상했던 자연스런 발상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된다. 일단 내 마음이 돌이라는 구체적인 사물로 바꿔 표현하는 길이 열리면 ‘돌’이라는 구체적 사물은 그 어떤 사물로도 대치가 가능해진다. 인용한 시는 “돌”이 “호수”로 대치됐던 것. 거울로도, 하늘로도, 꽃으로도, 낙엽으로도 마음은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다. 그게 비유다. 

 


단 보조관념이 끼어들 땐 보조관념의 성격을 그대로 안고 들어오기에 원관념의 성질과 충돌의 파괴성을 고려해야 한다. 돌이라고 할 때는 돌의 차가운 성질을 끌고 왔기 때문에 시경의 이름 없는 시인은 내 마음은 돌처럼 차갑지 않고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따뜻하다고 말한 것이다. 호수로 마음이 변한 것은 그대를 받아들일 넉넉하고 맑은 마음임을 전한 것이다. 이 때에도 보조관념으로 쓰이는 사물은 자연물이라고는 하나, 순수한 자연물이 없다는 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돌이든, 호수이든 특정 나라 혹은 문화권에서 쓰이는, 쓰여 왔던 문화적, 역사적 이미지와 개념이 깊이 담겨 있기 때문에 동원된 말이 무작정 독자의 심정에 파고들리라 생각하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예컨대 미당 서정주의 유명한 시 「국화 옆에서」는 고난을 겪고 완성에 이르는 은유로 국화를 사용했기에 빼어난 시로 회자된다. 그런데 국화라는 말에는 국화라는 말에 배어 있는 동양 특유의 이미지가 작용했기에 시 읽기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사군자로 통칭되는, 오랜 역사 동안 축적되고 내면화된 국화 특유의 문화적 이미지 말이다. 동양인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기억되고 정서가 되어 문화적 이미지인지조차 인지가 안 되는 말이다. 몸에 배어 있는 이미지가 시에 스며 있기에 「국화 옆에서」를 읽을 때 독해가 쉬워지고 의미가 깊어지며 친근감을 느끼는 것이다. 시가 깊이 새겨진 독자들의 정서와 기억(집단무의식?)을 건드렸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독자들의 잠재력에 빚지고 있다고 말해야 할까. 거꾸로 말하면 시인은 국화라는 이미지를 써야지, 라고 의식적으로 이미지를 골라서 가져오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썼기에 오히려 호소력을 발휘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국화가 국경을 넘어가면 어떨까. 「국화 옆에서」가 프랑스어로 번역됐을 때 프랑스 사람들의 반응은 우리네의 것과 사뭇 달랐다. 그들은 한국의 명시로 알려진 작품을 이해하는데 난점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있는 국화의 이미지가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없었던 것. 그들에게 국화는 그저 장례식에 쓰이는 의례적 꽃에 불과했던 것. 그들의 국화는 우리의 국화와 문화적 이미지가 완전히 달랐다. 미당의 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국화의 배경 이미지가 결핍되자 시는 감상하기 까다로운 작품이 되고 말았다. (벌써 한 세대 전의 일이니 동양학 수준이 높은 프랑스인만큼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시의 보편성을 이야기하지만 어떤 면에서 시야말로 한 나라의 가장 정교한 문화적 역사적 응집물이기 때문에 수용이 어려운 것이다. 바꿔 말하면 특정 시가 다른 곳에서 제대로 이해될 때 가장 높은 수준의 이해가 이뤄졌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말라르메가 비유를 회피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말라르메는 두 가지 점을 꿰뚫어 봤던 것. 첫째, 그는 보조관념이라는 새로운 이미지가 원관념을 풍성하게 해준다고 통상 상상하는 것과는 반대로 비유를 통해 들어온 보조 이미지가 원관념을 해친다고 생각했다. 곰곰이 따져보면 말라르메의 말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내 마음은 호수”에서 독자의 기억에 남는 것은 “마음”인가 “호수”인가. 호수의 이미지 아닌가. “마음”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호수”라는 구체적인 이미지 덕이었다. 하지만 “호수”라는 선명한 이미지만 남고 “마음”은 추상적이고 애매한 상태로 공중에 떠 있지 않은가. 마음을 지탱하기 위해 빌려온 말이 거꾸로 원래의 말을 잡아먹고 있는 형국. 마음은 호수에 기댄 상태라 호수가 사라지면 마음은 쓰러져 버린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두 번째로, 말라르메는 「국화 옆에서」에서 보았듯 이미지의 순수성을 믿지 않았다.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이미지란 없다는 것이 말라르메의 통찰이다. 아름다운 비유라고 하지만 공허한 이미지의 연결일 가능성이 크다는 엄격함이 말라르메에겐 있었다. 인간의 현실을 초월한 이상세계의 구현을 목표로 한 상징주의 시인에게 이미지의 역사성과 문화적 의미는 현실의 더께 혹은 세상의 때(dirt)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드높은 형이상학의 이상을 시를 통해 실천하려 했던 말라르메에게 시는 종교와 같았다. 그런 그였기에 세속의 때를 씻어내고 절대순수로 돌아가는 일이 필요했던 것. 비유 따위는 원관념을 해치고 부차적인 이미지떼가 덕지덕지 달라붙는 장식이었기에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언어의 물질성


여기엔 또 한 가지 언어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 차이가 있다. 언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처럼 거창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질문이긴 하지만 일반적인 대답을 시도해 본다면, 의미를 가진 소통수단, 혹은 언령론(言靈論)이라는 일본인들의 사고가 말해 주듯 신령스런 기운을 간직한 ‘고귀한 어떤 것’이라는 대답 정도는 꺼낼 수 있을 것 같다. 언어에는 의미가 있고(심오하면 더 좋다) 신령스런 기운까지 깃든(예컨대 주문 따위) 고상한 이미지를 둘렀다고 할 수 있다. 언어가 타락하고 상업화될수록 반발하는 힘도 크게 마련이어서 언어에 대한 고귀한 사고도 우람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자리에 서게 될 때 가장 낯선 사고는 무엇일까. 아마 언어를 이해하고 정의하는 가장 난해한 말은 ‘물질로서의 언어’일 것이다. 언어가 물질이라고? 언어를 추상체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대부분이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나) 언어가 종이나 레고블럭처럼 물건이라고 주장하는 건 이해는 고사하고 욕먹지 않는 게 다행일 것이다. 사실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언어가 물질이라는 주장 혹은 사고는 상징주의 시인들의 태도였다. 이들의 주장이 맞다 틀리다, 기다 아니다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언어가 물질이라고 사고하면서 동시에 언어를 보는 새 장이 열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언어가 물질일 때 언어는 형태를 갖는다. 형태를 지니면 형태의 속성상 일정한 무게와 색깔과 소리를 실질적으로 소유하게 되고 내가 종이를 만지듯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애무하듯 느끼고 감촉하게 된다. 언어가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한 것이다. 말라르메의 첫번째 통찰력은 정확히 언어를 물질로 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내 마음은 호수”라는 말은 전혀 다른 종류의 두 언어를 결합한 것이다. 마음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말이다. 호수는 저기 바깥에 분명히 존재하는 객관적인 사물을 지칭한다. 관념적 추상을 구체적 사물에 얹은 꼴인데 구체적 사물이 시각적 이미지로 애매함(마음)을 보강해 준 것. 호수라는 이미지의 강력한 환기력이 없이는 마음은 설 곳이 없다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한 것이었고 이는 반대로 마음이란 말의 애매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구체적 이미지 없이 관념어나 개념어로만 구성된 시를 상상해 보라. 실상 문학적 비유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이런 구조를 지닌다. 말라르메는 이런 언어의 불균형성을 문제 삼았던 것. 언어가 물질일 때 이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낮다. 마음은 ‘마음’대로 자신만의 형태와 모양과 색깔과 냄새와 소리를 지니니까. 마음을 그렇게 구체화하는 것이 시인의 임무이기는 하지만. 언어가 물질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일 때 상징주의의 또 다른 시인 랭보의 「모음들」(Votelles, Vowels)이라는, “A는 검정, E는 하양, I는 빨강...”으로 시작하는 이상한 시를 이해하는 길이 열린다. 

 


- 『노자』와 『손자병법』


말이 길어졌다. 노자의 비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위의 설명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노자의 비유는 어떤 성질의 것인가. 노자의 비유는 말라르메의 통찰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그것은 중국고전을 읽을 때 나아가 동양고전을 읽을 때 핵심이 되는 사안이자 서구의 것과 완전히 결을 달리한다. 그것은 『노자』의 첫 장에 나오는 언어의 임의성과 관련된다. 이 문제는 왕필의 주에서 이미 설명했기 때문에 재론하지 않겠다. 분명한 사실은 노자가 비유를 사용하면서 언어의 어떤 측면을 돌파해 글쓰기 방식에 새 경지를 개척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동양고전의 글쓰기에 한 전범이 되어 흔들리지 않는 전통이 된다. 그렇다고 1장의 언어를 추상적인 언어관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동양고전의 글쓰기의 강점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것에서 추상을 이끌어내는 힘에 있다. 노자의 글쓰기(글쓰기 방식에서만 멈추는 것은 아니지만)도 그런 면에서 이해해야 하며 이는 『손자병법』에서 명확해질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앞서 언급한 것과 겹치지만 노자와 손자를 함께 거론하면서 좀 더 설명해 보자. 『노자』와 『손자병법』은 유사점이 적지 않다.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이 나왔다는 것. 노자는 언어사용이라는 구체적인 실천에서 언어의 불완전성을, 그럼에도 언어를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는 자각이 일어났다.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이 언어를 넘어서는 경지에 이르는 탁월함이 탄생했다. 이는 장자에서 더 선명하게 표현된다. 손자는 군사행동이라는 국가의 구체적인 행동을 실질적으로 사고하면서 중국사고의 핵심을 이루는 유동성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두 가지 모두 구체에서 추상으로 발전한 것이다. 두번째는 자신들의 사고를 명확하게 표현할 때 노자와 손자 모두 비유를 사용한다. 단순한 보조수단으로 비유를 빌려 쓰는 게 아니다. 자신들의 사상을 가장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쓰는 게 비유다. 비유는 그들의 사상을 이해하는 고갱이다. 비유를 놓치면 그들을 잘 읽지 못하는 것이다. 비유를 가볍게 보면 그들의 텍스트를 버리는 것이다. 

 


손자에서 노자로 이어지는 사상의 경로를 그리는 학자, 사상가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중국사고/동양적 사고의 어떤 핵을 건드린다고 생각한다. 앞서 얘기한 두 가지 유사점 때문이다. 두 가지는 반복하건대 그리고 강조하건대 서양과는 다른 동양의 사고를 이해하는 데 필수이자 기본 토대다. 『손자』와 『노자』가 불멸의 중국고전으로 꼽히는 이유는 이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 이후에 등장하는 어떤 텍스트도 이 두 가지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뻗어나가게 된다. 『손자』와 『노자』를 반드시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는 이해하기 쉬워 보이는데도 어렵고 간단한 듯하면서도 확실하게 손에 잡히지 않아 엉성하게 처리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특히 서양철학이나 사회과학처럼 건축적으로 명확한 개념을 쌓아가는 데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유동성이나 비유가 도무지 문학적으로만 보여 동양인의 사고가 엄밀하지 않다고 쉽게 단정하고 오해한다. 문학을 사회과학/철학과 별개의 영역으로 나누는 사고는 (맘에 안들지만)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개념이라는 틀 혹은 일정한 시각 자체가 역사적으로 형성된 시험적인 처방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스스로를 객관화하지 못한다는 게 내게는 더 이상해 보이는데 이 문제는 『손자병법』에서 상론하기로 하자. 

이제 『노자』에 집중해 노자의 비유를 자세히 들여다 볼 차례가 되었다. 노자의 주요 비유는 다섯 가지다. 암컷[牝], 골짜기[谷], 물[水], 간난아기[嬰], 통나무[樸]. 

 

글_최경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