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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열의 자기만의 고전 읽기

노자의 목소리, 시인의 언어와 철학자의 언어(9)

by 북드라망 2021. 4. 23.

노자의 목소리, 시인의 언어와 철학자의 언어(9)
『노자』의 비유(2) - 갓난아이[嬰], 통나무[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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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갓난아이 

부드럽고 연약하다 했으니 우리의 연상은 갓난아이의 비유로 자연스레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갓난아이의 비유가 처음 나오는 곳은 10장이다. “혼백을 싣고 하나로 끌어안으면서 떠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를 오로지하고 부드러움을 이루어 갓난아이처럼 될 수 있겠는가.”[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嬰兒乎.] 10장은 모두 6문장으로 4자+4자로 이루어졌는데 첫 구절만 5자+4자로 씌였다. 포일(抱一)사상으로 알려진 구절로 유명한데 여기에 “영백”(營魄)이란 낯선 글자를 가져왔다. 

 


‘영백’과 신체성
‘영백’이란 단어부터 시작해 보자. 하상공은 영백이란 말을 “혼백”(魂魄)이라고 설명했다. 굴원의 『초사』(楚辭), 「원유」(遠遊)에, “혼백을 싣고 아침노을로 날아올라”[載營魄而登霞兮]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한(漢)나라의 왕일(王逸)은 『노자』의 어구를 쓴 게 분명한 이 구절에 주석을 붙여, “내 영혼을 끌어안고 하늘로 올라간다.”[抱我靈魂而上升也]라고 했다. 영백을 혼백으로 본 것이다. 굴원의 경우 초나라에서 내침을 당하고 호소할 곳이 없으니 드높은 정신세계를 천상에 부쳤다고 해석하면 문맥상 영백을 영혼으로 본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상공의 경우 양생술(養生術)의 관점에서 풀어 혼백으로 보고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아우르는 말로 보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영(營)을 영양상태와 관련시켜 인간의 혈(血)을 만드는 구체적인 행위로 보고 육체와 연결시키고 백(魄)은 기(氣)와 이어지는 인간의 신체활동으로 해석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하상공은 육체활동 외에 정신성[魂]까지 덧붙여 좀 더 포괄적으로 해석했다고 하겠다. 실제 노자의 이 구절은 후대 양생술과 관련성이 있는 만큼 하상공의 주도 타당성이 크다. 더구나 노자의 경우 정신을 강조하는 관념성이 강한 정신주의 경향을 회피하는 철학이므로 심신을 함께 배려하는 사상을 염두에 둘 때 혼백으로 보는 게 타당해 보인다. 


문제는 노자가 용례가 드문 말을 가져와 쓴다는 점이다. 노자가 영백이란 말을 했기 때문에 이 말이 어휘로서 입력이 된 것이지 『노자』라는 책에서 쓰지 않았다면 보기 어렵지 않았을까. 그만큼 낯선 말이다. 왕필은 주석에서, “재(載)는 처한다는 말이다. 영백(營魄)은 사람들이 항상 거처하는 곳이다. 일은 인간의 참됨이다. 사람이 늘 사는 곳에 머물며 인간의 참됨을 끌어안고 맑은 신령스러움을 항상 떠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면 만물이 저절로 (주인인) 자신에게 손님으로 돌아와 따른다는 말이다,”[載, 猶處也. 營魄, 人之常居處也, 一, 人之眞也. 言人能處常居之宅, 抱一淸神, 能常無離乎, 則萬物自賓也.]라고 했다. 왕필은 영백을 “人之常居處”라고 넓게 해석했다. 왕필에게는 포일(抱一)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영백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 같다. 왕필에게는 포일하고 그에 따라 청신(淸神)을 유지하면서 이 상태에서 떠나지 않고 있어야 외물(外物)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영백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하늘에서 천성적으로 받아 살아야 하는 신체성으로 보아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 같다.

갓난아이의 온전한 집중
이런 우회로를 거쳐서 다음 구절을 보면 갓난아이의 비유가 선명하게 보인다. 앞 구절이 신체성이 깃든 정신성에 강한 액센트를 두었다면 이 구절은 정신성에 “전기치유”(專氣致柔)라는 말을 써서 육체성을 강조하는 말로 변화시킨다. 앞 구절은 “떠난다”[離]고 했다. 떠나지 말아야 한다는 수사적 강조문인데 추상적인 말로 육체성이든 정신성이든 인간은 의식이나 지식 따위로 분리된 사고를 해서는 안 된다[抱一]고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다. 갓난아이의 비유가 이 뜻을 강력하게 전한다. 갓난아이의 특징을 “전기치유”(專氣致柔)라고 했다. 갓난아이의 부드러움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기氣를 오로지 집중한다고 했다. 갓난아이가 젖을 먹을 때 온통 집중하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은 것일까. 온갖 세상사에 흐트러진 정신을 갓난아이의 온전한 집중력과 비교하려는 것일까. 아기의 그 앙증맞은 손을 잡아보라. 갓난아이가 꼭 잡고 놓지 않는 그 집중된 힘. 노자는 그 오롯한 힘을 “전기”(專氣)라고 한 것 같다. 그것은 신체성에 기반한 말이지만 기(氣)라는 말을 통해 육체성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아우른다.     

    
55장에서 갓난아이의 비유는 더 구체화된다. “덕을 머금은 것의 도타움은 갓난아이에 비유할 수 있다. 매미며 전갈도 뱀도 쏘지 않고 맹수도 물지 않으며 매서운 새도 채가지 않는다.  뼈는 약하고 근육은 부드러우나 쥐는 것이 억세다. 남녀의 육체적인 결합을 알지 못하는 데도 고추가 완벽하게 발기한다. 정기가 최상의 경지다.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으니 조화가 최상의 경지다. 조화를 아는 것이 항상됨이다. 항상됨을 아는 것이 총명함이다. 삶을 더 살려 하는 것을 요상함이라 하며 마음이 기운을 부리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 만물은 장성하면 늙는다. 이것을 도답지 않다고 하며 도답지 않으면 일찍 끝난다.”[含德之厚, 比於赤子. 蜂蠆虺蛇不螫, 猛獸不據, 攫鳥不搏. 骨弱筋柔而握固, 未知牝牡之合而全作, 精之至也. 終日號而不嗄, 和之至也. 知和曰常, 知常曰明, 益生曰祥, 心使氣曰强. 物壯則老, 謂之不道, 不道早已.] 이 글은 갓난아이에 대한 찬가로 읽을 수 있다. 찬가에 그치지 않는다. 비유의 초점이 갓난아이에서 조화로운 삶이라는 인생 테마로 중심이 모였다가 동심원처럼 해석이 퍼져나가 의미의 그물망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문장이다. (그러니까 시인인가?) “매미며 전갈도 뱀도 쏘지 않고 맹수도 물지 않으며 매서운 새도 채가지 않는다”는 말은 온전한 덕을 설명한 말로 유가에서 인간을 교화시킨다는 말과 대비되어 자연물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본 점에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갓난아이는 하늘이 준 고유한 성질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含德之厚]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갓난아이는 정기(精氣)라는 생명력의 근원도 최상의 경지다. 노자는 이것을 “남녀의 육체적인 결합을 알지 못하는 데도 완벽하게 발기한다”[未知牝牡之合而全作.]고 썼다. “전작”(全作)은 성기가 발기한다[to erect]는 말이다. 전작이라는 말은 판본에 따라 글자가 달라 눈여겨 볼만하다. 가장 오래된 죽간본에는 “연노”(然怒)(노怒라는 말도 발기하다, 꼴린다는 뜻으로 쓰였다. 구체적인 표현이다)라고 했다. 백서본에는 “최노”(脧怒)로, 하상공본에는 “최작”(䘒作)이라고 기록했다. 최초 기록인 죽간본에서 왕필본까지의 글자변화를 보면 이렇다. 연노(然怒)→최노(脧怒)→최작(䘒作)→전작(全作). 글자 변화는 사고변화에 정확히 대응한다. 죽간본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문맥 중심으로 발기한다[怒]고 섰다. 춘추시대 백서본 시대에 오면 의미를 명확히 밝히려고 ‘어린아이 성기’라는 말을 가져왔다. 이때 부수가 육달월[月=肉]이라는 점에 주목할 것. 한나라 시기 하상공이 주석을 달 때 판본에는 어린아이 성기라는 말이 같은 의미의 최(䘒)이긴 하나 부수가 육달월[月=肉]에서 피 혈[血]로 바뀌었다. 성기 발기가 살[肉] 덩어리의 움직임이 아니라 혈액[血]과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고 한 말이다. 이는 한나라 때 고대 한의학의 성립과 관련되어 당시 사유가 반영된 글자일 것이다. 최(䘒)라는 한자는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볼 일이 없는, 빈도수가 가장 적은 글자 가운데 하나다. 그러던 것이 위진남북조시대에 와서는 표현이 고상해져 전작(全作)이라는 말로 변했다. 전(全)이라는 강조어를 넣어서 의미를 명확히 하긴 했지만. 최작이라는 말이 살아남았다면 괴상한 글자를 쓰기 좋아하는 노자의 특성이 그대로 전달됐을까. 노자의 조어법이랄까, 기이한 글자를 쓰는 방법은 고스란히 장자로 전달된다는 사실도 덧붙일 필요가 있다. 

갓난아이, 조화의 최고경지
덕과 정기를 말한 노자는 과감하게 논리를 확장시켜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갓난아이의 능력(?)을 가져와 조화의 최고경지[和之至]라고 칭한다. 왜 아니겠는가. 육체성과 정신성이 최상의 상태에서 하나가 되었으니 어찌 최상의 조화가 아닐까. 노자가 계곡과 물의 비유를 여성성[牝]으로 표현했을 때 이 비유에는 성숙한 여자의 성기와 자궁이라는 이미지가 짙게 배어 있다. 그 여성의 몸에서 난 갓난아이가 왜 완전한 조화의 상태가 아니겠는가. 그런 조화의 상태를 아는 것, 그것이 항상됨[常, 일상성]이며 항상됨을 알 때 비로소 총명한 것[明]이다. 이런 상태를 벗어나 인위적으로 삶을 더할 때 그것은 요상한 일[祥]일 수밖에. 갓난아이 같은 최상의 조화에 무엇을 덧붙여 더 살겠다고 애를 써서 이상한 약을 먹고 기이한 행동을 하는가. 마음을 쓴다는 의식 없이 기를 다스릴 줄 알아야 진정 강한 것[强]이다. 사물이란, 생명이란 장성하기 마련이나 장성하면 늙는 것[老]도 필연. 이것은 도답지 않은 것[不道]이며 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不道]. 노(老)는 적자(赤子, 갓난아이)와 상반되는 말이다. 장성[壯]도 갓난아이에서 멀어지는 길이다. 도가 계열의 사람을 그린 그림을 보면 나이가 많은 데도 남자 여자 성 구별 없이 모두 어린아이같은 모습으로 묘사하는지 이 글은 설명해 준다. 노자가 갓난아이를 불러온 것은 보조관념이 아니다. 글 전체를 꿰는 눈[眼字]이다. 갓난아이 비유가 빠지면 글에 생기가 사라진다. 문장의 활기라는 측면에서 머물지 않고 비유가 수사적 차원을 넘어 문화의 한 틀(무수한 신선 그림과 문헌을 상기해 보라)이 되는 근거이기도 한 곳이다. 


절학무우(絶學無憂, 배움을 끊어라 근심이 없어질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로 시작하는 20장에서도 갓난아이의 비유가 등장한다. “나 홀로 드러나지 않아 아무 조짐이 없으니 갓난아이가 아직 웃을 줄 모르는 것과 같다.”[我獨泊兮其未兆, 如嬰兒之未孩.] 배움과 근심을 등치시킨 말이야말로 노자답다고 할 만하다. 많이 배운다는 건 근심이 늘어간다는 말(識者憂患)인데 왜 다들 근심을 늘리지 못해 안달일까. 아니 왜 노자는 배움을 근심이라 했을까. 웃을 줄도 모르는 갓난아이처럼 드러나지 말라고 했다. 거꾸로 말하면 자신이 아무 조짐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웃을 줄 모르는 어린아이 같다는 뜻이다. 갓난아이는 좋은 비유이므로 한탄하는 표현으로 읽으면 안 된다. 노자는 잠재태로서, 가능성으로서 말한다. 드러내지 않고 자의식을 내세우지 않으니 자신을 드러내게 만들며 자의식이 강하게 만드는 지식을 회피할 수밖에 없다. 20장의 결론은 이렇다. “나 홀로 남과 달라, 만물을 먹여 살리는 어머니를 귀하게 여긴다.”[我獨異於人, 而貴食母.] “사모”(食母)는 도(道)로 바꿔 읽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도는 만물을 먹여 살리지만 나서지 않는다. 하늘은 비를 뿌리고 거두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는다. 땅을 만물을 거둬들이고 품에 안지만 수고로움을 뽐내지 않는다. 갓난아이의 비유가 어머니와 이미지가 겹치면서 겸손한 의미망을 만들며 문장도 자신을 내려놓는다. 자기를 감춘다는 아름다운 비유다.


갓난아이나 어린애의 비유는 노자만의 고유 방식이 아니다. 『손자』(孫子) 「지형편」(地形篇)에, “병사를 갓난아이처럼 본다. 그러므로 병사와 함께 깊은 계곡에 갈 수 있으며 병사를 사랑하는 자식처럼 본다. 그러므로 병사와 함께 죽을 수 있다.”[視卒如嬰兒, 故可以與之赴深谿;視卒如愛子, 故可以與之俱死.]라는 글이 보인다. 손자의 비유는 일반적인 사용이라고 할까, 장군과 병사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 사이로 등치시킨 것이기 때문에 친밀감과 사랑이라는 의미로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노자의 경우, 갓난아이의 행태를 다채롭게 인용해 여러 면에서 다루기 때문에 일대일 대응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갓난아이의 속성에 대한 이해가 도에 대한 인식으로 곧바로 등치되지 않는데 갓난아이=도이거나, 갓난아이가 도를 대표하지 않기 때문이다. 갓난아이는 비유이되 대유(代喩)나 환유(換喩)가 아니라 도를 감지할 수 있는 일부분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노자가 갓난아이의 비유만 쓰지 않고 많은 비유를 동원한 이유가 도를 어느 하나로 고정하거나 확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게 아니다. 의외로 손자와 노자의 관련성이 높을 수 있다는 점을 환기하기 위해서다. 이는 『손자』를 논할 때 자세히 거론하기로 하자.     


4. 통나무의 비유

28장은 노자의 비유가 집대성된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를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추상적인 두번째 단락을 빼고 우리 주제와 관련되는 나머지 부분을 보자. “1. 숫컷임을 알면서 암컷임을 지키면 천하의 계곡이 된다. 천하의 계곡이 되면 항상 있는 덕이 떠나지 않아 갓난아이로 되돌아간다. 3. 영예를 알면서 욕됨을 지키면 천하의 골짜기가 된다. 천하의 골짜기가 되면 항상 있는 덕이 족해 통나무로 되돌아간다. 4. 통나무가 흩어지면 그릇이 된다. 성인이 그릇을 쓰면 기관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러므로 큰 제도는 자르지 않는다.”[1.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爲天下谿, 常德不離, 復歸於嬰兒....3. 知其榮, 守其辱, 爲天下谷. 爲天下谷, 常德乃足, 復歸於樸. 4. 樸散則爲器. 聖人用之, 則爲官長. 故大制不割.] 두 번째 단락은 생략했지만 첫째, 둘째, 셋째 단락은 문장 패턴이 반복된다. 마지막 단락에서 셋째 단락을 이어 결론을 맺는데 문장의 강조점은 통나무[樸]에 놓인다. 통나무 비유는 함의가 풍부한데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아 비유를 주의 깊게 봐야 한다.

통나무, ‘이용’되지 않는 도
노자는 암컷/수컷, 영예/욕됨, 생략된 단락에서는 흑/백을 써서 겉과 속으로 아니면 겉면과 이면으로 볼 수 있는 사물의 양면성을 구유해야 온전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그래야 상덕(常德)이 유지된다고. 그것은 음양으로 포괄할 수 있는 세계의 온전한 면을 설명한 것이다. 유교에서 남녀유별을 두어 사회적으로 성별을 구분[=젠더gender]해 인간 생활의 근간(오륜, 인간의 다섯 가지 기본 윤리) 가운데 하나로 삼은 것을 생각해 보라. 노자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겸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음양을 갖추어야 가장 겸손한 곳에 자리해 도와 닮아간다. 첫번째 단락은 노자가 즐겨 사용한 비유가 모두 한 문장에 집약되었다. 앞에서 충분히 언급했으므로 더 얘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갓난아이와 계곡과 동일시한 구조는 셋째 단락에서 통나무로 수렴된다. 이때 통나무는 통나무라는 어떤 구체적인 물질성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소박함[樸]이기도 하고 잠재력이기도 하며 가능성이기도 하다. 이는 되풀이해 온 이미지다. 


통나무는 계곡이나 물처럼 자연물이 아니다. 나무[樹木]일 때는 자연물이지만 통나무는 수목에서 벗어난 상태다. 그렇다고 인공물도 아니다. 여자와 갓난아이도 자연의 일부로 보면 인공물이라 볼 수 없다. 사람의 힘이 가해져 인간세계의 쓰임새로 변할 때 인공물이 되는데 통나무는 그 이전 상태이므로 인공물도 아니다. 자연과 인간의 경계선에 위치한 묘한 비유물이다. 통나무는 수목이 아니므로 자연의 상태에서는 벗어났지만 재목이 아니므로 인공의 세계에는 아직 진입하지 않은 물건이다. 자연의 세계와는 다른 물건이지만 자연의 소박함은 그대로 간직한 채다. 인공의 세계로 들어오기도 편해서 가공하면[散] 인간에게 쓰임새가 큰 그릇[器]이 될 수 있는 존재. 자연과 인공의 세계가 조화하기도 하고 갈등하기도 하기에 자연과 인간의 경계가 문제 되는 게 아닌가. 

 


노자는 통나무의 상태를 주목한다. 통나무는 인위적으로 매만져[散] 그릇이 되기도 해서 성인 통치자가 뛰어난 인재를 발탁해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면 누군가는 한 기관이 장이 되기도 한다.[聖人用之, 則爲官長.] 그러나 공자도 갈파했듯이 “군자는 그릇으로 쓰이지 않는 법이다.”[君子不器.] 노자 역시 말한다. “도는 항상 이름이 없다. 통나무는 비록 작지만 천하에서 누구도 신하로 삼을 수 없다. 제후나 왕이 통나무의 상태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스스로 그에게 와 손님이 될 것이다.”[道常無名, 樸雖小, 天下莫能臣.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32장] 32장에는 1장의 유명한 말이 메아리치고 마지막 구절은 갓난아이 비유를 설명할 때 섰던 왕필의 흔적까지 보인다. 노자는 여기서 도는 통나무라고 단언한다. 아주 작지만 아무도 신하로 삼을 수 없다고. 왜? 도이기 때문이다. 도는 어느 한 가지에 국한되어 쓰이는, 인간에게는 유용할지 모르나 제한된 사용에 묶이는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근본 힘이지만 의자나 두레박처럼 한 가지 용도에 쓰일 수 없는 것이다. 유용함이라는 기준으로만 보지 않아야 보이는 것. 그것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함이기도 하다. 그럴 때 진정한 왕이 될 수 있다. 


앞서 보았던 하류(下流)라는 말이 이곳으로 흘러온다. 통나무는 작게는 문지방이나 일상 용품이 되지만 나라의 그릇이 되면 큰 인물로도 변할 수 있다. 그것을 “통나무가 흩어지면 그릇이 된다.”[樸散則爲器]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통나무는 도(道)를 비유한 말이기 때문에 그릇처럼 쓸 수는 없다. 때문에 마지막 문장과 이어진다. “그러므로 큰 제도는 자르지 않는다.”[故大制不割] 제도라고 번역했지만 제(制)라는 말은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산(散)이라는 말이 정치적으로 대표될 때, 앞에서 성인이 정치를 해 훌륭한 사람을 한 기관의 우두머리로 삼는다 했으므로 정치시스템으로 받아 제도라고 한 것일 뿐이다. 통나무는 이용되지 않는 도이므로 가장 뛰어난 제도(혹은 손질, 이용하기)는 도를 따르는 것이기에 손대지 않아야 한다는 역설을 말한 것이다. 제(制)라는 글자나 할(割)이라는 글자에 모두 칼[刀=刂]이라는 인위적 행위가 들어갔음을 볼 필요가 있다. 가장 뛰어난 정치는 인위적인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無爲]는 노자의 명제가 여기서도 되풀이된다. 

통나무와 문(文)
32장은 28장과 함께 읽을 때 통나무의 비유가 선명해진다. 노자는 통나무를 비유로 쓰면서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는 두 가지 말을 사용했다. 산(散)과 기(器). 산(散)이라는 말은 흐트러뜨린다는 단순한 풀이에 멈추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활용도가 큰 말이다. 이 글자는 『장자』(莊子)에서 산목(散木)으로 쓰이면서 문목(文木)과 대조를 이루더니 산인(散人)이란 말로 의미가 변주된다. 일단 의미가 변주를 시작하면 파장은 한 없이 퍼져간다. 산목과 문목의 앞 글자만 따오면 산문(散文)[prose]이 되고 산문은 곧바로 운문(韻文)을 끌고 들어온다. 이렇게 되면 문(文)의 다양한 무늬를 설명하지 않을 도리가 없고 이때 설명되는 문은 문목(文木)으로 되돌아가 의미는 중첩되고 다른 의미를 낳는다. 나는 꼬리를 무는 산(散)이라는 글자에 매혹되어 한바탕 수다를 떨고 싶다. 노자와 장자가 만나고 철학과 문학이 어우러지면서 언어유희가 인간관·세계관의 변화로 이어지는 어떤 경지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수다는 장자에서 펼치는 게 더 어울릴 것이다. 


나를 유혹하는 또 다른 글자, 기(器)도 마찬가지다. 비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얘기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누누이 강조한 말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훌륭한 비유를 쓴다고 모두 시인은 아니나 비유만으로 자기 집을 지을 줄 아는 시인이 흔치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비유를 레토릭으로 짧게 이해하는 이들에게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기(器)도 비유이지만 통나무[樸]에 예속되는 하위범주가 아니다. 여기까지 비유라는 항목을 설정해 설명했으나 노자의 비유는 시의 비유이면서 근본적인 사유[철학]를 품은 일체임은 더 말할 것도 없을 터. 기(器)에 대해 노자는 멋진 문장을 준비해 두었다. 노자의 그 말은 시인의 본질과도 관련이 되므로 시인의 다른 면모를 다룬 다른 장(4-2장)에서 이야기해야 한다.


  노자의 비유는 삼엄하다. 친절하게 설명하고 자세히 가르쳐 주지만 그것은 방편일 뿐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을 환기시키기를 멈추지 않는다. 도는 간단히 규정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아니 되기에 반복하고 강조하면서 엄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설명을 아니 할 수도 없고 설명하자니 한쪽에 국한되어 일부가 전부인 것처럼 오해될 위험이 크다. 모두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전혀 설명을 하지 않는 ‘무’(無)와 오해를 무릅쓰고 일부를 드러내는 ‘유’(有), 그 사이의 경계는 희미한 붉은 선처럼 위태롭고 희미하다. 노자는 여기서 비유를 택한다. 노자의 비유는 수사학이 아니다. 언어로는 미세한 감정의 결과 세밀한 사고, 큰 사상을 다 표현할 수 없다고, 사람들은 언어의 한계를 곧잘 꺼내든다. 무책임한 말이다. 언어란 그런 게 아니다. 언어는 대상을 잘 포착하는 훌륭한 그물이지만 동시에 포착한 대상을 끊임없이 상처 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무엇인가를 짓고 세우고 가리키지만 계속 훼손시키고 부수고 가리는 이상한 물건이다. 그걸 알면서 글을 쓰고 말을 하기에 불완전함이 손실된 부분을 불러일으키고 독자는 결손을 상상하면서 글의 집이 간신히 버티는 게 아닐까. 무언가 빠진 그 자리에 의미가 고이는 것이다. 그래도 의미는 바람처럼 빠져나간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 비유만 가까스로 남는다. 

 

글_최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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