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향한 여섯 번의 시도: 카프카를 읽는 6개의 키워드』
지은이 인터뷰
1. 이 책은 ‘유목, 독신, 법, 측량, 변신, 글쓰기’라는 키워드로 카프카의 문학을 조명하고 있는데요, 그 핵심은 자유의 문제로 보입니다. 카프카 작품을 ‘자유’를 중심으로 읽게 된 이유가 있으실까요? 또 그와 관련한 카프카의 대표작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자유’라는 말은 참으로 매력적이지요. 저는 오랫동안 ‘자유’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하면서 학교나 회사와 같은 사회 제도들을 자유의 방해물이라며 부정적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카프카의 작품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읽게 되었어요. 작품의 주인공 원숭이 피터는 철창을 자기 자유를 막는 장애물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가두는 것은 자기의 믿음이라고 하지요. 스스로를 원숭이라고 생각할 때에만 바나나도 못 먹고, 털도 마음대로 뽑을 수 없는 동물원 우리가 감옥이 된다는 겁니다. 이 나무 저 나무를 훌쩍 뛰어다녀야만 하는 그 욕망이 피터를 원숭이로밖에 못 살게 했던 것이지요.
카프카에 따르면 우리는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는 자기 정체성과 욕망에 구속된 존재들입니다. 저라면 엄마, 여성, 인간이라고 하는 그물에 구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엄마의 자유, 여성의 자유라고 아무리 말해 보아도 엄마라는 존재를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검토하지 않는 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자유’는 중요하지요, 하지만 카프카는 그 ‘나’라는 것을 우리 각자가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부터 문제 삼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읽은 후부터 ‘내 상식을 의심하지 않으면 자유로울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무턱대고 의심할 수는 없지요. 나의 출생과 지금까지의 경험은 생생하게 이 신체와 정신에 각인되어 있으니까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자신의 상식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요? 그래서 저는 카프카의 글을 자기 굴레를 의심하기 위한 몸부림들로 읽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이 유목, 독신, 소송, 측량, 변신, 글쓰기입니다.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자신을 한 사람의 시민으로 만들어 주는 여러 가지 관계들을 관찰하면서, 그 틈을 비집고 달아납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 정체성을 복수로 만들거나 그 욕망을 변형시키는 데에 능하지요. ‘자기’라는 것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저는 카프카의 소설 안에서 자기 믿음에 갇히지 않는 온갖 변신체들을 발견한 뒤부터 ‘자유’라는 말을 더 가볍고 재미있게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카프카의 작품은 이해하기 어렵고, 때론 기괴하게 느껴져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작가님께서도 카프카 작품을 해석하는 데 꽤 긴 고투의 시간을 보낸 걸로 보이는데요, 카프카에게 어떤 매력이 있었기에 그 긴 시간 그의 작품과 씨름해 온 것인지요?
카프카 작품을 한 편씩 차례로 읽어 가기 시작했을 때 제가 가장 많이 던졌던 질문은 “왜?” 였습니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 씨는 그냥 어느날 아침에 갑충이 됩니다. 『성』의 K 씨도 무턱대고 마을을 쑤시고 돌아다니지요. 이들의 행위에는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주인공의 목적 없는 행위 때문에 소설이 답답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다가 『성』을 읽었는데요, 문득 정말이지 산다는 데에 이유가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에 목적을 도입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로 보였습니다. 자유로울 거야, 행복할 거야, 돈을 벌 거야 등, 이런 목적들은 대개는 추상적이기 마련이어서 실제의 삶을 자꾸 소외시키고 마니까요.
그때부터 저는 카프카 작품의 장면들을 이유 없이 보게 되었습니다. 잠자가 변신하는 과정 그 자체에만 집중하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아버지가 사과 던지는 모습에만 집중하기. 갑충-그레고르와 아버지의 사과 던지기 사이에 어떤 인과를 설정하지 않았지요. 그랬더니 그레고르가 인간의 말을 하기는 하지만 썩은 우유와 함께 있을 때에는 갑충으로 살고, 갑충의 모습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버지에게 사과로 맞을 때에는 아들로 산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카프카는 변신하는 주인공들을 통해 하나의 존재가 관계성 속에서 얼마든지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저는 카프카의 독자는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적 지향적인 성격의 독자는 이유 없이 장면만 바뀌고 있는 카프카의 소설들을 계속 읽기가 어렵겠지요.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맥락 없는 장면에서 애인에게 버림받고 이웃에게 놀림을 당하는 등 실패만 거듭하니까요. 하지만 그 실패는 ‘영원한 사랑’이라든가 ‘공공의 도덕’ 같은 특별한 가치를 전제로 했을 때에만 실패입니다. 인간관계라든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 자체에 별다른 정형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실패는 각기 다른 시도들이 됩니다. 저는 어떤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고 천천히 책의 한 줄, 일상의 한 장면을 음미하면서 생각하는 기쁨을 카프카로부터 배웠습니다. 한번 그렇게 책을 읽게 되니까, 카프카 작품이 끝도 없이 재미있어졌습니다.
3. 카프카에게 문학이란(또는 글쓰기란) 무엇인가요? 특히 책에서 ‘작은 문학’을 언급하셨는데, 이와 연관하여 말씀해 주세요.
카프카는 생전에 출판한 작품이라고 해봐야 단편집 2편(『관찰』,『시골의사』)과 중편의 『선고』,『화부』,『변신』,『유형지에서』 정도입니다. 세 편의 장편 소설들은 모두 미완으로 남겨졌고, 그나마 카프카는 죽기 전 유언에서 자신의 모든 글들을 불태워달라고도 했지요. 도대체 카프카는 왜 썼을까요?
그런데 그나마 우리에게 주어진 작품들도 읽다 보면 정말 참고문헌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카프카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프라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개인적인 꿈이나 사회적인 이상 같은 것을 인물이나 사건을 통해 형상화하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카프카가 살았던 시대나, 유대인 카프카의 내면세계 같은 것을 안다고 해서 『변신』이나 『소송』,『성』 등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카프카는 소설을 쓰면서 작품 후기 같은 것을 거의 남기지 않았는데요, 1912년 9월에 딱 한 번 『선고』를 쓰고 난 직후에 감상을 썼습니다. 글쓰기를 출산의 경험에 비유하지요.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어떤 압도적인 힘이 카프카로부터 그 자신도 몰랐던 어떤 이야기를 쑥 밀어내 버렸다고 합니다. 글쓰기란 쓰는 이의 주체적인 의지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카프카는 연인 펠리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글을 쓰지 않는 자신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쓸 것이 있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쓴다고 했습니다. 쓰고 보니 자신이 쓸 수 있었던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자기 내면의 무의식이고 욕망이라고요.
그래서 카프카는 반드시 글을 써야 했습니다. 글을 쓸 때만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믿고 따르는지 발견하게 되니까요. 카프카는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썼다고도 할 수 있지요. 그는 글을 쓰면서 자신이 붙들려 있던 취향과 생각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렇게 쓰인 글을 보면서 자기를 가두는 상식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일을 계속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카프카 식으로라면, 자유롭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펜을 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카프카는 글쓰기를 자유의 기예로 생각하면서 작은 문학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작다는 것은 ‘크다’에 대비되는 말이지요. 여기서 크다는 것은 단지 사이즈의 크기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척도적인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단지 한 사람의 작가가 이렇게 저렇게 꾸며낸 모든 이야기를 ‘문학’이라고 하지 않지요. 셰익스피어나 괴테와 같은 고전이 된 작가들의 소설을 떠올리면서 좋은 문학, 잘 쓰인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카프카는 글쓰기에는 어떤 전범이나 고전도 있을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쓰는 자가 자기 인식의 한계를 경험하기 위해 쓸 뿐이라는 거지요. 카프카는 써야 할 것들, 옳고 선한 것이라고 우리가 믿는 것들의 자력에 휘둘리지 않고자 ‘작은 문학’을 주장했습니다.
실제로도 소설에 작은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바쁜 현대인의 눈에는 절대로 포착될 리 없는 방구석 먼지나 골목길의 후미진 곳, 공무원의 해진 양복조끼라든가 전차를 타고 내리는 아가씨의 블라우스 자락 등. 정말 하나도 안 중요한 것들에 망원렌즈를 들이댄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런 것들에 왜 눈이 잘 안 가는 것일까요?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반대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화려한 상점들로 장식된 거리, 그 공무원의 직위, 아가씨가 다니는 회사의 이름? 카프카는 작은 것들의 미미한 움직임들을 보여 줌으로써 그것들을 작게 만드는 큰 것들의 허위로움을 직시했습니다.
4. 유목, 독신, 법, 측량, 변신, 글쓰기 중 특히 강조하고 싶거나 좀더 애정이 가는 키워드는 무엇일까요?
변신입니다. 카프카의 작품들이 매력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주인공들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그 아저씨는 벌레이고, 여비서의 손에는 물갈퀴가 있습니다. 반쯤은 고양이이고 반쯤은 양인 튀기는 자신의 피부가 비좁아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모든 주인공들이 장면 장면마다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고 있다는 점에서 카프카의 우주 전체가 변신-괴물들의 카오스라고도 할 수 있지요.
저는 이 변신담에 끌립니다. 저의 아이가 좀 더 어렸을 때 “꿈이 뭐냐?”라고 물었더니 “새!”라고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태어났으니 하늘도 한번 날아봐야지! 이 대답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요. 그런데 이 말은 제가 카프카를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선생님이나 가수가 아니라 새가 되고 싶다는 아이의 바람은 아이가 자신을 인간으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지요. 땅 위에 발 딛고 있지만 아이의 피부와 세포들은 창공과 교감하고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잘 산다는 것은 우리가 이 자연, 이 사회 안에서 무엇과 함께 호흡하고 움직일 것인가를 고민하는 문제입니다.
직장인이 하루아침에 갑충이 되었다고 해서 정말 불행할까요? 카프카가 말하는 변신은 말 그대로 자기 신체를 바꾸기입니다.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은 다른 감각을 통해 세상과 만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까다롭고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영화 속 아이언맨처럼 특별한 재능을 장착하는 변신이 아니라, 어제 단 것을 오늘은 쓰게. 어제 아름답게 보였던 것을 오늘은 추하게. 어제 무거웠던 것은 오늘 가볍게입니다. 카프카가 말하는 ‘변신’은 ‘설마 그것만 있을 리는 없잖아?’ 하는 식으로 나를 설명해주는 온갖 규정들 즉 학생이라든가 회사원이라든가 아버지라든가 하는 자릿값을 대단히 유쾌하게 비틀면서 다른 삶을 모색하는 일입니다.
5. 독자분들이 카프카를 보고자 할 때 이 작품은 꼭 읽으면 좋겠다, 하는 작품과 그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카프카 작품은 함께 읽을수록 각자의 상식이 드러나기 때문에 더 재미가 있는데요, 저는 친구들과 작품상, 남우주연상, 베스트 커플상, 워스트 드레서상 등을 시상해 보곤 했습니다.^^ 서로 응원하는 후보작이나 인물이 다 달라서 아주 흥미진진해지지요.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상은 역시 남우주연상입니다. 자신이 인간임을 의심하면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가치들로부터 슬며시 달아나는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는 근사한 그 발길질 덕분에 몇 번이나 수상을 했습니다.
함께 읽었던 세미나원들을 생각해 보니, 유토피아나 지상 낙원을 꿈꾸지 않는 현실주의자들은 주로 변호사며 법원의 화가며 이웃들이며 득달처럼 달려와서 이리 살아라, 저리 살아라, 끌어당길 때 ‘글쎄요, 저는 그러고 싶지 않는데요?’라며 능청스럽게 딴짓에 열중했던 『소송』의 요제프 K(카)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디자인을 공부하던 한 친구는 「어느 단식 광대」에 나오는 굶으면서 소멸해가는 아저씨에게 반했었지요. 훌륭한 예술이란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신체를 바꾸는 것이라며.
사실 저는 카프카의 모든 글이 좋습니다. 공부가 잘 안될 때나 어떤 글을 써야 할 때에는 꼭 카프카의 작품 몇 줄을 읽고 나서 책상 앞으로 갑니다. 그래도 굳이 한 작품을 꼽으라면 『성』입니다. 『성』은 미완으로 남겨져 있지만 카프카가 시도했던 유목, 소송, 측량, 변신, 단식, 글쓰기 등 모든 테마가 작품 안에 다 녹아 들어있습니다. 남들에게는 활짝 열린 대로지만, 주인공 K에게는 미로와 같은 골목이 됩니다. 이웃들에게는 성에서 내려 주는 지시들이 혼란스러운 생활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 되지만, K에게는 다르게 살아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빼앗는 장애물이 됩니다. 저는 가장 구석진 자리에서도 갑갑함을 느끼기보다는 그 비좁음을 다르게 느낄 방법을 찾아내는 K를 볼 때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더 깊게 고민하고 더 많이 헤맬 수 있는 용기를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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