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연재 ▽/연암을만나다

[연암을만나다] 정情을 다한다는 것

by 북드라망 2020. 7. 9.

정情을 다한다는 것


 

며칠 전 일 년에 걸쳐 공부한 <갈매기> 연극이 끝이 났다. 발표를 마지막으로 나름 정이 가던 연극 속의 인물들과 영영! 작별했다.^^ <갈매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삽질을 반복하는데, 그중 ‘트레플료프’라는 인물은 올해 초 <갈매기> 대본을 처음 봤을 때부터 가장 마음이 가는 인물이었다.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무슨 말인지,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다른 역할을 맡았다가, 트레플료프 역할을 하던 친구가 그만두면서 여름 즈음 다시 그와 만나게 되었다. 막상 그 인물이 되어보려고 하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제법 이해가 되고, 알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와 나는 어딘가 많이 달랐다.


극중 트레플료프는 엄마의 애정을 갈구하고, 여자 친구에게 자기 작품 세계를(그는 작가 지망생이다)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둘 다 그에게 애정도 인정도 줄 수 없었고, 그는 스스로 서지 못하고 괴로워하다 자살을 한다. 그만큼 그는 감정적으로 불안정한데 신이 나 있다가도 엄마 이야기가 나오면 화를 벌컥 내고, 엄마와 악을 쓰며 싸우다가 펑펑 울기도 한다.



가장 따라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바로 이 감정을 벌컥 일으키는 장면들이었다. 문제는 내가 화, 슬픔, 기쁨 같은 것이 ‘벌컥’ 잘 안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화가 난 듯 비아냥거리거나, 한숨을 쉬는 건 할 수 있어도 화를 솟구치듯 내는 건 되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가 ‘표현’을 못한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와는 다르게 내가 이런 감정들을 정면으로 대면해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매양 모르겠네, 소리란 똑같이 입에서 나오는데, 즐거우면 어째서 웃음이 되고 슬프면 어째서 울음이 되는지 어쩌면 웃고 우는 이 두 가지는 억지로는 되는 게 아니고 감정이 극에 달해야 우러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모르겠네, 이른바 정이란 것이 어떤 모양이관대 생각만 하면 내 코끝을 시리게 하는지. 또한 모르겠네, 눈물이란 무슨 물이관대 울기만 하면 눈에서 나오는지.


아아, 우는 것을 남이 가르쳐서 하기로 한다면 나는 의당 부끄럼에 겨워 소리도 내지 못할 것이다. 내 이제사 알았노라, 이른바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란 배워서 될 수 없다는 것을.


(「사장士章 애사」,『연암집下』, 돌베개, p340)


연암을 읽으면서도 그 지점들을 종종 만나게 되었던 것 같다. 특히 그의 절절한 제문이나 묘비명을 읽으면, 정情이 정말 거세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묘비명은 당시에 꽤나 센세이션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이미 있는 형식에다가 연도와 이름, 지위 정도만 바꿔서 제문을 썼던 것과 (그만큼 고인에 대한 애사는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달리 그가 쓴 제문들은 제각기 다르다. 그 글만 읽어도 연암과 고인이 어떤 사이였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다.


연암에 따르면, 웃음이나 울음은 (어떤 건 슬픈 일이고, 어떤 건 기쁜 일이라고) 배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이 극에 달했을 때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의 제문도 ‘이른바 정이란 것이’ 극에 달해 우러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이 ‘극에 달하는’ 것. 그것은 뭐, 극단적으로 치닫자는 것이 아니다. 이미 발發한 것이라면, 왜곡시키지 말자는 것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화가 나면 화를 내면 되고, 슬프면 슬퍼하면 된다. 하지만 그것을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정당화할 필요는 없다. 아니, 오히려 그러지 않을 때 투명하게 내 전제를 보고, 내 정情의 민낯과 대면할 수 있다. 감정을 극에 달하도록 하기, 극진하게 정을 다하기, 그것은 자기가 일으킨 감정에서 발 빼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연극은 끝났지만 순수하게 슬퍼하고 진지하게 화내는 트레플료프에게 아직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글_이윤하 (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