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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연암을만나다

[연암을만나다] 달관의 맛

by 북드라망 2020. 6. 18.

달관의 맛

 


아마 이 글이 무사히 완성되어 올라간다면, 그로부터 몇 시간 후에는 깨봉2층에서 연극공연을 올리고 있을 거다. 하하. 1년의 준비기간이 있었고 벌써 3번째로 극을 올리는 건데도, ‘이래도 되나’싶을 정도로 준비가 안 된 것 같은 마음은 이번이 제일 심한 것 같다. 이번 극 <갈매기>에 마음이 열리기까지가 오래 걸렸기 때문일거다.




뭐에 그리 거부감이 들었던 걸까. 이번 극은 연극 시간이 20분가량 되었던 작년과는 다르게 1시간 30분이라, 하루에 1막 이상 연습하기도 빠듯한데다가 대사 외우는 것도 더디고 막막하긴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내가 맡은 캐릭터를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내가 맡은 역은 불평불만 많은 할아버지 ‘소린’역인데, 내가 보기에 이 사람에게 본받을 점이라곤 1도 없어보였다. 이 사람이 되어 보려고 하면 할수록,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만 줄 것 같았다.


연극 선생님께서 소린이 매일 투덜거리기는 해도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을 보면 다정한 사람이고 긍정적인 면을 찾아보라고 말씀해주셔도, 나에게는 나쁜 면들을 애써 좋게 포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소린은 쇠약하고 불만 많은 이미지에서 조금도 벗어나질 못했다. 오히려 이 상태에서는 ‘연극을 왜 해야 하는 건지’ 의심만 계속 들었다.


달관한 사람에게는 괴이한 것이 없으나 속인들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이른바 ‘본 것이 적으면 괴이하게 여기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달관한 사람이라 해서 어찌 사물마다 다 찾아 눈으로 꼭 보았겠는가.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눈앞에 그려보고, 열 가지를 보면 백 가지를 마음속에 설정해 보니, 천만 가지 괴기한 것들이란 도리어 사물에 잠시 붙은 것이며 자기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마음이 한가롭게 여유가 있고 사물에 응수합이 무궁무진하다. 

- 박지원 지음, 『연암집(하)』, 「능양시집서」, 돌베개, 61쪽


속인들이나 달관한 사람이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모든 걸 다 겪을 수도, 알 수도, 볼 수도 없다. 다만, 달관한 사람이 속인과 다른 점은 계속 시도한다는 점이다. 내가 여태껏 보아왔던 이미지에 머물지 않아야 유연하게 사물에 응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극에서도 그랬다. 연극 선생님의 주입식 교육 덕분인지, 어느 순간 소린에게 좋은 점을 하나 보였다. 처음에 발견한 건 ‘자기감정에 솔직하다’라는 점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좋았던 점은 ‘아, 그래서 소린이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구나’라고 소린의 말과 행동들이 납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면모를 부각시키려 매 대사에 주의를 기울이다보니 좀 더 심취(?)하게 된다. 거기다 희한하게도 이런 면모를 표현하기 위해 ‘좀 더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다’는 욕심과 재미가 생겼다. (물론 그 뒤로도 계속 주춤주춤하게 되고 마음처럼 잘 안 될 때가 더 많다.)


아마 이런 맛에 달관한 사람들은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눈앞에 그려보고, 열 가지를 보면 마음속에 백 가지를 마음속에 설정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게 아닐까.


덧,

참, 혹여나 우리의 연극에 너무 희망에 찬 마음속 설정만 가진 분이라면 우리의 연극 소개 문구를 꼭 기억해주셨으면 좋겠다^^

“자세히 보아야 재밌다. 오래 보아야 웃기다. 우리의 연극도 그렇다”


글_남다영(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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