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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융

[내가 만난 융] 새로운 의사의 탄생

by 북드라망 2024. 12. 9.

새로운 의사의 탄생


김 한 수(사이재)

 

한 인간은 하나의 정신 세계이다.
그것이 다른 인간에게 작용할 때, 다른 정신 체계와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융 저작집 ’정신요법의 기본문제‘ p13)

 


신체뿐 아니라 사람의 정신을 본격적으로 치료한다는 생각은 오래지 않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이다. 19세기를 거치면서 물리 화학 등 과학적 발전과 함께 인체해부학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이에 따라 질병 개념은 점차 해부학적으로 변해갔다. 가령 심장병, 뇌질환, 위장병, 피부질환, 뼈질환 등등. 한편 정신질환은 물리적, 화학적, 해부학적 검사 결과 이렇다 할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서 환자의 증상이 있는 질환이다. 따라서 정신질환은 신체의 다른 병보다 진단이 애매한 것으로 남아 있었다. 사람의 정신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고 치료하려는 움직임은 19세기 말에 가서야 시작된다.

이와 더불어 그 시기에 정신치료에 관한 관심이 증가한 이유는 사회 분위기의 중대한 변화와 관계가 있다. 정신의학의 역사에 의하면, 정신질환은 그 당시인 19세기부터 유럽에서 급격히 늘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 그 당시에 정신질환이 증가했을까? 그것은 그 당시가 소위 유럽의 ‘빅토리아 시대’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빅토리아 시대는 1837년부터 1901년까지 영국의 빅토리아왕이 재위했던 그 무렵의 유럽의 시대적 특징을 나타내는 말로서 이성과 도덕이 유난히 강조되던 시대였다. 당시 유럽은 오랜만에 전쟁이 없이 평화가 유지되는 시대였고, 과학적 기술적 진보와 더불어서 유럽에 머지않아 유토피아가 올 것 같은 지나친 낙관주의가 팽배한 시기였다. 자기 이성에 대한 자긍심, 자기 문화에 대한 오만의 시대. 19세기는 당대의 학문조차 예기치 못했던 진보로 인해 일종의 이성 도취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눈부신 이성의 시대에 오히려 인간의 깊은 심연에 있는 무의식은 더욱더 모습을 드러낸다. 신경증 환자의 급증이다. 특히 도덕적 이성에 의해 억압받는 여성과 아이들의 신경증이 두드러졌다. 그 시기를 프로이트 당시 작가인 츠바이크(Stefan Zweig)는 이렇게 말한다. “오로지 사회적 규범만이 외적 관습을 고수하고자 했다. 따라서 진짜 도덕주의는 필요하지 않았다. 윤리적일 필요는 없었다. 도덕적으로 처신할 필요뿐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척하기’가 필요했던 것이다.”(『프로이트를 위하여』 츠바이크, 책세상 49쪽)

 

 

정신치료를 위한 새로운 접근법, ‘대화’
외적으로 보이는 것에만 치중했던 시기에 오히려 사람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드러나는 정신질환이 증가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 지금 우리는 어떤가. 외적인 아름다움만 추구하는 성형수술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시행되고 있고, 경제적으로 ‘단군이래 가장 풍요로운 시대’라고 일컬어진다. 적어도 수치상 세계 10위의 무역국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를 넘었다. 각종 지표는 이미 풍족한데, 자살율은 OECD 국가들 중 1위이고, 우울증은 최근 10년 새 2배 증가되었다. 사회적으로도 지역 간, 남녀 간, 나이 세대 간 곳곳의 혐오감은 유례가 없다. 내가 일하고 있는 심장내과 클리닉도 증상만 있고 실체가 없는 환자가 계속 늘어감을 느낀다. 실제 신체적인 질병은 없는데, 가슴이 답답하거나 두근거림이 있는 사람들이다. 내면의 신경증, 불안, 두려움 등이 몸으로 나타나서 증상화된 경우들이다.

아무튼 그 당시에 그러한 시대적 요청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칼 융이 있었다. 빈 태생의 유태인인 프로이트는 처음에는 주로 신체적, 신경학적 질병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1885년부터 1886년까지 프랑스 파리로 가서 쟝마르텡 샤르코(Jean-Martin Charcot)에게 정신치료에 관한 연수를 한 계기로 정신병리학으로 관심분야를 바꾸었다. 당시 샤르코는 파리에서 최면술을 이용하여 새로운 정신치료법을 시도하고 있었다. 최면술은 환자에게 최면상태를 유발해서 정신의 심층을 탐구하고 어떤 암시를 통해 치료하려는 방법이다. 그러나 최면술은 모든 환자에게 최면을 거는 것이 성공하지 않았고, 원했던 깊이로 최면상태를 끌어들일 수도 없었다. 또 하나 유행했던 방법은 쿠에 요법(Coue method). 프랑스의 약사이자 심리치료사인 에밀 쿠에(Emile Coue, 1857~1926)가 시도한 방법으로 ‘의식적 자기암시’이다. 그는 “질병은 없다”,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다”, “나는 고통이 줄어들고 있다”와 같은 만병통치용 문구 몇 가지를 암시적으로 환자에게 주입시키는 방법이다. 오늘날 얄팍한 힐링이나 위로같다. 근본적인 치유가 아닌 정신적인 문제를 겉으로만 덮어버리는 이 방법은 내면의 문제를 오히려 더 키울 수도 있고, 그들의 메시지들을 병약하고 피폐해진 영혼들에 일방적으로 주입시킴으로써 환자들의 정신에 더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최면술이나 의식적 자기암시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것은 자유롭게 머리에 연상되는 것을 ‘말하게 하기’, 즉 ‘자유연상법’이다. 프로이트는 환자에게 머리속에 떠오르는 상이나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을 두서없이 말하게 하였다. 검토하거나 순서대로 생각하지 않은 채 긴장을 풀고 마음속의 모든 생각을 떠오르는 대로 말하게 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프로이트는 환자의 무의식 속에서 억압된 어떤 성적인 요소들을 발견하고 그 억눌려 있던 감정들을 의식적 단계로 방출(카타르시스)하도록 하는 방법, 즉 억눌려 있는 것들을 ‘말하게 함’으로써 치료한다.

그러나 융은 환자들을 대하면서, 모든 신경증이 성적 억압이나 성적 외상으로 인해 생긴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어떤 사례에서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맞았으나 다른 사례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의사와 그 대상인 환자 사이의 위계적인 관계로는 정신치료에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설사 분석과 환원을 통해 인과적 진실에 닿는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은 그 자체로 삶에 도움을 주지 않으며 체념과 절망을 낳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융은 환자들이 일방적으로 ‘말하게 하는’ 방법이 아니라, 상호적인 ‘대화’의 방법을 깨닫는다. 그것은 열린 대화이고, 환자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하는 대화이다. 대화하면서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라고 묻기도 한다. 그러면 환자들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병을 이야기하고, 문제를 짚어내고, 심지어 치유의 단서까지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프로이트와 결별하면서 융은 자신만의 새로운 치료법을 발전시키기 위해 우선 진료실의 가구들을 바꾸고 재배치한다. 프로이트식의 ‘말하게 하기’에 필요했던 의자와 소파에서, ‘대화’를 위한 테이블과 의자로! 테이블의 위치는 동등하다. 융은 그 테이블에 앉기 전 마음속으로 ‘난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을 되뇌었다.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다.

 




융의 실험, 변증법적 대화방식
융은 이러한 정신치료에서 대화의 방법을 좀더 진척시키고 구체화한다. 그것은 ‘변증법적 대화방식’! 변증법은 치료자가 아이를 잘 낳도록 이끌어 주는 ‘산파’처럼, 질문과 대답을 계속하면서 환자로부터 ‘생각을 이끌어내는’ 대화 방법이다. 변증법은 원래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나온 개념으로, 특정 주제에 대해 어떤 입장(正)과 그에 대항하는 입장(反)을 가진 생각이나 의견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통해서 치료자와 환자가 인정할 수 있는 더 나은 이해(合)에 이르는 방법이다.

이 상호적인 과정에서 치료자는 환자의 병을 고쳐주는 사람이 아닌 환자와 함께 발전적 치료를 경험하는 자가 된다. 환자뿐만 아니라 치료자 역시 발전적 과정에 참여한다. ‘전이’와 ‘역전이’를 통해서다. 환자가 치료자에게 무의식적인 감정, 신념, 욕망 등을 느끼는 것을 ‘전이’라고 하고, 반대로 치료자가 환자에게 감정을 느끼는 것을 ‘역전이’라고 한다. 전이는 환자가 치료자에게 부여하는 모든 투사의 총합이다. 환자의 문제는 치료자에게 투사가 일어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게 된다. 그때 감정은 활성화되고 상황에 맞지 않는 체험과 행동이 일어나기도 한다(전이). 이 과정에서 치료자는 환자를 싫어하는 감정이나 과잉애착, 과잉 관여로 나타나기도 한다(역전이). 그러므로 문제 해결의 과정은 환자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다. 융은 자신의 정신치료를 대화를 통한 변증법적 과정으로 보았고, 치료자와 환자의 서로 다른 두 정신체계가 상호작용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정신성으로 나아가게 된다. 각자의 고유한 정신체계 내에서 새로운 ‘변환’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치료자는 미리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

 

내가 개별적인 인간의 정신치료를 하고자 하는 한, 좋든 싫든 간에 모든 권위, 영향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나 내가 더 잘 안다는 온갖 마음들을 포기해야만 한다. (..) 서로의 소견을 비교하는 변증법적 방법을 택해야만 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나의 전제로 인해 제약받지 않고 그의 소견을 완전히 표현하는 기회를 갖게 해줌으로써 가능하다. (융 저작집 1권’『정신요법의 기본문제』 16쪽)

 


융의 정신치료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편견이 없는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이전 것을 포기하는 자세, 판단중지이다. 바꾸어 말하면, 치료자는 이미 알고 행동하는 주체가 아니고, 개인의 발달과정에서 알아가는 자, 깨달아가는 자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 스스로 ‘치유의 힘’(자기)이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융은 분석가 자신도 분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고유한 인격을 도외시한 채, 권위로써 환자를 해석할 수도 없고, 인도할 수도 없고, 치료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치료자와 환자가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치료자와 환자는 서로에게 우월한 자도, 많이 아는 자도 아니고, 그저 함께 깨달아가는 자로서 동등한 존재가 된다.

그 과정에서 치료자가 조심할 것이 있다. 섣부른 충고나 조언을 하지 말라는 것. 일반화된 정해진 해결책은 없기 때문이다. 융은 “지금까지 보편타당한 심리학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기질들이 있고, 특정한 틀에 맞출 수 없는 개별적인 정신이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그렇다고 말한다. 융은 이어서 정신치료에서 치료자가 너무 확실한 목표를 갖지 않기를 권유한다. 치료자는 환자의 본성과 환자의 삶의 의지보다 더 잘 알 수 없고,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결정은 대체로 의식의 합리성에 의하기보다는, 본능과 그 밖의 비밀에 가득 찬 무의식적 요인들에 의해 훨씬 많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에게 맞는 신발이 다른 사람에게는 꼭 끼는 것과 같다(같은 책, 43쪽).


의사, ‘함께 체험하는 자’
치료자는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함께 체험하는 자라는 점이 융의 독특한 지점이다. 치료자의 체험이란, 단지 환자가 느끼는 것을 연민하거나 공감하는 것과는 다르다. 체험은 치료자 자신이 한 명의 동등한 환자로서 참여하는 것이다. 융은 함께 찾아가는 과정을 중시한다. 그 과정에서 환자 스스로 해결하는 힘이 길러지게 되기 때문이다. 정신치료는 각자의 맥락에서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이다. 치료자는 환자를 위로하거나 승인해서도 안 된다. 환자는 이미 기댈 준비를 하고 오기 때문에, 섣부른 친절함은 환자에게 혼자 해결할 능력을 잃게 만드는 독이 될 수 있다.

 

치료자가 하는 일은 치료라기보다는, 오히려 환자 자신 속에 잠재해 있는 '창조적인 싹'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융 저작집 1권’『정신요법의 기본문제』 44쪽)

 


치료자는 행동하는 주체가 아니고, 개인의 발달과정에서 함께 체험하는 자(Mitterlebender)(같은 책, 19쪽) 이다. 치료자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다. 한편, 치료자는 환자를 위해서 치료의 역할을 하지만, 그 치료는 환자가 자기 자신을 치료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치료자는 자신을 새롭게 함으로써 환자를 새롭게 한다. 치료자와 환자 각자가 잠재적으로 갖고 있는 창조적인 싹이 상호간에 작용을 일으켜 치료자와 환자 자신의 정신을 새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 작용은 상호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는 치료자의 역할과는 크게 다르다. 치료자는 의학 지식이 있어서 적절한 처방을 내려주는 것과는 다르다. 치료자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환자의 문제를 자신 안에 불러내고, 함께 참여하는 장을 생산하는 능력, 바로 환자와 함께 '작용'을 일으켜가는 능력이다. 치료의 목표는 답이 아니라, 매번의 삶의 맥락에서 새롭게 스스로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이다.

 



융의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오늘날 우리의 진료현장을 돌아보게 한다. 사실 우리의 진료상황은 의사의 '일방적 말하기'와 치료지침을 전달하기가 있을 뿐이다. 그것도 지극히 제한된 시간에 말이다. 융은 '진정한 대화'를 말한다. 치료자와 환자 사이의 진정한 ’대화‘는 각자의 창조적인 싹을 발견하고 그것을 상호소통하면서 키워가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업(業)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하게 된다. 사실 돌이켜보면 나도 환자들로부터 엄청나게 많이 배우고 있음을 고백한다. 나의 오류와 실패로부터 배운 경우도 적지 않다. 융에 의해 제시된 진정한 '대화'를 통해서 함께 체험하는 자라는 의사의 모습은 100여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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