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이별 나쁜 이별
나의 집은 오래된 3층짜리 주택이다. 우리가 살지 않으면 허물어 새집을 지어야만 하는, 12개의 방과 12명의 사람들이 있는 집. 5년 전 레아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이 집을 찾고 사람을 모아 셰어하우스를 시작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이 필요에 의해 이 곳에 모이고 떠나가 지금 내가 이곳에 산다. 각자 사느라 바쁘면서도 우리는 같이 사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서로의 시간들을 경험한다.
내가 이사 온 이후로 집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집을 허물고 새집을 지어 비싸게 세놓으려 했던 집주인이 치솟는 물가 탓에 집을 유지하기로 결정했고, 당분간 우리 12명은 집을 구할 필요가 없을 만큼의 넉넉한 기간을 재계약했다. 그리고 가장 오래 살았던 미키와 캐시가 이사를 가 가일과 레오가 들어왔고, 나와 앞, 옆방을 마주하는 쿠쉬와 필리페는 본국으로 장기 휴가를 가 그 기간 동안의 단기세입자 다니와 발렌티나가 새로 들어왔다. 그리고 A가 쫓겨났다.
A는 영화를 공부한다고 했다. 내가 이사를 온 직후, 한동안은 그를 볼 수 없었다. 다른 애들에게 A가 어디에 갔냐고 물었는데, 그의 개인적 문제 때문에 잠시 집을 비웠다고 했다. 몇일 뒤, 부엌 문을 열자 A가 있었다. 반가웠던 나는 활기찬 인사를 건네고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이 집의 또 다른 플랫메이트인 B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셋이 창가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나는 A의 눈이 유독 빨갛다고 생각했다. 차를 잡은 손이 덜덜 떨린다는 것도. 그러다 B가 나에게 A와 둘이 잠시 이야기해도 괜찮냐고 했다. 그러라고 한 뒤, 담배를 피면서 책을 읽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A가 소리를 지르며 들고 있던 잔을 바닥에 던졌다.
그때 알게 되었다. A가 B에게 관심을 보였고, B가 거절을 한 뒤로부터 A가 폭력적으로 굴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래서 A가 집을 비웠었다는 사실을.
A는 위태롭게 굴었다. 방에서 노래를 크게 틀었고, 밥을 먹을 때는 술이 함께였다. 잠을 안 잤고, 눈이 새빨개진 채로 부엌에서 대마초를 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그를 만날 때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말을 걸어 밥을 먹었는지, 잠은 잘 자는지에 대해 물었다. 가해자한테 잘해주는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이상했지만, 네가 어서 괜찮아져서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하지만 A에 대한 또 다른 사실은 그가 항상 상냥했다는 것이다. 내가 터키 전통방식으로 차를 내리는 걸 신기해하자 차를 대접해준다거나, 자기가 만든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어느 날은 이 도시에서 억울하게 사고를 당해 죽은 사고 피해자를 추모하는 행사에 간다고 했고, 어느 날은 자신의 트렌스젠더 친구가 최근에 태국에서 성전환 수술을 마치고 돌아와 그 축하파티에 간다고 했다. 진심으로 그녀의 성전환을 기뻐하던 A의 얼굴이 나를 자꾸 어렵게 만들었다. 만약 내가 컵 던지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면 덜컥 그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조건을 A는 잔뜩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느꼈다. 아직도 내가 얼마나 사람을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싶어하는지.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사는 일은 언제나 생과 사가 엎치락뒤치락했고, 모든 사람에게는 좋은 면과 나쁜 면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세상을 흑과 백으로 이해하는 게 더 이상은 부족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느 날은 그렇게 생각하며 사는 게 쉬우니까 그것에 기대 살고 싶고 그랬다. 어떤 상황을 기꺼이 이해하기엔 내가 가진 언어가 너무 부족했다.
어느 날 1층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는데 3층에서 B가 소리를 질렀다. 올라가보니 B와 A가 몸싸움을 하고 있었고, 3층에 사는 다른 룸메이트들이 나와 둘을 말리고 있었다. B는 소리를 듣고 올라온 애들에게 방금 A가 내 방에 들어와 옷장과 침대를 뒤집었다고, 더 이상은 못 참겠다고 했다. 우리는 A에게 당장 나가달라고, 가능한 빨리 이사해달라고 했다. A는 곧바로 집을 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부엌에 모여 담배를 피며 B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죄책감이 느껴졌다. A가 이렇게 군지 몇 달이나 되었는데, 우린 결국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왔던 거 아닐까 하면서. 생각해보면 그게 최선이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게 정말 최선이었냐는 물음이 끊이질 않았다. 나는 조금 멍해져 담배를 말았다. 옆에서 담배를 피우던 애들은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있는 남자애들 차례로 나가면 여자애들만 받아서 여자 셰어하우스로 만들자고. 다들 웃었다. 나도 웃었다. 웃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밤이었다. 살면 살수록 유머가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는 걸,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을 웃어넘기며 사는 것이 가장 최선이라는 걸 알아가게 된다. 그날 밤 나는 A의 불행한 가정사와 몰랐던 이야기를 조금 들었다.
A가 떠난 주, 집에 가장 오래 살았던 캐시가 떠났다. 캐시는 A가 폭력적인 행동을 보일 때마다 그와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멘탈 클리닉 예약을 잡아주고, 당장 경찰을 부르자던 다른 플랫메이트들을 진정시키고 설득했던 사람이다. 그는 베를린으로 떠난다고 했다. 그의 이별파티에는 많은 사람들이 왔다.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친구와 노래를 부르는 친구가 그녀를 위해 노래를 시작했다. 그 장면에서 나는 눈물이 좀 날 것 같았다.
I'll follow you into the park. Through the jungle, through the dark. Girl, I've never loved one like you. Moats and boats, and waterfalls. Alleyways, and payphone calls. I been everywhere with you. Laugh until we think we'll die. Barefoot on a summer night. Never could be sweeter than with you. Oh, home, let me come home. Home is whenever I'm alone with you.
널 따라 공원에도 정글에도 어둠에도 갈 수 있다고. 우리가 죽을 것 같을 때까지 웃자고. 내가 너와 있는 모든 곳이 집이라고 하는 이 가사를 들으며 내가 캐시라면 떠나는 일은 무섭겠지만 종종 두렵지 않은 기분이 들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날 밤 울어도 좋을 것 같았던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A가 떠났던 밤이 떠올랐다. 그 밤은 웃지 않으면 너무 괴로울 것 같았는데, 캐시의 밤에는 애쓰지 않아도 웃을 수 있었고, 눈물도 조금 흘렀고, 춤을 추며 노래도 불렀다.
A에게는 내가 모르는 모습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의 삶 어느 순간에는 그도 누군가를 웃게하고 행복하게 만들었을 테다. 하지만 나는 기꺼이 그가 나빴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를 아프게 했던 일들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 기꺼이 그것이 아프고, 슬프고, 나빴다고 말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나에게는 있다.
파티가 끝난 뒤, 캐시가 떠나고 A가 이사 간 뒤에도 B는 한동안 아팠다. B는 A에게 세게 잡혀 파래진 손목을 보여주었다. 그 애는 밥도 잘 먹지 않았고, 방문을 잠그지 않으면 잠을 못 잤다. 담배를 피우러 부엌에 내려올 때마다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화가 나서 괴로운 사람의 얼굴이었다.
결국 사건 이후의 고통은 피해자의 몫인 걸까? 나는 맞다고도 아니라고도 대답하지 않을 것 같다. 그저 매일 매일 그 애의 안부를 묻고, 끼니를 걱정하고, 가끔은 술을 마시고 함께 취해 춤을 추러 가며 그 애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건강해지길 바란다. 그리고 다시 보통의 날을 보내며 그 애가 그때 얼마나 용감했는지를 종종 떠올릴 것이다. A가 떠난 밤, 그래도 걔를 몇 대 때릴 수 있어서 너무 속 시원했다고, 너희가 그게 과했다고 말한다면 집을 나가버릴 거라고,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일이 처음이었으니 너희를 미워하지 않을 거라 말했던 B의 마음들을.
서로의 시간을 겪으며 여기가 내 집인가 싶은 날들이 늘어간다.
글_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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