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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주역 시즌 3

[내인생의주역시즌3] 뇌수해(雷水解), ‘해(解)’와 ‘답’은 다르다!

by 북드라망 2024. 4. 23.

뇌수해(雷水解), ‘해(解)’와 ‘답’은 다르다!

 

䷧  雷水解(뇌수해)
  
解, 利西南, 无所往, 其來復吉, 有攸往, 夙吉. 해, 리서남, 무소왕, 기래복길, 유유왕, 숙길.
해괘는 서남쪽이 이로우니 나아갈 필요가 없다. 와서 회복하는 것이 길하니 나아갈 바를 둔다면 서둘러 하는 것이 길하다.
 
初六, 无咎. 초육, 무구.
초육효, 허물이 없다.

九二, 田獲三狐, 得黃矢, 貞吉. 구이. 전획삼호, 득황시, 정길.
구이효, 사냥하여 세 마리 여우를 잡아 누런 화살을 얻으니 올바름을 굳게 지켜서 길하다.

六三, 負且乘, 致寇至, 貞吝. 육삼, 부차승, 치구지, 정린.
육삼효, 짐을 져야 할 소인이 수레를 타고 있는 것이라 도적을 불러 들이니 올바르더라도 부끄럽게 될 것이다.

九四, 解而拇, 朋至斯孚. 구사, 해이무, 붕지사부.
구사효, 너의 엄지발가락을 풀어 버리면 벗이 이르러 이에 진실로 미더우리라.

六五, 君子維有解, 吉, 有孚于小人. 육오, 군자유유해, 길, 유부우소인.
육오효, 군자만이 오직 풀 수 있어 길하니 소인들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上六, 公用射隼于高墉之上, 獲之, 无不利. 상육, 공용석준우고용지상, 획지, 무불리.
상육효, 공이 높은 담장 위에서 매를 쏘아 맞히어 잡으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

 

 

“마치 오랫동안 모든 것을 닫아 걸었던, 겨울이 지나고 갑자기 봄의 생명을 만나서 천지의 응결된 것이 풀어지고, 우레와 비의 고요한 것이 일어나며, 만물의 싹이 터지는 것과 같다. 위대하다, 풀려남의 때여, 기쁘구나, 풀려남의 때여!”(정이천, 『주역』, 글 항아리, 809쪽)

 


『주역』에는 고난과 시련으로부터 ‘풀려남’을 이야기하는 괘(卦)가 있다. 바로 뇌수해(雷水解)괘다. 해(解)의 모습은 움직임[動]을 상징하는 진괘(震卦)가 위에 있고, 위험[險]을 상징하는 감괘(坎卦)가 아래에 있다. 위험에서 벗어나 움직이고 진동하는 것이 해(解)의 모습이다. 고난과 시련에서 벗어났으니 어찌 기쁘게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추운 겨울이 지나고 갑자기 봄의 생명들이 터지는 이 위대함! 이처럼 해(解)의 때를 표현할 수 있다니! 지난 4월, 내 기분이 딱 그러했다. 오랜만의 산책! 아침 일찍 남산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봄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고, 주위에는 어느새 피어난 꽃과 나무들이 나를 반기는 듯 했다.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남산의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키니 마치 오랫동안 닫아 걸었었던 답답함이 가슴안에서 탁! 하고 시원하게 터지는 것 같았다.

매년 맞이하는 봄이지만, 이번 봄이 유독 내게 기뻤던 이유는 코로나19로부터 조금은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2022년 4월, 그동안 매섭게 치고 올라가던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눈에 띄게 감소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정부의 방역 수칙도 낮은 단계로 내려갔다. 그리고 얼마 뒤 ‘사회적 거리두기’가 전면 ‘해제’되었다. 사적 모임의 인원수 제한은 물론이고, 자영업자들의 영업시간 규제도 풀리게 되었다. ‘정말이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코로나19가 발생한 지 2년 1개월. 참으로 길고 긴 시간이었다. 자, 이제는 팬데믹 이전의 일상으로 서서히 회복해 가야 할 때다! 『주역』에서는 이때를 어떤 마음으로 겪어야 하는지 해괘(解卦)를 좀 더 들여다보자.

 



정이천 선생님은 『서괘전』을 통해 해(解)의 때를 “어떤 것도 끝까지 고난에 처할 수는 없으므로, 풀려남을 상징하는 해괘로 받았다.”(같은 책, 792쪽) 라고 말한다. 무엇이든 ‘정점’에 오르고 나면 반드시 아래로 내려오게 되는 법! 이것이 자연의 ‘이치’이자 『주역』의 원리다. 아직은 실내에서 마스크를 벗는 것이 어색하기는 했지만, 모두가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남산에 올랐다. 공교롭게도(?) 해(解)괘의 괘사(卦辭)는 “서남쪽이 이롭다.”[利西南]고 한다. 『주역』에서 서남쪽은 여덟 개의 소성괘(小成卦) 중 곤괘(坤卦)의 방위(方位)다. 곤(坤)의 방위는 평탄하고, 안전하며 편안한 장소를 의미한다. 일부러 일을 벌이기보다는 남산을 산책하듯 편안한 곳에서 몸과 마음을 쉬어 가는 것. 이것이 해(解)의 첫 스텝이다.

코로나19가 고단했던 이유는 아무래도 단절되고 고립되는 듯한 일상이 깊어졌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 때문인지 방역이 해제되면서 산책뿐 아니라 친구들을 만나느라 무척이나 바빴다. 이제는 카페나 식당을 이용할 때 방역 QR 코드 인증을 받기 위해 휴대폰 어플을 부랴부랴 키거나, 체온측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네 명이 따로 만나거나, 밤 9시면 아쉬움을 뒤로한 채 헤어질 필요도 없었다. 주말에는 회사 동료들과 야구 경기를 관람하기도 했고, 생전 가보지도 않았던 가수 콘서트도 다녀왔다. 예전에는 애를 써서 조마조마해야 할 수 있었던 일들이었는데… 팬데믹 이전의 일상이 소중했음을 매 순간 느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코로나19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편안한 일상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새벽 2시, 어두컴컴한 지하 노래방에서 정체를 드러냈다. 그날 내 앞에서는 동료들이 서로 얼싸안고 노래방이 떠나갈 듯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코로나 방역이 우리의 일상을 억압했고, 억눌렀다고 생각한 탓인지 방역이 해제되자마자 우리는 먹고 마시는 식욕부터 해제시켰다. 퇴근 후 고깃집으로, 횟집으로, 노래방으로 … 이제는 음주와 가무를 방해하는 벽이란 없다! 더 이상의 방역 따위는 없었고, 코로나19의 일상도 잊은 듯 했다. 그런데 자꾸만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만 같은 이 기분은 대체 뭐지? 나와 모두가 원했던 현실 아니었나? 살짝 불안감이 들면서도 코로나 방역이 풀린 이때 먹고 마시는 일 말고는 딱히 할 게 없다고 여겨지기는 했다. 도대체 나는, 아니 우리의 삶은 이대로 괜찮은 걸까.

뇌수해(雷水解)괘를 이루고 있는 여섯 효사(爻辭)의 핵심은 ‘유유왕. 숙길.’(有攸往, 夙吉)이다. 숙(夙)이란, ‘일찍, 서두름’이라는 뜻으로, 일부러 일을 벌이지 말아야 할 때이지만 마땅히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면 서둘러야 ‘길(吉)’하다는 의미다. 우리가 또 다시 팬데믹을 겪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더 바랄 것 없는 편안한 일상을 그저 ‘느슨’하게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팽팽’하게 잡아 당겨야만 한다.

나는 구사효(九四爻)의 유유왕 숙길(有攸往, 夙吉)을 통해 느슨해진 일상을 당기고자 한다. 해(解)괘의 구사효가 반드시 숙(夙)해야 하는 것은 ‘해이무(解以拇)’, 즉 엄지발가락을 풀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엄지발가락이란, 구사효와 응(應)하고 있는 초육효(初六爻)를 말한다. “위의 자리에 있으면서 소인과 친밀하면, 현인과 바른 선비가 멀리하여 물러난다. 소인을 배척하여 버리면 군자의 무리가 나아가 진실하게 서로 뜻을 얻을 것이다.”(같은 책, 804쪽) 소인과 친밀하다는 것은 내가 여전히 팬데믹이라는 고난과 시련을 만들어 낸 일상에 매여있다는 뜻이다. ‘풀려남’의 때의 구사효는 진괘(震卦)의 양효(陽爻)로써 위험[坎卦] 밖에서 진동하는 주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코로나19의 근본적인 문제와 마주해야 하고, 그 원인을 풀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데, 자꾸만 사사로운 자신의 욕망과 관계하는 꼴이다. 코로나19의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이었던가? 코뿔소, 원숭이, 박쥐 등 생태계를 파괴하면서까지 먹어야 하는 인간의 무차별한 ‘식욕’ 때문이었다! ‘생태계 파괴, 결국은 인간의 탐욕과 무절제함이 부른 참사다.’(최재천 외 6인, 『코로나 사피엔스』, 인플루앤셜, 19쪽) 즉. 지금 나와 회사 동료들이 식욕을 증폭시키며 절제하지 못하고 있는 욕망이 팬데믹을 불러들인 것이다.

 



그렇구나! 내가 느끼는 불안감의 정체란 바로 식욕이었구나. 마땅히 ‘소인’을 풀어버려야 할 때인데, 소인을 깊은 곳에서 끌어 올리고 있었구나. 만나서 먹고, 마시는 일에만 열중한 나머지 코로나19를 불러들인 원인을 망각해 버리고 있었다. 노래방을 나온 뒤 나는 불안감에 동료들에게 물었다. “이러다 코로나에 또 걸리면 어떡해?!” “백신 맞고, 격리하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동료들은 백신과 약만 있으면 아무런 걱정이 없어 보였다. ‘불안감의 원인으로 인해 또 다른 팬데믹이 오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내 마음을 감싸고 있음을 알았지만, 솔직히 동료들의 말에 내심 동의했다.

구사효(九四爻)는 양(陽)이기 때문에 사사로운 욕망이 또 다른 바이러스를 불러올 것이라는 확신이 강하다. 그런데 계속해서 위태롭다. 왜일까. 그것은 자리가 음(陰)해서 위[位]가 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서 있는 배치가 먹고, 마시는 욕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위태롭다. 이 위태로움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백신과 약, 방역으로만 처방하려 한다. 자신의 욕망은 그대로 놓아둔 채 외부의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는 마음. 이 마음이 소인을 배척하지 못함이다. 우리에게 백신과 약이 정말로 팬데믹으로부터 ‘풀려남’이 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그것이 ‘해(解)’일 수 있을까.

문제와 마주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답’ 다른 하나는 ‘해(解)’다. 답이 문제에 대한 적합한 조건이자 대처하는 수단이라면, 해(解)는 문제 그 자체를 풀어버리는 것, 다시 말해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다. 우리가 팬데믹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외부의 수단과 대처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쓰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 방역과 약은 그저 코로나를 대처하는 ‘답’일 뿐이다. 삶을 잠식해가는 식욕을 풀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해(解)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욕망을 다르게 쓸 수만 있다면 또 다른 바이러스가 오더라도 삶을 억압하고 침해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유유왕, 숙(有攸往, 夙)이 길(吉)할 수 있는 이유고, ‘해(解)’와 ‘답’이 다른 이유다.

집에 도착하니 새벽 3시였다. 피곤함에 찌든 몸을 침대에 뉘었을 때, 문득 “나는 왜 먹어야지만 사람들과 관계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사실 거의 모든 관계의 중심이 식욕이다. 코로나 이전이나 지금이나 먹고 마시는 관계는 여전하다. 아니, 더 폭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왜 지난 2년 1개월간 그토록 그리워했던 사람들과 만나서 먹고 마시는 것밖에 하지 않을까. 먹지 않고서는 친구[朋]를 사귈 수 없나? 그렇다고 식욕을 뺀다면 아무런 관계가 형성되지 않을 것이다.

식욕을 풀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관계의 ‘빈곤함’ 때문이다. 식욕은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욕망이다. 하지만 요즘은 먹으면 먹을수록 관계의 허기가 진다. 만남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정말이지. 먹기 위해 만나는 것만 같다. 하지만 공부로 삶을 나누는 관계에서는 조금 다르다. 물론 그곳에서도 먹고 마시는 욕망이 작동하기는 하지만 결코 취하거나 중독되지 않는다. 만남 그 자체에 마음을 쓰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붕지사부(朋至斯孚)란, 구사효가 엄지발가락을 풀어버렸을 때 오는 진실한 친구들을 말한다. 먹지 않아도 서로의 삶을 나눌 수 있는 관계야말로 진정한 벗이 아닐까. 나에게도 언젠가 회사에서 붕지사부(朋至斯孚)하는 날이 오길 바란다.

 

 

글_ 고영주(글공방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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