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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주역 시즌 3

[내인생의주역시즌3] 지성을 연마하라, ‘썸씽’이 생기는 그날까지 (2)

by 북드라망 2024. 5. 8.

지성을 연마하라, ‘썸씽’이 생기는 그날까지 (2)

 

䷞ 澤山咸(택산함)

咸, 亨, 利貞, 取女吉. (함, 형, 리정, 취녀길)
함괘는 형통하니 올바름을 지키는 것이 이롭고, 여자에게 장가들면 길하다.

初六, 咸其拇. (초육, 함기무)
초육효, 엄지발가락에서 감응한다.

六二, 咸其腓, 凶, 居吉. (육이, 함기비, 흉, 거길)
육이효, 장딴지에서 감응하면 흉하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길하다.

九三, 咸其股, 執其隨, 往吝. (구삼, 함기고, 집기수, 왕린)
구삼효, 넓적다리에서 감응한다. 지키는 바가 상육을 따름이니 나아가면 부끄럽다.

九四, 貞吉, 悔亡, 憧憧往來, 朋從爾思. (구사, 정길, 회망, 동동왕린, 붕종이사)
구사효, 올바름을 굳게 지키면 길하여 후회가 없어진다. 초육에게 왕래하기를 끊임없이 하면 친한 벗만이 너의 생각을 따를 것이다.

九五, 咸其脢, 无悔 (구오, 함기매, 무회) 
구오효, 등에서 감응하니 후회가 없으리라.

上六, 咸其輔頰舌 (상육, 함기보협설) 
상육효, 광대뼈와 뺨과 혀에서 감응한다.

 


허수인(虛受人)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원시 사회에서 남성들은 반드시 성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다. 이 의례의 핵심은 자아의 상징적 죽음을 체험하는 것. 어엿한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몫을 다하고, 온전한 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건 자아를 벗어나 타자의 세계로 나아가고 타자를 받아들이는 일에 달려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여성들은 이 의례에서 제외되었다. 여성을 천시해서? 아니, 정 반대다.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한다. 그러니까 여성은 생리적으로 타자를 자신에게 받아들이고 품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 하여 여성은 따로 통과의례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모성의 위대함도 여기에 있을 게다. 자신을 내려놓고 온전히 타자를 품을 수 있는 힘. 그렇게 세상의 모든 존재와 감응할 수 있는 능력. 

연구실(남산 강학원)의 공부는 이런 통과의례와 닮아있다. 책을 읽는다는 건 그 책과 감응하는 일이다. 저자의 질문을, 사유를, 그 마음을 내 안에 받아안는 일인 것이다. 이렇게 타자를 마음에 들여놓을 때, 거기서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세상이 열린다. 배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여 공부한다는 건 곧 나를 비우는 훈련이 된다. 그런데 때때로 이 감응이란 것이 문제가 되곤 한다. 책과 감응하라는 것을 단순히 내가 공감되는 부분을 찾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감응과 공감은 다르다. 공감은 저자의 생각에 대해 자신도 그렇다고 느끼는 일종의 동의다. 이런 동의는 대부분이 자기 투사이자 자기 확인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너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라는. 하여 저자로부터 자기 생각을 다시 확인받는 게 공감이다. 우리는 이런 공감을 가지고 책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런 이해는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재인식일 뿐 배움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감응이냐고? 간단하다. 자신을 내려놓게 만들 때, 그게 감응이다. 통과의례의 상징적 죽음 체험, 그것이 책읽기다. 프란츠 카프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다만 우리를 깨물고 찌르는 책들을 읽어야 할 게야.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라고? 맙소사,……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프란츠 카프카,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서용좌 역, 솔, 70쪽) 정화 스님이 말씀하셨듯, 이해할 수 있는 걸 이해하는 것은 이해하는 게 아니며, 사랑할 수 있는 걸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 타자성과의 공명, 그게 감응이다. 

주역은 감응에 대한 오해를 경계하며 이렇게 말한다. “동동왕래, 붕종이사(憧憧往來, 朋從爾思), 초육에게 왕래하기를 끊임없이 하면 친한 벗만이 너의 생각을 따를 것이다.” 여기서 친한 벗이란 좋은 의미로 쓰인 게 아니다. 사효는 초효와 응하고 있는데, 함괘에서 이 응함은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 주는 사람들과만 함께하려는 모습이다. 이렇게 되면 관계의 장이 편협해질 수밖에 없다. “친한 벗만이 너의 생각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사효는 무엇보다 이를 조심해야 한다. ‘나’라는 것을 붙잡고,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만나려 해서는 안된다. 나로 그득한 마음, 거기에 들어올 수 있는 건 친한 벗, 요컨대 또 다른 나일 뿐이다. 

감응하는 공부에 대한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지성’에 대한 착각이다. 우리가 학창시절 내내 하는 공부는 정답을 고르는 일이다. 지적 능력은 정답의 개수와 비례한다. 감응? 그건 배부른 소리다. 뭐가 되었든 틀린 답을 고르면 말짱 도루묵이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 나는 2004년에 다시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수능을 봤다. 그런데 언어영역이 영 점수가 나오지 않았다. 일단 문제의 개수가 너무 많았다. 정해진 시간 내에 주어진 지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그래서 인터넷 강의를 수강했는데……와우, 신세계였다. 어떤 접속사가 나오면 그다음 글은 읽을 필요도 없는지, 어떤 표현들이 주제를 담을 확률이 높은지, 혹은 우선 빠르게 문제들을 읽고 나중에 지문을 읽으며 어떻게 필요한 정보들만을 캐치해내는지 등. 거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문제 풀이 비법들이 넘쳐났다. 입시를 준비하는 일 년간 난 그렇게 정답 맞히기의 테크닉을 끝없이 훈련해야 했다.

나는 이 정답 맞히기 게임을 연구실에서 다시 만났다. 연구실 청년들 때문이었다. 이 친구들 대부분은 글을 쓸 때 어떻게든 틀리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내가 무얼 느꼈는지는 뒷전, 옳은 말을 찾고, 정답을 쓰려 한다. 자기 속내가 어떻든, 자기 마음이 어떻든 이쯤에서 해줘야 하는 말, 연구실에서 자주 듣게 되는 말, 그런 그럴싸한 말들로 글을 채워오는 것이다. 결과는? 뻔하다. 생기 없는 글, 맞는 말이지만 지루한 글이다. 이런 글을 읽노라면 곤욕스럽다. 하지만 누구보다 힘든 건 그 글을 쓴 청년들일 게다. 책과 아무런 감응도 없었는데, 마음이 그렇게 열리지 않았는데, 무엇을 얘기할 수 있겠는가. 쥐어짜듯 해야만 하는 말들을 쓰고 있는데 어찌 공부가 재미있겠는가. 그래서 난 그런 글을 볼 때면 묻곤 한다. 뭐가 재미있었냐고. 그럼 그 친구들은 곧잘 대답한다. 이런 부분이 신기했고 신선했다고, 이런 부분이 마음에 와닿았다고. 그 말들은 글과 달리 생기가 있었다.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말, 하여 진솔한 말에는 활기가 있는 법이니까. 

 

 

 

청년들의 이런 모습은 비단 글쓰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공동체 활동도, 친구들과 보내는 일상도 청년들에게는 틀리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 되곤 했다. 그 친구들은 오해하고 있었다. 정답을 따라가면 삶이 충만해질 거라고. 해서 한 발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이게 맞는 걸까, 틀리면 어떡하지, 라며 가슴을 졸인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얻게 된 것은? 온갖 계산들이 머리에 가득 들어차 있어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상태! 청춘의 활기 대신 노쇠한 자의 무기력이 느껴질 정도다. “너무 일찍 늙어버린 청춘.” 난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의 청년들이 연애가 어려운 이유,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그토록 힘든 이유가 꼭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만은 아니지 않을까. 어쩌면 계속해서 배워온 것이 항상 맞는지 틀리는지만을 재고 따지는 사유여서 그러는 게 아닐까. 누군가와, 무언가와 접속하고 연결되는 그 감응의 마음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제대로 써 본 적도 없기 때문은 아닐까. 

주역의 우주가 필요하다. 느끼는 우주, 교감하는 우주, 감응하는 우주! 이 세계를 움직이는 활기는 느낌의 깊이에, 교감의 진실함에, 감응의 진솔함에 달려있다. 하여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의 도덕적 잣대가 아니라 마음의 참됨과 거짓됨이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거짓된 마음 앞에 옳은 것을 갖다 놓는다해서, 옳은 행위를 하게 만든다해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옳고 그름은 오직 마음의 진솔함 위에서만 이야기될 수 있다. 그렇기에 공자는 그 사특함 없는 마음을 배움의 중심에 놓았을 거다. 

택산함괘의 사효는 지성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만든다. 지성은 자기 확인도, 정답-오답의 두뇌 싸움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감응하는 힘이고, 허수인(虛受人)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지성은 이런 면에서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스스로 삶의 길을 낼 수 있다. 주어진 조건에 그대로 따라가거나, 단순한 자극-반응에 삶을 내맡기지 않는다. 주어진 것을 변주하면서 그것을 디딤돌 삼아 그 너머로 나아간다. 그렇기 위해서는 타자를 품어야 한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야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듯, 새로운 삶의 지평은 타자와의 감응 위에서 잉태되기 때문이다. 여기가 다름 아닌 지성의 자리다. 감응하는 지성, 삶을 생성하는 지성. 하여 에로스이기도 한 지성! 인간이 느끼는 근원적 기쁨 또한 이로부터 나온다. 하여 택산함은 인륜의 출발이고, 자신을 내려놓고 아랫자리에 처한 간괘의 지성이며, 그로부터 샘솟는 태괘의 기쁨을 표현한다. 

난 아무래도 당분간 청년들과 택산함의 공부를 두고 씨름할 거 같다. 물론 그 공부는 무엇보다 내 지성의 훈련장이 되겠지만 말이다. 여튼! 난 바란다. 우리 청년들이 정답의 강박에서 벗어나 삶의 활기를 되찾기를. 자아 너머의 그 광대한 세계가 주는 경이를 체험하기를. 하여 찐한 에로스의 기쁨을 향유하기를. 그렇게 우리에게 ‘썸씽’이 생기는 그날까지 지성 연마는 계속될 것이다. <끝>

 

 

글_근 영(글공방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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