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바다, 정치사상가 한비자 읽기 (13) : 정치사상가로서의 탁월성 ②
유가와 법가에 대하여
유가와 법가의 관계에 대한 세간의 흔한 오해는 유가의 인(仁)과 한비의 법이 배치된다는 생각이다. 인과 법은 상반된다고 하면서 늘 증거로 인용하는 『논어』의 구절이 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정령(政令)으로 백성을 인도하고 형벌로 백성을 똑같도록 하면 백성은 형벌을 피하기만 하려 들고 부끄러워함이 없을 것이다.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똑같도록 하면 부끄러워 할 줄 알고 선(善)에 도달할 것이다.’”[子曰:“(1)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2)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위정爲政」] 공자가 인을 강조한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법을 부정적으로 보았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공자의 말은 교묘한 수사를 구사한다. 1절과 2절을 대구로 놓아 2절의 주장을 더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각 절에서도 대구가 보인다. 1절에서는 정(政)과 형(刑)을 주요 개념으로 썼는데 정(政)은 형(刑)의 상위개념으로 형을 포괄하는 국가운영의 정책측면을 나타낸다. 2절에서 덕과 예를 가져와 정과 형에 대비시킨 것도 마찬가지다. 덕이라는 포괄적 원리에 예라는 좀 더 구체적인 작동규범을 동원했는데 여기엔 제도적 장치가 전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융통성 있는 말이다. 적어도 형벌이라는 구체적 처벌과 물리적 제재라는 측면이 약화되고 가려진 점은 분명하다, 공자는 정령과 형벌보다는 덕과 예라는 인정(人情)과 관용을 선호했음은 읽을 수 있다. 원문에는 “제지”(齊之)라고 했는데 “제민”(齊民)이라는 말로 백성을 대상으로 정치를 할 때 통상 쓰는 말이다. 전통시대 정치는 백성이라는 피지배계급을 다수의 집단으로 보고 이들을 균질화하는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백성을 주로 농업생산에 종사하도록 동일화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주희가 주석에서 제(齊)를 “일지”(一之)라고 풀이한 것도 이런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선진문헌에 두루 보이는 언어다.
표면적으로 읽으면 공자는 법가적 사고를 배척하고 덕정(德政)을 옹호한다. 덕은 형과 배치되도록 문장을 멋지게 썼고 상반되는 위치에 두었으니 그런 생각을 유도한다. 후대의 주석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이 말을 확대해 형벌 무용론까지 진행하는 해석은 말이 안 된다. 원칙으로서 덕정을 강조하되 형벌을 보조수단으로 써야지 본말(本末)이 바뀌는 게 문제라는 공자의 언명으로 보는 게 합당하다.
예상 가능하듯 유가는 인과 법이 배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사회를 유지하는 필수 수단으로서 법의 효율성을 간파하고 유가는 빠르게 법치를 제도화했다. 후대의 역사는 이를 증명한다. 유교는 인정(仁政)을 내세우지만 그 안에는 법이 자리 잡았다. 법가는 유가에 흡수된다. 유가에 정복당했다는 뜻이 아니라 유가에 들어가 살아남았다. 법의 객관성과 유교의 관대함이 서로 잘 얽힌 관계가 되었다. 유가의 승리란 말은 하나만 아는 말이다. 물과 기름이 잘 섞였다는 해설도 피상적이다. 유교에 스며든 법은 단단하다. 사회운영이라는 공적 원리에는 법이라는 제도적 장치가 필수다. 학파로서 법가는 사라졌다고 하겠지만 그들의 정신과 이상은 살아남았다.
인에 대한 한비의 비판은 인정(仁政)을 몰라서가 아니다. 인정의 기능을 폄하해서도 아니다. 인정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인정(仁政)이 최고통치자의 인정(人情)에서 나올 때 객관성의 원칙이 결여되기 때문이다. 최고통치자가 요순과 같은 성인일 때 인정은 실현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비가 심혈을 기울인 정치는 요순이라는 예외적 인물이 존재하는 이상공간이 아니라 보통 임금이 다스리는 현실정치였다. 한비는 법이라는 현실정치의 원칙을 훼손할 수 없었다. 인정(仁政/人情)이 나빠서가 아니라 법의 원칙과 상반될 때 인정(仁政)이 자의적으로 운영될 위험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한비는 이상정치의 함정을 간파했다. 노자 말대로 “국가는 신령스런 그릇이어서 인력으로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기”[天下神器, 不可爲也/『노자』 29장] 때문에 한비의 사고에서는, 국가를 확고한 원칙 위에 뼈대를 단단하게 세우지 않으면 다른 운영방식이 끼어들게 마련이고 이는 원칙을 해치는 데 이르게 된다.
법에 대한 한비의 통찰력은 유가들이 흔히 비난하는 냉혹함(인에 상반되는 원칙의 운용에서 비롯되는 나쁜 효과)으로 간단히 치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한비는 국가통치의 근본 문제로서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에 대해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고 해법을 내놓은 것이었다. 법은 하위범주나 수단이 아니다. 유가에서 말하는 선왕(先王)과 인정(仁政)은 사회원리의 근본으로서 통치철학을 표방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한비는 사회원리의 근본으로서 법을 정치철학으로 제시한 것이다. 인정이 유가의 정치철학이듯 법은 한비의 정치원리이기에, 둘은 동일한 차원의 정치사상으로 비교되어야 한다. 한비가 한 학파의 어떤 저술가나 학자가 아니라 정치의 근본을 사유했기에, 해서 남이 도달하지 못한 지점까지 나아갔기에 사상가로 우뚝하다. 큰 사상가의 그늘에서 기생하면서 설명하는 학자와 달리 사상가는 전인미답의 땅을 개척하는 사람이다. 유가가 한비를 극렬하게 배척한 이유는 법이 냉혹해서가 아니라 법이라는 수단을 정치사상으로까지 끌어올린 데서 인정(仁政)에 라이벌이 될 수 있음을 읽었기 때문이다. 유위(有爲)라는 관점에서 보면 유가와 한비는 다르지 않다. 유위(有爲)의 원칙이 유가에겐 덕정(德政)으로 이념화되었고 한비에게는 제도로서 더 구체화되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둘 사이의 차이가 크다면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비가 순자에게서 나왔다는 말이 전해지는 까닭은 바꿔 말하면 유가에서 법가가 탄생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잘못된 진술이 아니라 유가에 내장된 어떤 측면이 발현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은 지적해 두어야겠다.
한비는 명민한 사상가다. 오늘날 『한비자』를 읽어도 계발해 주는 바가 많은 까닭은 그의 사유는 근원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의 수단과 방법을 새로 알려준 게 아니라 정치철학으로 인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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