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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씨앗문장

감각하는 행위와 글쓰기

by 북드라망 2022. 5. 18.

감각하는 행위와 글쓰기

 

본다고 보이는 것이 아니요, 감각한다고 감각되는 것이 아니다. 보고 감각하는 행위는 관습과 개인의 습속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경험에 흠뻑 적셔지지’ 않는다. 혹은 경험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라 그 경험들을 감각적 논리로 번역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즉흥적으로 붓을 놀린다. 전자는 관습에, 후자는 감각에 복종한 결과다. 그러나 세잔은 복종을 거부한다. 예술가에게 복종의 문제는 정치권력이 아니라 자신의 습관과 연관된 문제다. 예술가에게 습관보다 더 지배적인 권력은 없다. 채운 저, 『예술을 묻다』, 177쪽, 봄날의 박씨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세상을 살아가며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같은 현장에 있더라도 각자가 인식하는 방식은 다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남편과도 자주 겪는 일. 분명 나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상대방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이쯤에서 나는 의문이 든다. 사물과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게 가능한 것일까?

 

인용문에서처럼 우리는 이전에 형성되어 온 “관습과 개인의 습속”대로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다. 나는 나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각자의 본성과 습관대로 세상을 인식하며 살아간다. 나를 한없이 끌어당기는 중력과도 같은 관습을 거부하고, 순간적인 감각에도 몸을 맡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여러 사건들을 겪으며 합의를 이룰 수 있을까? 결국 이것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아야, 그러니까 어떻게 '감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와 연결된다.

 

‘감각’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몇 년간 이어진 나의 글쓰기 편력이 떠오른다. 인문학 공부를 해오며 그동안 적지 않은 에세이를 썼다. 여기서 말하는 에세이란 고전을 읽으며 자기 삶과 연결해보는 행위다. 책을 읽고 글로 써 내려가는 것도 어쩌면 나라는 신체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표현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예술적 행위가 아닐지. 

 

어쨌든 공부를 갓 시작할 무렵 나는 수많은 ‘일기’를 썼다. 내 방식대로, 그저 내게 떠오른 대로 글을 썼다. 개인적 ‘습속’으로서의 글쓰기! 아니면 책과는 무관한 나의 감정을 배설한 글을 썼음을 고백한다. 책을 빌미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을 했다고도 할 수도 있겠다. 굳이 꼭 이 책이 아니어도 될 것 같은, 나와 텍스트와의 케미는 없었던 그런 느낌이다.

 

공부를 시작한 지 3년쯤 되었을까. 다시 글을 써야 하는 상황 앞에서 에세이 장원을 받은 선생님께 글쓰기 비법(?)에 대해 여쭤보았다. 그랬더니 하시는 말, “뭔가 텍스트를 계속 읽다 보면 커다란 덩어리처럼 비슷한 주제들이 묶이더라고. 최소한 3번을 읽어야 하고, 읽으면 읽을수록 다른 게 보여.” 나는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대로 해보았고, 그 해 글쓰기 대회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받았다. 

 

 

이제 와 떠올려보니 내게 조언해주신 선생님의 방법은 어쩌면 ‘세잔의 수련(修練)’과도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세잔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박물관 앞에서 자신의 견해를 비우기 위해,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산을 바라보았다고 한다.(같은 책, 176쪽) 글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기 위한 첫 번째 과정은 텍스트를 여러 번 읽으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관습과 습속”을 내려놓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즉흥적인 감정에도 치우치지 않았는지 자신을 의심해보아야 하며 “감각적 논리”인 언어로 풀어내야 한다. 글쓰기는 텍스트와 나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화학반응의 표현인 듯하다. 그와 동시에 텍스트가 주장하는 논리에도 무조건 호응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나의 이야기만을 하는 것도 아닌 그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책을 읽다 보면 같은 문장이라고 할지라도 어제와는 다른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필사해보거나 낭송하다가도 문득 새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는 끊임없는 운동 속에 있다"(같은 책, 172쪽)고. 정말 그렇다. '나'라는 개체와 '텍스트'라는 개체 모두 우주 안에 존재하는 것이니 늘 변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같은 문장이라 할지라도 나의 상황이 매 순간 달라지기에 결코 동일한 문장과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이 변화 속에서 유연하게 흐름을 탈 수 있는 힘을 말하는 것 같다. 앞에서도 계속해서 언급했던 것처럼, 과거의 습관에도 얽매이지 않고 즉흥적인 감각에도 빠지지 않은 채 말이다. 저자의 말처럼 ‘감각’ 또한 훈련 해야 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앞으로도 글쓰기 수행을 멈추지 않을 계획이다. 한 없이 작은 '나'라는 개체에 갇히지 않고 드넓은 '우주'적인 존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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