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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가 양생이다

[공동체가양생이다] 나는 공동체로 출근한다

by 북드라망 2021. 1. 21.

에코n 양생실험실 인문약방(링크)에서 활동하는 기린님의 새연재 '공동체가 양생이다'를 시작합니다. '공동체'를 만나 인생이 바뀐 이야기,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운영자인 저는 너무 재미있게 읽은 글들입니다. 기대해 주셔요!!


나는 공동체로 출근한다


 

설명하기엔 애매한

 

나는 시골에 홀로 사시는 어머니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이다. 나이는 오십이 넘었는데 시집도 못 갔지 안정된 일을 하는 것 같지도 않다. 내가 문탁에서 학생들과 수업도 한다는 얘기로 미루어 예전에 다녔던 학원 같은데 이겠거니 생각하신다.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졌을 때 어머니는 학원에서 월급은 주냐고 걱정하는 전화를 하셨다. 학원이 아니라 공동체라고 아무리 말해도 어머니는 뭐래니 라는 표정이다. 어머니뿐만이 아니다. 내가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가족은 물론 주변 친구들에게도 설명하기가 참 애매하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공동체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신문을 통해 소개되는 공동체 관련 기사도 열심히 읽었고 그와 관련한 책도 꾸준히 사서 읽었다. 새해가 되어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릴 때 소개된 공동체 방문해보기가 빠지지 않았다. 주변 친구들에게도 공동체를 만들어 같이 살자는 말을 곧잘 했다. 그럴 때 떠올린 공동체의 상은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살아간다는 정도였다. 책을 통해 문탁네트워크를 알게 되었을 때는 ‘그런’ 공동체를 실제로 경험해 본다는 생각에 좀 설렜던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와보니 만나는 사람들도 맞닥뜨리는 상황들도 낯설어 좌충우돌하기 일쑤였다. 처음이라 그런가 싶었지만 시간이 지난다고해서 익숙해지지도 않았다. 그러다보니 내가 그렸던 ‘그런’ 공동체의 상이 자꾸만 떠올랐다. 뜻이 맞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함께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래서 공동체에서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살아갈수록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여겼던 것들을 허물고 다시 익혀야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무리 익혀도 상황이 달라지면 또 헤맨다. 이 글은 그렇게 헤매면서도 여전히 공동체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의 이야기이다.



게을러터지다

 

나는 이십 대 대부분을 백수로 살았다. 드라마 작가가 되겠다고 교육원을 들락거렸고 작품공모 마감일 맞춘답시고 많은 것을 미루며 보냈다. 그렇게 쓴 글들이 예선도 통과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만두지도 못하고 계속 하지도 않는 시간만 죽이다 서른이 넘어서야 직업을 구했다. 학원 강사 일이었다. 경력이 없던 터라 영세한 학원에서나 나를 써주었다. 그마저도 수업을 못하네 성적이 안 오르네 등의 이유로 맡았던 반이 없어지고 잘렸던 적도 있었다. 연이은 탈락의 경험 때문에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할 수없이 종목을 바꾸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취향을 살린 독서 논술이었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고 성적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좋았다. 잘 해서 바닥을 치고 있던 자존감도 끌어올리고 싶었다. 기대에 차서 의욕을 가지고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에 불과했다. 독서는 나의 취향일 뿐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강제였다. 부모의 닦달에 억지로 읽어 온 내용으로는 할 이야기가 없었다. 학교 성적이 떨어지면 독서논술 수업부터 정리했다. 현실은 기대에 찬 내 마음 따위 안중에 없었다.

 

그래도 달이 차면 통장에 돈이 들어왔다. 결혼도 못하면서 뭐 해 먹고 살 거냐 걱정을 끊이질 않는 어머니에게 할 말도 필요했다. “학원 잘 다니고 있어요.” 그렇게 마지못해 하는 사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요령도 하나 둘 늘어갔다. 무조건 읽어야 한다고 다그치기 전에 읽고 싶게 하는 기술을 발명했다. 책에 나온 내용을 직접 따라해 보고 그 경험을 표현해 보자고 했다. 그러느라 계절을 느끼기 위해 학원 주변 동네를 싸다니고 수업 시간에 오미자를 담그기도 했다. 방학 중에는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볼만한 전시회를 찾아다녔다. 그런 활동의 경험을 살려 학생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 보는 시간을 만들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내가 맡은 수업이 재미없다는 피드백이 점점 잦아졌다. 내 딴에는 책을 읽고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문리가 트이도록 공을 들였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힘이 빠졌다. 선생님의 뜻은 알겠는데 아이가 너무 하기 싫어해서 어쩔 수 없이 수업을 그만하겠다는 소리를 지겹도록 들었다. 나중에는 재미라는 말만 들어도 울화가 치밀었다. 같은 책으로 수업하면서 나날이 수업 반을 늘려가는 동료를 시기질투 하는 내 자신도 한심했다. 그렇게 나의 한계와 직면하면서 때려치우지도 못하고 어영부영 시간은 흘러갔다.

 

수업이 줄어드는 만큼 학원에 안 나가는 날이 늘어났다. 다시 드라마라도 쓰겠다며 트렌드를 분석한다고 온갖 드라마를 섭렵하다가 새벽녘에 자고 오후에 일어나기 일쑤였다. 드라마 편수만큼 맥주 캔을 해치우며 안 그래도 뚱뚱한 몸이 나날이 불어갔다. 그즈음 한 웹사이트에 회원가입하면서 지은 별명이 ‘게으르니’였다. 너무 게을러터져서 살고 싶은 의욕까지 바닥을 칠 즈음 우연히 문탁을 알게 되었다.

 


백일 수행 프로젝트

 

예전부터 고미숙샘의 책을 즐겨 읽었는데 문탁도 그의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전화로 문의를 했더니 『논어』를 공부하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서 신청했다. 와서 보니 문탁샘이 튜터로 진행하는 앎삶세미나 였다. 텃밭울력이 있다는 공지를 보고 텃밭에도 가보고 등산동아리를 따라 광교산 등산도 시작했다. 등산길에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나의 일상도 밝히게 되었다. 문탁샘은 그렇게 밤늦게까지 깨어 있으니 아침에 못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셨다. 그 습관을 바꾸고 싶다면 매일 아침 문탁에 나와서 청소하고 공부하는 ‘불목하니’를 백일 동안 해보라고 제안하셨다. 솔깃했다. 뭐가 됐든 지금보다야 낫겠지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백일 수행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아침 여덟시에 문탁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밤새 가라앉은 눅진한 공기가 나를 맞이했다. 온갖 창을 열어젖히고 청소기부터 찾았다. 대강의실 구석 음향기기의 전선들이 온통 엉겨있는 곳을 요리조리 피해 청소기를 돌렸다. 이층 까페와 OA실, 공부방, 주방까지 쓸고 닦고 나서 화장실을 끝으로 청소가 끝났다. 이 과정을 매일 반복하다보니 점점 안 보이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강의실 바닥에 엉겨 있는 전선들을 가닥가닥 정리해서 보이지 않도록 정리하는 일, 창문 난간 쪽에 너덜대는 시트지를 정리하고 순간접착제로 마감하기, 주방에 말려둔 온갖 식기와 조리도구들을 제자리에 수납하기까지. 매일 쓸고 닦아서 쌓이는 먼지가 줄어드는 만큼 공간 전체를 정리하는 손품은 늘어났다. 언젠가는 화장실 하수구가 막혀 물이 안 빠지는 걸 뚫느라 쩔쩔매기도 했다. 백일이 거의 끝나가던 즈음 어느 날 아침에는 도어락이 작동하지 않았다. 출입구에 붙은 광고스티커를 보고 열쇠아저씨를 불렀더니 십초 만에 해결해주셨다. 그즈음 문을 열 때마다 삑삑댔는데 그게 건전지교체 신호라는 걸 몰랐다. 불목하니로 시작해 출입구 도어락의 상태까지 살필 줄 아는 신체가 되고나니 백일 수행이 끝나가고 있었다.

 

문탁샘이 홈피에 나의 수행을 알린 탓에 세미나를 하러 와서 나와 마주친 이들은 여지없이 “아... 게으르니님이군요?” 라며 반가워했다. 백일 동안 아무도 없을 때 조용히 청소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이가 나를 보고 반색을 하는데 대략 난감이었다. 적은 나이도 아닌데 제 몸 하나 주체하지 못해서 이런 모습을 보이나 싶어서 무척 창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혼자서는 도저히 저 무기력에서 벗어날 자신이 없었다. 할 수없이 창피함을 꾹꾹 눌러가며 어색한 웃음을 짓곤 했다. 차츰차츰 시간이 흐르자 창피함도 많이 줄어들고 담백하게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는 처음 보는 이가 내미는 선물도 기꺼이 받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도 문탁에 처음 와서 천연 화장품을 만들기 시작한 자누리였다^^.

 

어머니는 늘 나의 게으름이 문제라고 걱정을 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있는 대로 짜증을 부려서 어머니의 다음 말문을 막아버렸다.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게으름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 가족에게 도움을 구할 수는 없었다. 물리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이제 가족은 내게 너무 ‘멀어진’ 사이였다. 드문드문 서로의 안부를 묻는 친구들에게 이런 속사정을 털어놓자니 계면쩍었다. 그랬던 내가 주말과 공휴일까지 포함 꼬박 백일을 매일 아침 여덟시에 나와서 공간을 청소하는 부지런을 수행해 내다니. 점점 백일 수행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자 여기라면 나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품기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공동체에 쑤욱 들어섰다.

 


나는 공동체로 출근한다

 

백일 수행이 끝나갈 즈음이 되자 만나는 사람들도 모르는 얼굴보다 아는 얼굴이 더 많아졌다. 이렇게 수행을 열심히 하는데 별명을 부지런이로 바꾸라는 농담도 편하게 주고받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나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백일만 하고 그만 할 거야?” 당시 나의 고민도 그거였다. 열심히 쓸고 닦다가 백일이 되었으니까 이제 끝? 이러면 되나. 절에서는 행자 생활이 끝나면 계를 받는다든가 하는 의례가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절도 아니고 공동체에서는 어떻게 하는 건가.

 

나의 고민을 들은 문탁샘은 이렇게 말했다. “백일 되면 끝내야지. 청소당번 있잖아.” 그동안 이 공간을 운영하는 회원들이 당번을 정해서 청소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시름 놓았다. 기약 없이 계속 청소를 해야 한다면 내가 할 수 있을까 점점 부담이 되어가던 차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동체에서 그런 방식으로 일을 맡지 않는데 그 때는 그걸 몰랐다. 그저 문탁샘의 말을 듣고 끝내도 되는구나 싶어 안심이 되었다.

 



백일 수행이 열흘 남짓 남았을 즈음 문탁샘은 홈피에 백일 쫑파티를 하자는 제안을 올렸다. 당시 주방지기였던 콩세알이 특별식을 하겠다고 나섰고 다른 친구들도 축하 선물을 챙겨오겠다는 댓글을 보면서. 또 창피했다. 공동체에서는 조용히 넘어가는 일이 없구나. 절집의 행자처럼 계를 받는 의식은 없었지만, 친구들의 박수소리에 둘러싸여서 한 개의 촛불이 켜진 케이크를 자르고 나서 백일 수행프로젝트를 끝냈다.

 

쫑파티가 끝난 후 문탁샘이 올린 후기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했다. “100일 전 게으르니가 발심했습니다. 다르게 살고 싶다!! 일상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늦게 일어나고 늦게 자는 습관부터 바꾸기로 했습니다. 하여, 시작된 게으르니의 100일 프로젝트!! 드뎌 오늘 100일째가 되었습니다.” 게을러터진 습관부터 바꿔보자고 시작한 수행이었다. 그렇게 일상을 바꾸기 시작하자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학원에 나가는 요일도 점점 줄어 공동체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혼자서 보내는 시간도 줄어들었으니 확실히 다른 일상이 펼쳐졌다. 그렇게 나는 공동체로 출근하게 되었다.


글_기린(에코n양생실험실 인문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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