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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을만나다] ‘진짜’眞가 아닌 ‘다름’異을

by 북드라망 2020. 8. 13.

‘진짜’眞가 아닌 ‘다름’異을

 


“야~ 너 김태리 닮았다~”처럼 평소에 심심찮게 누구누구 닮았다, 라는 이야기를 우리는 종종하곤 한다. 예쁘거나 잘생긴 연예인을 닮았다고 칭찬해주거나, 혹은 놀릴 때^^;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닮았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긴 하지만, 왠지… 그런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비슷하게 생겼다’는 말로 나도 덩달아 그런 사람이 된 것 같기 때문이다.




때로는 ‘닮고 싶다, 따르고 싶다’는 마음으로 많은 것을 시작하게 되기도 한다. 누군가를 롤모델로 삼아 인생의 비전을 탐구하거나 멋지게 사는 사람들을 보며 ‘어떻게 하면 저렇게 살 수 있지?’를 묻기도 한다. 그런데 잠깐, 연암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비슷하다’는 것은 그 상대인 ‘저것’과 비교할 때 쓰는 말이다. 무릇 ‘비슷하다’고 하는 것은 비슷하기만 한 것이어서 저것은 저것일 뿐이요, 비교하는 이상 이것이 저것은 아니니, 나는 이것이 저것과 일치하는 것을 아직껏 보지 못하였다.


종이가 하얗다고 해서 먹이 이를 따라 하얗게 될 수는 없으며, 초상화가 아무리 실물을 닮았다 하더라도 그림이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박지원, 「영처고서」,『연암집(하)』, 돌베개, 78쪽)


연암은 ‘비슷하다’는 말 안에 이미 비교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한다. 아~~~주 닮고, 아~~~주 비슷하다 해도, 둘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아니, 애초에 같아질 수 없는 무의미한 논의다. 외모든 인생 비전이든 비슷해지고 싶고, 닮고 싶은 마음 안에는 비교하는 마음이 있다. 지금보다 저 상태가 낫다는 상이 있는 것이다.


종이가 하얀 것을 부러워하여, 먹이 이를 따라 하얗게 변할 수는 없다. 학이 긴 다리를 불만으로 삼아 다리를 잘라 숏다리 학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아! 요즘은 다리가 짧은 강아지가 귀엽다고 그런 종을 일부러 만들고 있긴 하다;;) 비슷한 것이 되고자 하는 건 내가 되고 싶은 무언가로 만들어버리는 일이다. 엄연한 자기 투사고 자기복제다. 비슷한 것이 되고자 욕망하는 것은 스스로를 복제품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일 뿐!


사실 사람은 최대한 비슷한 것이 되어보고자, 복제품이 되어보고자 해도 쉽지 않다. ‘사람’이란 존재 자체가 그렇다. 아무리 누군가와 비슷해지려 성형을 해도 똑같아질 수 없고, 닮아가려 노력을 해도 결국 같아질 수는 없다. 그런데 물건은 특히 공산품은 이런 것이 가능하니, ‘진짜’, ‘명품’, ‘좋은 것’을 만들어 그것에 가까운 것을 구하려 한다. 명품과 최대한 비슷한 특A급 짝퉁을 찾는 것도 이 때문일 거다.


『연암집』을 보니 〈청명상하도〉 발문이 몇 개나 된다. 관재가 소장한 것, 담헌이 소장한 것 등등. 〈청명상하도〉는 절경을 그린 대작이라고 하는데, 송나라 때 장택단이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원작은 전해지지 않고, 모방작만이 전해진다. 이때도 걸작을 따라 그린 짝퉁들이 잘 팔렸던 것이다. 연암은 발문에서 사람들이 진품만을 찾기 때문에 위조품이 수백 가지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진품을, 걸작을, 명품을 욕망하기 때문에 비슷한 가짜들이 만들어진다. 수백만 가지의 다른 그림들의 다양체를 알아보고, 인정하는 것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만들어 낸 ‘하나의 진짜’를 믿는 것이다.




하지만 ‘다름’異에는 ‘진짜’眞란 없다. 각자가 가진 맛과 멋만이 있을 뿐이다. 활동을 하며 친구들과 부대끼며 살다 보니 참~ ‘다름’을 많이 느낀다. 이럴 때마다 나는 ‘다름’ 자체를 인정한다기보다는 ‘다름’을 확인하는 것에 머무를 때가 많다. 친구들 각자의 모습을 각각의 세계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 마음 안에는 내가 ‘진짜’라고 생각하는 모습들이 있었다. 세상에 비슷한 존재는 없고, ‘진짜’는 내가 만들어낸 것일 뿐인데 말이다.


학의 다리를 부러뜨려 숏다리로 만들지 않고, 각자의 모습으로 서로 만나 활동을 꾸려나간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활동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각각의 세계를 잘 발현하면서 함께 한다는 건 어떤 걸까. 관계 속에서 ‘진짜’眞가 아닌 ‘다름’異을 만드는 길을 가고 싶다.


글_원자연(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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