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송 19세기 연행록』 풀어 읽은이 인터뷰
1. 18세기에 버금갈 정도로 19세기에도 많은 연행록들이 나왔다고 말씀하셨는데요, 18세기의 연행록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나 홍대용의 『연기』 등으로 익숙한 데 비해 19세기의 연행록은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합니다. 18세기 연행록과 구별되는 19세기 연행록들의 특징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18세기 연행록이 익숙한 이유는 어쩌면, 박지원이나 홍대용의 브랜드 파워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들의 진보적 세계관은 ‘연행’이라는 해외체험을 통해 더 구체화 되었고 이는 ‘북학’으로 이어졌지요. 19세기 연행록 역시 이들의 계보를 잇습니다. 다만, 연행에 참여하게 되는 계층의 폭이 한층 넓어지다 보니 사대부에서 중인들까지 다양한 저자군(著者群)이 형성됩니다. 당연히 연행에 임하는 목적도 다르고,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는 방식이나 문체 등도 다양해지지요. 조선의 문화계를 주름잡던 유명한 저자들만큼이나 무명의 저자들도 많습니다. 19세기 연행록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 그리고 ‘19세기 연행록의 특징은 ○○이다’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연행록은 주로 어떤 경향성을 보이는가 묻는다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는 있어요.
첫번째는 ‘북학’의 관심에서 ‘개인의 교유’에 중점을 둔다는 점이지요. 청나라 지식인들은 물론 북경에 온 타국 지식인들과 교유한 흔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사, 부사, 서장관 신분이 아닌 저자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현상이지요. 상대적으로 일정의 부담이나 공무의 무게가 덜어지는 입장이니까요. ‘사람 사귀러 연행 왔나?’ 싶을 정도로 인적 네트워크 형성에 치력합니다.
두번째는 연행록에 수록된 정보의 양이 많아지고 디테일해진다는 것이에요. 18세기에 완성된 수준 높은 저작들, 즉 『노가재연행일기』, 『열하일기』, 『연기』 와 같은 선배들의 연행록들은 필독서가 되었습니다. 19세기 연행에 참여한 이들은 이전 연행록에 기록된 정보들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확인하고 수정해 나갑니다. 거기에 자신의 경험치를 더해 놓지요. 정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붙어나가요. 위키트리처럼. 일기 형식으로만 기록하는 게 아니라, 나름의 분류 기준으로 범주화시키죠. 그야말로 카테고리별로 정리해나가는 방식을 취합니다.
이 외에도, 19세기 중반을 지나면 ‘북경’을 바라보는 시선과 온도가 달라집니다. 아편전쟁 이후의 북경을 목격하면서 인접한 동아시아 문화권의 지식인들은 긴장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지요. 이러한 점은 18세기 연행록에서 볼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19세기 연행록 특징을 짚어내기란 어렵지만 대체로 이러한 경향성을 보인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2. 선생님께서는 오랫동안 연행록들과 자료들을 읽어 오신 것으로 압니다. 수많은 연행록을 읽으셨을 텐데요, 그 중에서 선생님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은 연행록은 어떤 것이었나요? 이유도 함께 말씀해 주세요.
그간 접했던 연행록들이 각기 다른 결로 제 마음을 사로잡긴 했습니다. 물론, 저 역시 박지원의 『열하일기』나 홍대용의 『연기』에 매료되었던 사람 중 하나죠.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들은 이미 연행록계의 ‘방탄소년단’이 된 지 오래예요.^^ 모두가 인정하지요. 그런데 간혹 홍대 앞 버스킹이나 무명의 싱글 앨범에 끌린 적이 있으신지요? 북경까지 가고 오는 길은 다 같아도 저자의 신분이 어떠하냐에 따라 기록하는 방식, 시를 쓰는 소재들이 다 달라집니다.
제가 보았던 연행록 중에 이영득(李永得, 호는 저계樗谿)이라는 무명의 군관이 쓴 『연행잡록』이 있습니다. 그는 1823년에 북경을 다녀왔습니다. 신분과 정확한 나이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 사람은, 16책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의 연행록을 남겼지요. 그나마 이것도 몇 책이 빠져 있는 양입니다. 어딘가에 있을 텐데 혹 발견된다면 책 수는 더 늘어나겠지요. 도대체 무엇을 썼기에 이렇게 길까? 처음엔 읽어 나가기가 벅찰 정도였습니다. 북경의 명승지 정보는 물론, 압록강을 건널 때까지 만났던 기생의 명단, 누가 예쁘고 누가 못났는지 일일이 다 적어 놓은 것은 기본이구요. 본인이 마셔 보았던 술의 종류, 대화를 나누었던 청나라 지식인의 프로필, 묵었던 숙소 주인의 이름이며 북경 안에 있는 점포 이름까지 실로 엄청난 양의 정보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동안 연행사를 따라갔던 마두배들은 그저 말이나 몰던 마부들이 아니라 대다수가 잇속을 노리고 참여하는 의주 군관 출신이라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읽으면서 엉뚱하게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19세기로 가서 연행사에 참여한다면, 난 이 책을 꼭 요약해서 가져가야지! 라고요. 그만큼 ‘연행 길 100% 활용하는 법’이 다 담겨 있었습니다. 저자인 이영득 역시 자신의 경험에 선배들의 기록을 참고하여 이 연행록을 완성한 것이겠지요. 혀를 내두를 만큼의 깊은 사유구조나 문체의 유려함이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친절합니다. ‘연행, 알고 가면 조금 더 편하다!’는 초행자를 위한 연행의 tip을 제시해 주었어요. 어찌 보면 우리 모두 연행의 초행자들 아닌가요? 제가 이 연행록에 반했던 이유입니다.
3.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낭송 19세기 연행록』의 최고의 명장면은 무엇인가요? 또 그 이유도 궁금합니다.
인터뷰 질문 가운데 가장 어렵네요(^^). 처음 연행 길에 임하는 이들은 하나 같이 북경의 화려한 도회풍경, 길거리 공연 등에 이목을 빼앗깁니다. 환술(幻術)이나 잡희(雜戱) 등은 기록의 단골 소재이지요. 독자로서는 지겨우리만큼 이 부분에 대한 묘사가 빠짐없이 연행록마다 등장합니다. 보았던 공연도 다 비슷해요. 하지만, 그들에겐 각자 처음 보았던 광경이니 기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 저자거리에선 구경 못하는 이은결의 마술쇼와 이국적인 서커스가 눈앞에서 펼쳐졌다고 생각하면 ‘기록할 수밖에 없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832년 반당 자격으로 따라갔던 김진수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자신이 견문한 북경의 풍경을 300수가 넘는 한시로 남겼죠. 그 역시 북경의 환술과 길거리 배우들의 공연을 보고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비취 장식 꽂은 머리 한 떨기 연꽃 같아一朶芙蓉綰翠鬟
앵앵이, 연연이도 모두 무색하구나鶯鶯燕燕摠無顔
석류 치마 아래로 비단 버선발을 드니石榴裙底蹴羅襪
반달 같은 귀밑머리 귀고리가 흔들리네偃月鬢邊搖寶環
이 시만 보면 어여쁜 여배우가 한껏 치장한 모습입니다. 요즘 세태에 비유하면 폰 카메라로 배우의 모습을 찍은 것 같죠. 그런데, 김진수가 이 시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마치 ‘이 사진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습니다.’ 라는 것처럼. 다음 내용이 그것입니다.
“소설에서 호남자[好漢]라 일컫는 자들이 바로 지금의 소년 배우들이다. 세상의 예쁜 사내아이들을 사서 춤과 노래를 가르치면 그들의 몸값은 크게 올라 귀해진다. 신분 높은 귀족들은 이 아이들을 불러들여 하룻밤 함께 자는데, 대가가 몇 백 금을 훌쩍 넘는다. 그러다 3, 4년이 지나 구레나룻과 턱수염이 거뭇거뭇해지면, 이들은 환술을 배워 사방을 떠돈다. 결국엔 평생 천한 신세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나름 반전이 있습니다. 이 배우는 여인이 아니라, 어린 소년이었지요. 김진수는 미소년의 공연을 보면서 그 화려함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체 높은 귀족들의 쾌락 대상이 되었다가 사춘기를 지나 앳된 모습이 사라지면 버려지는 그 가련한 삶을 들여다봅니다. 김진수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명,청 시대의 남색풍조 폐단까지 읽혀지죠.
김진수의 신분은 사대부가 아닌 중인이었습니다. 화려함 너머로 배우의 애환을 읽어내는 섬세함이, 혹시 그의 삶을 관통해온 감각은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가장 인상 깊습니다.
4. 앞으로 이 책을 낭송하게 될 독자들께 하시고 싶은 말씀을 남겨 주세요.
어떻게 하면 조선 시대의 연행을 알기 쉽고 흥미롭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연행은 명실상부한 공무 수행입니다. 하지만 공적 루트를 통해서 사적인 여행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연행 체험을 기록한 이들 역시 정사, 부사, 서장관에 국한되지 않고 역관, 자제 군관, 반당 등으로 다양하지요.
이들은 조선 밖 구경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자신보다 앞서 북경에 다녀왔던 선배들의 기록을 열심히 읽고, 직접 체험담을 듣기도 합니다. 이렇게 준비를 철저히 해도, 막상 국경을 넘을 때면 정사고 부사고 간에 두려움이 엄습하지요. 낯선 땅, 낯선 사람, 낯선 말들에 둘러싸이면, 백면서생들은 마음이 위축됩니다. 먼 길을 오가며 벌이는 지질한 에피소드는 사실, 무력하기만 한 이들의 차지이기도 합니다. 위엄도 체통도 내다버린 지는 오래입니다.
반면에, 압록강을 넘는 순간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존재들도 있습니다. 역관과 마두배들이 대표적이지요. 몇십 번을 오갔으니 지리에도 밝을 것이고, 작은 싸움 정도는 거뜬히 해결할만한 ‘서바이벌 중국어’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처지의 전복(顚覆)! 가끔 통쾌할 때도 있어요. 때로는 이들이 연행의 골칫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동력인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번 『낭송 19세기 연행록』을 조금 더 재미나게 즐길 수 있는 관전 포인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연행의 이면을 보자! 엄숙해 보이는 사신단의 행렬 뒤에는 자잘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슬쩍 눈감아 주는 관행적 요소들도 존재하고요.
그리고, 사람을 보자! 연행 길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자의 눈에 포착된 이들. 연행록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이 주인공입니다. 그들의 동선을 따라가 보세요. 여러분 스스로가 조선 밖을 처음 구경하는 촌스러운 선비들이 되어서 함께 여행하시길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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