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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나의 고전분투기

성誠 - 진실 되고 망령됨이 없는 것

by 북드라망 2017. 1. 26.

성誠 - 진실 되고 망령됨이 없는 것



1. 상(常)과 시(時)의 모순적 관계


『중용』의 주제는 단연 성(誠)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게 성(誠)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가장 어려운 개념 중의 하나였다. 글자의 뜻은 진실함, 성실함을 의미하기에 지금도 가치 있는 의미들이지만 어쩐지 통념적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해서였다. 그런데 철학자 이진경의 김시종 시인에 대한 강의를 듣고 김시종의 시집을 읽으면서 그동안 끙끙거리던 성(誠)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진경이 “어긋남의 존재론”이라 명명한 김시종의 시(詩)들에서 그가 즐겨 쓰는 시어인 “산다(~生きる)”가 『중용』의 핵심 개념인 성(誠)에 겹쳐졌던 것이다. 이 글은 그 덕분에 쓰게 된 글이다.


성(誠)이라는 개념은 『중용』 16장, “은미한 것이 드러나니 성(誠)의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도다 (夫微之顯부미지현 誠之不可揜성지불가엄 如此夫여차부)”라는 문장에서 딱 한번 등장한 후 20장 애공 문정(哀公問政)편의 후반부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나온다. 여기에서 성(誠)은 천도(天道)라고 정의되는데, 『중용』이 말하는 사람의 도는 천도(天道)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군자는 끊임없이 천도(天道)인 성(誠)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중용』 후반부를 끌어가는 주제다. 


성리학의 공식적인 입장인 주자의 주석에서 성(誠)은 “진실 되고 망령됨이 없는 것(眞實無妄진실무망)”이다. 여기서 진실무망이란 상(常)에 다름 아닌데, 항상적이고 불변하는 것이 상(常)이다. 그래서 정자(程子)는 중용(中庸)의 용(庸)에 대해서도 평상(平常)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성리학(性理學)은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성(性)이 곧 이치(理)임을 주장한다. 이치는 보편성을 띠는 원리다. 주자는 성(誠)을 진실무망으로 주석해서 이치가 작동하는 항상성을 개념화한 것이다. 하지만 상(常)을 주목하면 필연적으로 시(時)와 모순된다. 『중용』 전반부의 핵심 개념은 시중(時中)이었다. 이때 중(中)은 상(常)이 아니다. 시(時)에 따라 다르게 중(中)을 취할 수 있어야 군자다. 하지만 여기에 역설이 있다. 늘 출렁거리는 변화의 와중에 있는데 어떻게 중(中)을 취한단 말인가. 늘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시중(時中)의 운명이다. 그래서 공자는 시퍼런 칼날을 밟을 수도 있고, 벼슬을 사양할 수도 있겠지만 중용은 불가능하다고까지 말했었다. 


선불교의 영향을 받은 주자는 중용의 불가능성을 마음에서 찾았다. 이른바 사욕(私慾)이 그것이다. 그에게 중용(中庸)은 지나치게 편벽된 것도 없고 과한 것도 모자란 것도 없는 상태다. 이런 상태는 사욕(私慾)으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외물(外物)과 접해있는 인간은 사욕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주자는 인간이 사욕에 흔들리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인정한다. 그래서 군자가 중용하기는 어렵다. 외물에 홀리기 쉽기 때문이다. 이를 피하려면 마음을 단속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주자의 해법이다. 신독(愼獨)이 그것이다. 이때 독(獨)의 의미는 홀로 있을 때가 아니다. 주자는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자신만 아는 (마음의) 자리(人所不知而己所獨之地)가 독(獨)이라고 했다. 그래서 주자에게 와서 변화의 위상은 상(常)에 비해 부차적이 된다. 변화의 이치를 알 수 있다면 변화의 우연성은 사라지고 관리 가능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변화만 있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고정하지 못한다면 여간 두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대략 예상하고, 그것에 기대서 오늘을 산다. 물론 그 기대는 번번이 어긋나 버리지만 말이다. 예측한다는 것은 변화를 고정시키려는 시도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은 점술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예측활동은 동물 생존의 필수 요건이다. 일군의 뇌과학자들은 뇌의 피질이 기억을 담당한다고 말하고 있다. DNA에 새겨진 진화적인 기억과 함께 피질은 감각기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되먹임하면서 예측한다. 물론 피질에 기억되는 것은 우리가 보는 세상과 동일하지 않다. 그들의 가설에 따르면, 세상은 뇌라는 시스템에 고유한 패턴으로 변용되어 기록되고 인출된다. 만물은 늘 출렁이는 변화의 와중에 있을지라도, 뇌는 생존을 위해서 일정한 방식으로 그것을 기록한다. 기록한다는 것은 고정한다는 것이고, 그 변함없는 동일성에 기초해서 우리는 예측하고 판단한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다.    


그래서 변치 않는 것에 대한 선호는 어쩌면 숙명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서양의 많은 철학들이 변화를 가상이라고 간주하고 변치 않는 것에 집중한 것도 같은 맥락이고, 성리학이 이치(理)에  방점을 두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철학들은 대개 지배자의 이익에 복무하기 쉽다. 지배자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권력을 쥐고 있는 현재가 최선이기에 변화를 싫어하는 것이 당연하고, 동일성들을 그러모아서 보편적인 기준, 즉 궁극의 변치 않는 기준을 만들 수 있다면 피지배자에 대한 통치는 훨씬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가령 국가철학으로서의 성리학이 인간의 길(人道)을 전용한 방식은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다. 임금, 신하, 아비, 자식의 길이 딱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전전긍긍하는 것이 군자의 도리다. 이때 성(誠)하려는 노력은 그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소위 양식(良識)의 테두리 내에 포위된다. 


나는 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으로 시중(時中)을 읽었다. 그래서 성(誠)을 주자의 해석에 따르는 한 두 개념은 서로 같이 있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헌데, “진실무망(眞實無妄)”조차도 변치 않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대처하는 적극적인 자세로 읽을 수는 없을까? 주자는 망(妄)의 이유를 사욕(私慾)에서 찾았다. 그런데 그 사욕(私慾)은 필경 가진 것을 놓치지 않고 움켜쥐려 하기에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사욕(私慾)에 휘둘리는 자들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변치 않는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놓기 싫어서 변치 않는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찬양한다. 그렇다면 “진실무망(眞實無妄)”하려면 변화가 몰고 오는 우연을 적극적으로 긍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처럼 매번 주사위 던지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실무망(眞實無妄)”이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닐까? 



2. 성(誠) 그리고 “산다(~生きる)” 


부귀한 처지에 있으면, 부귀한 사람의 도리를 행하고, 

素富貴行乎富貴(소부귀행호부귀)

빈천한 처지에 있으면 빈천한 사람의 도리를 행한다. 

素貧賤行乎貧賤 (소빈천행호빈천)

오랑캐의 땅에 살게 되면 그 상황에 맞게 행동한다.

素夷狄行乎夷狄 (소이적행호이적)

전쟁과 같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또한 그에 맞게 행동한다.

素患難行乎患難 (소환란행호환란)

군자는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 스스로 얻지 못하는 것이 없다. 

君子無入而不自得焉(군자무입이부자득언)   (중용 14장)


이 문장을, 군자는 어떤 경우에나 도덕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고 독해한다면 너무나 통념적인 이해일 것이다. 환란을 당했을 때 통념이 지시하는 것은 적에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를 “산다”는 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봉착하면서도 그 속에서 어떻게든 길을 찾아 사는 것이다. 일제에 의해 일본군위안부 생활을 했던 할머니들은 전쟁이 끝나자 전쟁터에 그대로 버려졌다. 그 통에 많은 위안부들이 죽고, 일부는 천신만고 끝에 해방된 나라로 돌아왔지만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고향에서는 이미 ‘화냥년’이 되어있었기에 말이다. 식민통치의 가장 처절한 피해자인데도 마치 죄인처럼 나머지 인생을 병고에 시달리며 숨죽여 지내야 했다. 이들의 삶이 가미가제 특공대의 삶보다 쉬웠을까? 때론 죽음보다 힘들지만 삶에 들러붙어서 길을 내야 하는 삶도 있다. 아무런 딜레마 없이 주어진 길을 간다면 어려울 것이 뭐가 있으랴. 하지만 ‘산다’는 건 이미 나있는 길이 아니라 땅 속을 파고 들어가는 지렁이처럼 자신의 길을 내어야 한다. 君子無入而不自得焉(군자무입이부자득언). 군자가 얻는 것은 딜레마를 껴안고서 힘들게 내딛는 발걸음, “산다”가 아닐까?   


공자는 정치를 묻는 애공에게 왕이 된 자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9경(九經)을 통해 가르친 것 같다. “수신(修身), 존현(尊賢), 친친(親親), 경대신(敬大臣), 체군신(體群臣), 자서민(子庶民), 래백공(來百工), 유원인(柔遠人), 회제후(懷諸候)”는 왕에게 제시하는 평범한 도덕률이나 처세의 지침이 아니다. 지난 연재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왕이 왕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왕이라는 정체성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그가 제대로 살아야 정치가 있다는 것이 공자의 가르침이다. 위안부 할머니들도 순결한 소녀, 혹은 식민지의 피해자라는 정체성으로만 살아야 했다면 삶을 이어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때로 김시종의 시처럼 ‘지렁이’가 되고, 때로는 ‘벙어리 매미’되지 않으면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내안에 강고하고 버티고 있는 누군가를 죽이는 일이다.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니라 ‘비인칭적인 죽음’. 그런데 이때의 죽음은 무(無)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신하가 되고 임금이 되고, 아비가 되고, 자식이 되고, 선생이 되고, 엄마가 되고, 심지어 ‘지렁이’가 되고 ‘벙어리 매미’가 되는 것은 그 죽음을 통과해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그것은 무(無)가 아니라 무한(無限)의 지대다. 수학적으로 말하면 미분불가능의 지대. 무한개의 미분이 가능해서 해를 고정할 수 없기에 차라리 불가능하다고 해버린 지대다. 모든 존재자가 사라져 버렸기에 어떤 존재자도 나올 수 있는 무한한 잠재성의 지대다. 그것은 무규정의 심연이고, 들뢰즈, 가타리식으로 말하면 “기관 없는 신체”다. 『중용』이 말하는 인도(人道)로서의 성(誠)은 이런 무규정적 심연을 거쳐서 어떻게든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면서 살아내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성(誠)이라는 것은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도(道)는 스스로 행해야 하는 것이다.

誠者 自成也 而道 自道也


성(誠)이라는 것은 만물의 시작과 끝이니, 성(誠)이 아니면 만물도 없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성(誠)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誠者 物之終始 不誠 無物 是故君子 誠之爲貴


자연에서는 변신은 생물학적인 죽음, 혹은 물리적인 해체를 통해서다. 죽음을 통해서 새로움이 생성된다. 인간도 물(物)인 한 물리, 생물학적으로는 그 리듬을 따라간다. 그 길은 저절로 나있는 길이자 갈 수 밖에 없는 길이다. 이것은 천도(天道)로서의 성(誠)이다. 그래서 성(誠)이 없으면 물(物)도 없다. 


만물은 함께 길러지지만 서로 해치지 않고, 도는 함께 행해지지만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 


개별적인 사태는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것이지만 전체 자연은 생생불식(生生不息)한다. 이것이 천도(天道)의 성(誠)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빠르게 돌아가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자연은 그렇게 매끄럽게 변신한다. 『중용』은 이를 지극한 성, 지성(至誠)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인간사는 그렇지 못하다. 인간사에서 매끄러운 변신은 십중팔구 가짜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며 놀라운 성형술로 이전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되는 경우, 그는 변신한 것이 아니다. 또 늘 마른자리만 찾아다니는 재빠른 처세도 그는 기름장어 되기에 머물러버린 것이지 더 이상 심연에 빠져들었다고 할 것이 못된다. 이런 것들은 사유할 가치도 없는 가짜변신이다. 


사유할 가치도 없는 이런 변신이 아니라 정말 존재가 바뀌어 버리는 사건은 매끄럽게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마음먹는다고, 또는 하고 싶다고 그런 계기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질문이 생겨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멀쩡히 잘 있으면서 갑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할 턱이 없다. 그래서 철학자 이진경은 재일(在日) 시인 김시종의 『광주시편』의 한 구절 “나는 언제나 거기에 없다”를 새로운 존재론의 선언으로 읽는다. “있음“과 ”이다“의 어긋남. 존재론은 자신의 익숙한 자리에서 느닷없이 내쫓긴 자,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불온한 자들의 몫이다. 여태까지 편안했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의 자리가 일시에 부정당했을 때 비로소 존재에 대한 질문이 생기는 것이다. 


김시종은 자신의 자전적 에세이 『클레멘타인의 노래』에서 소년 시절에 맞은 8.15 해방의 날을 이렇게 기억한다. “조선 문자로는 가나다라의 ‘가’조차 쓰지 못하는 나는 망연자실한 가운데 조선인으로 떠밀려났다. 나는 패배한 ‘일본국’조차 내버린 정체불명의 젊은이였다.” 황국소년 김시종에게는 땅이 꺼질 듯한 절망감이었을 것이다. 이런 경우 대개는 그에 대한 반동으로서 황급히 새로운 자기정체성으로 무장하기 마련이다. 그동안 소외되었던 진정한 자신을 발견이라도 했다는 듯이 말이다. 자신의 무지를 자각한 그는 열혈 남로당원이 된다. 이에 대해 김시종은 “반동이 불러일으킨 자기 현시”, “너무나도 모르고 있었던 자신의 내력을 알게 되자 엉겁결에 변천한 자기 생성의 역류”였다고 회고한다. 김시종도 말하듯이 이 경우의 변신은 멈추어버린 변신이다. 여기서 ‘산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프란츠 파농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유색 형제들이 원한을 품겠지만 나는 흑인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겠다. 비존재의 지대가 있다. 무엇하나 자라지 않는 메마른 지대이다. 비탈은 온통 헐벗었다. 아마도 진정한 솟구침은 거기서 태어날 것이다. 흑인은 대부분의 경우 이 진정한 지옥으로 내려갈 은혜를 입지 못했다.” ‘산다’는 것은 반동으로서의 정체성마저 벗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두렵고 무서운 진정한 지옥이다. 절대 고독의 고통스러운 자리! 그곳은 반동의 방식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자리가 심연이다. 그 심연으로 철저히 가라앉지 않는다면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심연으로 침잠하는 것은 능력이다. 촉발의 계기는 외부에 의해서라도 말이다. 공자가 수신(修身)을 첫째 항목으로 강조한 것은 이런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라고 나는 읽는다. 수신을 통해 얻어야 하는 덕이 “지(知), 인(仁), 용(勇)”이다. 상황에 휩쓸려 버리지 않고, 존재에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은 지(知)를 통해서다. 이것은 어쩌면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규정성을 벗어버리는 능력, 부정의 능력일 것이다. 하지만 파농이 말했듯이 흑인이 자신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은 부정의 방식이 아니라 긍정의 방식이어야 가능하다. 이 긍정은 단지 부정의 반대가 아니라 구성력이다. 나는 공자가 말하는 인(仁)이 이것이라고 읽었다. 그리고 그 긍정을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는 것은 용(勇)을 통해서다. 하지만 모든 고귀한 일은 드물 듯이, 평범한 자들은 하루나 한 달도 지속하지 못했고, 천하의 안회도 3개월 이상을 넘기지는 못했다.  



3. 에필로그


이것이 『중용』의 마지막 연재다. 내가 동양고전, 게다가 곰팡내 나는 유학(儒學) 텍스트에 꽂혔던 것은 2000년도 이전의 텍스트가 너무나 현재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현재적이지 않다면 읽는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간 내가 읽은 텍스트는 대학, 중용, 주역, 논어에 불과하지만 감히 공자로 대표되는 유가적 사유의 특이성을 말한다면, 변화와 모순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이라는 점이다. 변화와 모순을 어떻게 생성의 역량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 유가적 사유가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 시도한 것이고 나는 그것에 매료되었다. 그간 울퉁불퉁 거친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글_최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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