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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나의 고전분투기

치곡(致曲), 한 귀퉁이에 정성을 다한다

by 북드라망 2017. 1. 12.

치곡(致曲), 한 귀퉁이에 정성을 다한다



조류독감(AI) 때문에 계란 파동이 났다. 한판에 3000원 남짓하던 계란이 1만원이 넘는다고 하지만, 생협의 계란가격은 그대로다. 그렇다고 지금 생협의 계란 가격이 시중보다 더 싼 건 아니다. 생협 계란은 원래 비쌌다.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생협에서 식재료를 공급받는다. 그 이유들에는 편리함과 식재료의 질도 포함되지만 땅을 지나치게 황폐화시키지 않는다는 것과  동물복지도 훨씬 믿을만하다는 약간의 위안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식재료의 가격등급이 환기시키는 식재료의 불평등의 문제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다. 가령 똑같은 생협 유정란이어도 non-GMO 계란은 더 비싸고, 유정란은 시중에서  파는 계란보다 질은 좋지만 훨씬 비싸다. 나는 좋은 식재료를 포기하지 못해서 생협에 주문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고, 내가 좋은 식재료를 구매할 수 있는 한 식재료를 둘러싼 불평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말할 자격이 없는 것 아닐까라는 자기검열을 저절로 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형태를 교환가치와 사용가치 두 가지로 나누었고, 그것들을 관계성으로 이해했다. 그가 포착한 이 새로운 관계성은 모든 것을 교환을 위한 상품으로 전환하고, 상품을 제조하고 순환시킬 새로운 기회가 계속 생기도록 세계를 재구성하는 프로세스로 작동시킨다.  또한 이 프로세스는 인간의 노동력을 가차 없이 착취해야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프로세스 하에서는 인간의 노동력은 값어치로 환산되는 살아있는(生) ‘자본’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런 생자본에 인간의 노동력만 들어가는 것일까? 값싼 달걀을 생산하기 위해 닭들은 A4 한 장짜리의 면적도 안 되는 비좁은 닭장에서 알을 생산하는 노동에 시달린다. 이때도 인간의 노동력이 가치를 생산한다고 할 수 있을까? 알은 결국 닭이 낳는 것인데 말이다. 


닭장의 닭들처럼 살아 숨 쉬고 생식하는 것들의 노동에서 나오는 가치는 또 누가 생산하는 것일까? 아니 사용가치나 교환가치라는 항목으로 이들이 생산하는 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맥락에서 『자본을 넘어선 자본』에서 이진경은 인간노동 중심의 전통적인 노동가치론을 비판했다. 세상에는 인간의 노동으로 환원하거나 값어치로 셈해질 수 없는 것들이 널려있고 우리는 그런 것들 덕분에 산다고 말이다. 또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는 이제 인간의 노동만이 가치를 만든다는 인간주의를 넘어서 비인간들의 활동까지도 자본의 프로세스에 어떻게 엮여 들어가는지를 분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비슷한 문제의식으로 미국의 여성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다나 해러웨이는 “교환가치”와 “사용가치”만으로는 부족하고 여기에 더해서 이종(異種)간의 “만남의 가치”도 검토할 것을 제안한다.[각주:1] 만남이란 누가 무엇을 일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누구의 상호적인 관계다. 그래서 만남은 누가 무엇을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변형을 전제한다. 


닭과 같은 사육 동물과 우리는 “만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사육동물들이 없었다면 인간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삶을 살고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사육동물들도 또한 인간들과의 관계성에 힘입어서 그들의 역사를 만들어 왔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영향을 주고받는 수준이 아니다.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경계를 조금 확장하거나 축소하는 약간의 변형을 말할 뿐이다. 하지만 서로의 존재 없이는 지금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단단히 얽혀있는 만남의 관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천도(天道)를 말하는 『중용』 22장은 이런 만남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오직 천하에 지극히 성(誠)한 사람이라야 그 자신의 성(性)을 다할 수 있다. 

惟天下至誠 爲能盡其性 

그 자신의 성(性)을 다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의 성(性)도 다할 수 있고,

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 

다른 사람의 성(性)을 다할 수 있으면 만물의 성(性)도 다할 수 있고,

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 

만물의 성(性)을 다할 수 있으면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고

能盡物之性則可以贊天地之化育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으면 더불어 천지에 참여할 수 있다. 

可以贊天地之化育則可以與天地參矣


성(性)을 다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문장은 자신의 성(性)을 다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파급되고 마침내는 만물들까지 모두 자신의 성(性)을 다하게 되기에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性)의 핵심은 화육(化育)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때 화육(化育)은 낳고 자라게 함이고, 변화와 상통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변화(變化)라는 말에서 변(變)이 어떤 동일성을 기준으로 하는 정량적 차이를 말한다면, 화(化)는 존재가 다른 존재로 바뀌는 사태를 말한다. 육(育)은 차이의 관점에서는 변(變)이고 낳음은 이전의 존재가 죽고 다른 존재를 낳음을 말하기에 화(化)다. 그래서 성(性)을 다한다는 말은 서양의 형이상학이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구현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화육(化育)의 능력을 다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렇다면 자신의 성(性)을 다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성(性)을 다한다는 의미는 다른 존재로 화(化)하게 되는 만남을 겪는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만남을 사건적 만남이라고 한다.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이라면 사고가 되겠지만, 그것을 계기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은 사건이다. 이런 사건화는 사람에 그치지 않고 만물에게까지 파급된다고 이 문장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을 제외한 천지만물들은 인간과 무관하게 스스로 그러한 늘 그대로인 자연(自然)아닌가? 그래서 알랭 바디우는 자연에서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령 온 지구상의 핵폭탄이 동시에 터져서 지구상의 생명체란 생명체는 모두 죽는다 해도 그 지구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일 뿐이다. 자연에게 그것은 특별한 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을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 아닐까? 자연을 존재자들의 집합으로 생각한다면, 그 집합이 유지되는 것은 그 안의 존재자들이 겪는 어떤 일도 자신의 화육(化育)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지만물, 즉 자연은 다른 존재로 화(化)하는 사건화의 총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인간이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고, 더불어 천지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될까? 자연은 인간과 무관하게 어떤 경우에도 화육(化育)할 텐데 말이다. 더불어 천지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은 인간이 천지화육의 프로세스에 단지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면서 능동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이것은 인간의 활동, 즉 문명에 대한 유가(儒家)의 독특한 관점을 나타낸다. 대개 문명은 자연 상태와 대립 개념으로 이해된다. 가령 도가(道家)는 자연에 반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해서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말하고, 17세기 서양은 미개상태를 벗어난 진보의 의미로 이해했다. 하지만 유가(儒家)에서 문명은 천지의 화육(化育)과 리듬을 맞출 수 있을 때에만 최고의 경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천(天), 지(地)”에 참여할 수 있는 인간은 천하에 지극히 성(誠)한 사람이라고 하는 성인(聖人)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보통의 인간은 성인(聖人)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하기에 “천(天), 지(地)”와 짝하는 “인(人)”의 개념으로 “천지인”을 이해하기는 곤란하다. 


작금의 AI사태는 닭들의 끔찍한 사육환경이 빚은 참극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도시화가 대부분 진행된 형편에서 옛날 농가에서의 사육환경으로 되돌아간다면 많은 사람들이 질 좋은 단백질을 얻기는 곤란할 것이다. 거의 직거래에 가깝지만 비쌀 수밖에 없는 생협의 계란 가격이 간단치 않은 현실을 말해 준다. 뿐만 아니라 위탁운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양계농가의 고충도 외면하기 어려운 문제다. 이처럼 우리가 처한 상황은 말 그대로 얽히고설킨 실타래이기에 모든 것을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로 환원할 수만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중용의 대답은 치곡(致曲)이다. 


그 다음은 치곡(致曲)이니, 한쪽 귀퉁이의 일을 지극히 하면 능히 성(誠)할 수 있다.

其次 致曲 曲能有誠 


치곡(致曲)! 한 귀퉁이의 일을 지극히 한다는 말이다. 사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처한 구체적 현실에서의 일이고 그것은 천지의 운행에 비하면 정말 한 귀퉁이의 일에 불과하다. 인간의 길은 이미 성(誠)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성(誠)하려는 데 있기에 자신이 처한 한쪽 귀퉁이의 일에 지극정성을 다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성(誠)하면 나타나고, 나타나면 드러나고, 드러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감동시킬 수 있고,

감동시키면 변한다. 변하면 다른 존재로 화할 수 있다. 오직 천하에 지극히 성(誠)한 사람이라야 다른 존재로 화할 수 있다.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唯天下至誠 爲能化


여기서 형(形). 나타나고, 저(著). 드러나고, 명(明). 밝아지는 것은 구체적 현실에서의 처한 관계가 나타나고 드러나고 밝아진다는 의미인데, 그것은 이미 드러나 있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식재료로서 닭과 인간의 관계라면 그 관계 자체는 더 이상 나타날 것도 드러날 것도 없이 이미 드러나 있는 관계다. 이미 드러나 있는 관계만을 생각한다면 가능한 한 많은 식재료를 생산하기 위해서 별 짓을 다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치곡(致曲)의 의미는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것이 아니다. 치곡(致曲)은 그동안 감추어져 있거나 드러나지 않던 관계가 드러나고 밝아지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만 해러웨이 말대로 사용가치나 교환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만남의 가치를 더해서 셈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셈은 유니버셜한  셈법이 아니고, 영원히 고정된 것도 아니기에 우리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셈해보기를 멈추지 않아야 할 것이다. 


글_최유미



  1. Donna J. Haraway, "When Species Meet: Part1. We have never been human", (200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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