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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씨앗문장

[씨앗문장] 쓰기가 살린 삶, 정약전

by 북드라망 2014. 10. 22.

살기 위한 어떤 쓰기,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 김훈 선생의 정약전을 보고

 


창대가 참게 여러 마리를 잡아와서 정약전에게 보여 주었다.

“섬에도 민물에는 민물 것이 삽니다. 자리가 있으면 사는 게 있지요.”
라고 창대가 말했다. 고향 두물머리의 강가에서 보던 참게였다. 고향의 강에서 게들은 가을에 하류로 내려갔다가 봄이 오면 마재의 물가로 올라왔다. 마재의 참게가 바다를 건너 흑산까지 올 리는 없을 터인데, 집게다리에 난 털과 둥근 몸통은 똑같았다. 참게들의 딱지에서 거품이 끓었다.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갈 곳이 없었는데, 돌아가려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서 복받쳤다. 정약전은 손가락으로 참게를 건드려 보았다. 참게가 집게를 벌리며 다리를 추켜들었다. 고향의 참게와 하는 짓이 같았다. 
저녁에 정약전은 참게에 대한 글을 썼다. 난생처음 쓰는 글처럼 글자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섬의 계곡에 참게가 있다. 내 고향 두물머리의 강가에서도 볼 수 있었다.
다리에 털이 있다. 가을에 강물을 따라서 내려갔다가 봄이 오면 거슬러 올라와서 논두렁에 새끼를 깐다.

……

쉬운 글이었다. 글이라기보다는 사물에 가까웠다. 이처럼 쉬운 글이 어째서 눈물겨운 것인지를 정약전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고, 기댈 곳이 없이 다만 게를 마주 대하고 있기 때문인 것도 같았다.


- 김훈, 『흑산』(黑山), 학고재, 2011, 130~131쪽


신유사옥(신유박해)으로 국문(鞠問/鞫問 : 국청鞠廳에서 형장刑杖을 가하여 중죄인을 신문하던 일)을 받은 후 정약전은 흑산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는 그 섬의 해양생물의 분포와 생태 등을 자세히 기록한 『자산어보』를 남겼다. 형제이자 지기였던 동생 정약용은 유배지인 강진에서 유학경전에 대한 해석과 사회개혁안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그는 어째서 해양생물학서였을까.


“이 책은 소설이다.” 김훈 선생의 소설 『흑산』 ‘일러두기’의 1번 항목이다.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황사영 등 여러 실존인물이 등장하지만, 허구의 이야기들과 얽혀 있으므로 “누구도 온전한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용문의 정약전은 소설가 김훈의 정약전이고, 내가 만난 정약전도 그다. 『흑산』에도 역시 김훈 선생 특유의 파토스를 일으키는 문장들이 많이 나오는데, 유독 내 목울대를 뜨겁게 만들었던 문장은 정약전이 참게에 대해 쓴 글이었다. “섬의 계곡에 참게가 있다.”


김훈 선생은 그 글의 눈물겨움이 정약전에게 ‘돌아갈 수 없고 기댈 곳 없이 고향의 것과 똑같은 게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눈물겨웠던 것은, 그가 유배지에서 처음 쓴 글이 어떤 생각도, 감정도, 읽어 오고 쌓아 온 지식도 드러나지 않은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평생 읽고 쓰기가 업인 선비로, 학자로 살아온 사람이, 남도 끝 섬으로 유배를 왔다. 동생의 죽음(정약종)이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게 했다. 살아서 다시 고향 땅을 밟을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끊겨 버린 그 시간, 그 공간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정약전은 신유사옥때 흑산도에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삶을 마쳤다. 이미지는 KBS 한국의 유산 『자산어보』 편


배우고 익히는 것―공부가 곧 삶인 사람이, 읽는 것이 힘들고 쓰는 것이 두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참게’가 길을 열어주었다. “섬의 계곡에 참게가 있다.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내 고향 두물머리의 강가에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무수한 감정과 생각은 괄호 안에 묶어 버리고 담담히 드러난 사실만 기록한 설명문을 쓸 수밖에 없기에, 하지만 그것 자체가 숨통을 틔워 주고 그를 살게 해주는 쓰기였기에, 눈물겨웠던 것이다.


누구나 일생에 한번쯤은 국문을 받듯 주변 사람들로부터 아니면 일들로부터 몰아세워지고, 어떤 종류의 ‘유배’를 살 때가 있다. 사위가 캄캄하고 아득하며 낯선 말이 오가는 곳에, 내던져지기도 하고 자처해서 들어가기도 한다. 그동안 자신을 표현하던 단어, 문장, 사람들 틈에 있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울 때, 그것에 대해 느끼는 너무 짙은 환멸에 내 자신이 질식할 지경일 때, 그곳에서부터 헤어나는 길은, ‘쓰기’일 수 있다. 아니 ‘쓰기’는 그 어떤 길보다 가장 효과가 좋으며, 자기를 스스로 치유하고 나아가 이전의 나에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생에 한번, 어떤 종류의 '유배'를 살때 그 곳에서 헤어나는 길은 '쓰기'라고 생각한다.


이때의 쓰기는 나의 ‘감상’이나 ‘생각’보다는 그것을 배제한 데서 시작하는 게 좋겠다. 어떤 분야를 탐구하여 쓰든, 어떤 사물에 천착하여 쓰든…… 담담하게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는 그 ‘쓰기’가 결국 나를 캄캄한 중에도 살게 하고, 쓰게 하고, 다시 살게 해서…… 결국은 내 쓰기가 곧 살기일 수 있도록.



흑산 - 10점
김훈 지음/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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