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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과학/과학 톡톡

당신의 '생명'은 안녕하십니까

by 북드라망 2013. 12. 31.

한 권의 책, 세 개의 시선



『침묵의 봄』, 레이첼 카슨 지음



#1


길고 세심한 연구 끝에 공장의 화학자들은 2,4-D가 대기에 직접 노출된 야외의 물웅덩이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병기창에서 폐기된 물질들이 인간의 개입 없이 대기·물·태양 빛에 의해 화학작용을 시작했고, 오수처리장이 실험실 구실을 하면서 전혀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물질에 닿은 식물들은 모두 생명을 잃을 정도로 피해가 컸다. …… 호수와 시냇물, 공기와 태양열이 촉매제 구실을 한다면 ‘무해’하다는 표식이 붙은 화학물질들에서 위험한 독성을 지닌 새로운 화학물질이 만들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 그들은 비교적 무독한 화학물질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유독물질이 만들어진다는 점에 우려를 나타냈다. 두 가지 이상의 화학물질이 섞일 경우 강에 방류된 방사성폐기물과 화학물질 사이에서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방사능물질이 이온화하면 원자의 재배열이 쉬워지는데, 이때 화학물질의 본질이 완전히 변하기 때문에 그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물론이고 결과를 통제하기도 불가능해진다. (68쪽)



『침묵의 봄』을 읽으면서 점점 분개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닿기만 해도 죽는 독극물을 만들 수 있는 거야! 자연에 대해 무지하고 탐욕스러운 과학자들, 비행기로 독성의 살충제를 무차별적으로 뿌린 사람들을 저주(?)하면서 읽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어라?’하고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과학자 탓만 할 수 없는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콜로라도 주의 한 지역에서 나뭇잎이 누렇게 시들고 열매가 맺히지 않는 증상이 발견되었다. 주변 농작물들이 서서히 말라죽고 사람들도 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조사관들은 제초제에 쓰이는 2,4-D 성분이 지하수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예전에 근처에서 전쟁용 화학무기를 생산하는 공장이 있었는데 거기서 나온 유출수가 원인인 것 같았다. 헌데 확인결과, 그 공장에서는 2,4-D 성분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무해한 약품이거나 설령 유해하더라도 전혀 다른 종류의 화학물질을 생산했는데, 자연발생적으로 2,4-D 성질을 띠게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화학물질은 특정한 기능을 하도록 원자구조를 조직해서 만들어낸다. 원자구조가 바뀌면 물질은 다른 특성을 띤다. 보통 화학물질의 경우엔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구조가 바뀐다. 플라스틱 용기가 썩는데 80년 가까이 걸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이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기온이나 습도, 태양열, 혹은 다른 화학물질이나 생명체가 변화를 가속화시킬 때다. 콜로라도에서 일어난 일이 이렇다. 그래서 사람의 개입 없이 자연히 화학물질의 원자구조가 변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유독성의 화학물질이 태어난 것이다.


사실 화학물질이 변한다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화학물질도 물질이고, 물질의 원자구조가 재배열되는 일은 언제나 일어난다. 그게 없었다간 우리는 소화를 할 수도 없고 죽어도 썩지 않는 송장이 될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왜 과학자들은 이를 미리 알지 못했나’라는 질문이 떠오른 것이다.


그 점에서 나는 과학자들이 양심이 없고 탐욕스러웠다고 비난했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알려주지 않았거나 숨기고 있다는 식으로. 하지만 과학자들도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과학자들이 생물에게 피해가 거의 없는 화학물질을 개발했음에도 생태계 파괴나 멸종이 일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과학 자체가 자연에서 일어나는 화학물질의 변화를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과학자들이 아니라 과학적 지식 자체에 있다.


오늘날 자연에 대한 지식은 대부분 실험으로 만들어진다. 실험은 실험대상이 맺고 있는 특정한 인과관계에 주목한다. A물질이 B와 만나면 어떻게 변할까, 여기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 하나의 관계만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존재든 수많은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관계에 따라 다르게 변해간다. 그러니 물질이 자연이라는 무한한 관계 속에 놓였을 때, 인과관계를 알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과학은 이런 양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제한적’이며, 근원적인 예측불가능성을 안고 있다.


따라서 환경오염에 대한 진짜 문제는 ‘자연을 안다’라고 여기는 과학적 지식에 있다. 환경오염은 과학이 갖고 있는 예측불가능성이 드러난 결과다. 물론 우리는 이 제한된 지식을 활용하면서, 많은 성취들을 이뤄냈다. 그것들은 소중하다. 그럼에도 우리의 지식이 제한적이라는 것, 근원적인 예측불가능성을 안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럴 경우 우리는 과학이 만들어낸 환경문제를 다시금 과학의 발전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수질오염을 해결할 수 있는 화학물질을 개발하거나 로봇물고기로 만드는 방식으로. (로봇물고기는 실제로 4대강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과학적 지식을 어떻게 활용할까. 레이첼 카슨은 과학자들의 역할을 제한할 민주적 절차와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공청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실제 화학물질이 자연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아는 농부들, 제초제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환경운동가들, 자기 애완견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설명해줄 시민들이 함께 이야기하면서 과학을 사용하길 원했던 것이다. 아마 그것이 과학의 위험성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우리 삶에 선용하기 위한 방법일 것이다.


_박영대



#2


살충제는 대부분 비선택적이다. 없애려는 특정한 종만을 제거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맹독성이라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그 살충제를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살충제와 접촉하는 모든 생물, 가족들의 사랑을 받는 고양이, 농부가 키우는 가축, 들판에서 뛰노는 토끼, 하늘 높이 날아가는 종달새가 모두 위험에 빠진다. 이런 동물들은 인간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 사실 동물들과 그 주변 환경의 존재 덕에 인간의 삶이 더욱 즐거워진다. 그러나 인간은 그 보답으로 갑작스럽고 무시무시한 죽음을 선사한다. 셸던의 자연 관찰자들은 죽음에 이른 종달새의 증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근육 조절이 안 되어 날거나 설 수 없음에도 새들은 옆으로 드러누워 계속 날갯짓을 해댔다. 발톱을 오그리고 부리는 반쯤 벌린 채 힘들게 숨을 쉬고 있었다.” 이보다 더 불쌍한 것은 얼룩다람쥐였다. “죽음에 이른 얼룩다람쥐의 모습은 특별하다. 몸을 웅크린 채 앞발로 가슴을 잡고 있었다. ……머리와 목은 축 늘어졌고 입에는 더러운 흙이 들어 있었는데, 불쌍한 다람쥐가 죽어가면서 땅을 물어뜯기라도 할 듯 몸부림쳤음을 알려준다.” 살아 있는 생물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묵인하려는 우리가 과연 인간으로서 권위를 주장할 수 있을까?(126쪽)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우리 모두 환경보호, 좋은 환경 후손에게’, ‘내가버린 오물폐수 내입으로 돌아온다’와 같은 구호에서부터, 인간 역시 거대한 생태 그물망의 일부라는 철학적 명제,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환경부의 정책까지.
 

가끔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는 너무 틀에 박힌 이야기라며 투덜대기 일쑤다. 또 그것이 지당한 말이지만, 그렇다고 자연을 위해 뭔가를 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도대체 난 어떤 이야기를 바라는 거지?’ ‘좀 더 획기적이고 멋있는 환경담론 내지 생태철학이 나오면, 좀 더 환경을 사랑할 건가?’


『침묵의 봄』에서 레이첼 카슨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전히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처음엔 레이첼 카슨의 말이 무척이나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뭐 이래? 환경학 고전이라 그런가?’^^;; 내가 파악한 그녀의 말의 요점은 이랬다. ‘자연이 하나의 관계망임을 깨달지 못한 인간의 무지로 인해 살충제를 무차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결과 수많은 동식물들이 죽어가고 있고, 심지어 인간들마저도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살충제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이에 제한을 가해야 한다.’ 하지만 책장을 덮으며 그녀의 말을 진부하다, 상투적이다라고 평가할 수 없음을 알았고, 그런 평가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침묵의 봄』 전체에 걸쳐 지속적으로 살충제로 인해 친구들이 죽어나가고 있다며 강조해 말한다. 또 그 친구들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게 죽어갔을지를 떠올린다. 가족들의 사랑을 받는 고양이, 농부가 키우는 가축, 들판에서 뛰노는 토끼, 하늘 높이 날아가는 종달새, 집 뒤뜰 나무에 둥지를 틀고 새끼들을 키우던 홍관조와 박새들,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활기찬 봄을 알리는 철새들, 겨울이면 내가 달아놓은 모이통에 모여들었던 다우니, 동고비들 등등. 그녀는 그들과 직접 교류했고, 친밀감과 감정적 연대를 쌓았다. 자연은 그녀의 소중한 벗이었다. 이들은 거창한 철학적 환경담론으로부터 이끌어낸 친구가 아니다. 일상 속에서 언제나 마주치며 서로의 존재자체가 서로에게 즐거움을 주는 그런 흔하디 흔한 친구다. 그런데 살충제 때문에 소중한 친구들이 죽어나갔다.


자기 옆에서 친구들이 죽어나간다면, 이를 보고 누구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레이첼 카슨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더 이상 친구들이 죽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그것이 별 것 아닌 일이든, 거창한 일이든 말이다. 살충제의 유해함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널리 알리고, 살충제가 친구들을 무분별하게 죽인다고 계속해서 말한다. 또 해충방제가 불가피하다면 살충제를 적정히 사용하거나 다른 방법을 쓰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친구들을 살리기 위해 함께 싸우는 일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한다. 누군가는 살충제로 인한 새들, 물고기의 죽음들을 지루하게 나열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대안이 고작 그거냐며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걸 생각할 새도 없었을 거다. 소중한 친구들을 빨리 구해야 하니까.
 

나는 카슨을 보며 자연에 대한 감정적 연대가 없이, 환경에 대해 말하는 일이 얼마나 허위적이고 공허한지 알았다. 나는 환경에 대해 관심도 없었으면서, 그 무관심을 감추기 위해 이러쿵 저러쿵 변명만 했다. 차라리 솔직해지자. 자연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환경담론에 대한 불평불만은 그만 두어야겠다. 카슨처럼 자연에 대한 친밀감과 감정적 유대를 쌓아나가자.
 


주위의 고양이들, 새들, 여러 곤충들, 그리고 집 안의 화초들과 거리의 나무들, 심지어 사람들까지. 이들을 찾아가고, 만나 즐거워지자. 등산과 산책도 거르지 말자. 그들을 직접 체험하고 알아야 이들을 사랑할테니까. 우리의 마음 한 켠에 자연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어찌보면 이것이야 말로 가장 진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카슨으로부터 배웠다. 우리는 자신이 사랑하지 않고, 관심도 없는 것들을 구하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는 것을. 단지 상투적이고 윤리적인 당위로는 말이다.



_정철현



#3


암을 치료하는 물질이 암을 유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이 물질은 바로 방사능이다. 방사능은 암세포를 죽이는 동시에 암을 일으킨다. 오늘날 암을 치료하는 데 자주 사용되는 화학물질 역시 마찬가지다. 왜일까? 이 두 가지 물질 모두 세포 호흡 과정을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이미 잘못된 방식으로 호흡하고 있는 암세포에 또다시 손상을 입히면 그 세포는 죽고 만다. 하지만 정상세포는 처음으로 호흡에 문제를 일으키게 되므로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악성 질환을 일으키는 것이다.(269쪽)


1962년에 출간된 『침묵의 봄』은 환경운동의 고전으로 불린다. 그런데 ‘고전’이란 뭘까? 그저 옛날에 나온 책, 예전 한 때 센세이션을 일으킨 책을 가리키지는 않을 터. 고전이 고전이 되는 것은 그 책이 ‘지금 이곳’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오래되었지만, 가장 현재적인 책. 이것이 고전이다.


그러나 『침묵의 봄』에 나오는 얘기들은 좀 진부하게 느껴진다. 대부분이 살충제와 같은 화학적 방제 관련 얘기고, 지금 우리는 그것의 유해성을 잘 알고 있다. 화학약품의 유해성을 알기 위해서라면 굳이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건 순전히 정보로만 볼 때 그렇다. 말한 대로 이제는 화학적 방제의 위험성을 잘 안다. 그래서 생물학적 방제에 나섰다. 해충이라 불리는 놈들을 잡아먹을 종(種)들을 이용하는 생물학적 방제. 그런데 이 생물학적 방제가 다시 문제가 되었다. 새롭게 들여온 종들이 해충만 먹는 게 아니라 온갖 것들을 다 먹어치운다.


뿐만 아니다. 농약의 유해성을 아는 우리는 유기농을 선호하게 되었다. 연구실에서 한 때 농활을 갔었던 변산 공동체도 유기농 제배를 했다. 그런데 변산에서 양파 출하가 끝나고 나면, 작고 좀 못난 양파를 몇 무더기씩 보내오곤 했다. 이유는 못생긴 양파들은 팔리지 않는다는 것. 유기농을 찾으면서 농약으로 키워야만 가질 수 있는 예쁜 외모의 농산물을 찾는 거다.



이때문에 유기농산물들은 상처에 예민하게 신경 쓴다. 그래서 포장이 과해진다. 더욱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소량 단위로 포장되어 있다. 내가 봤던 최악의 유기농 상품은 낱개로 하나씩 포장되어 있던 사과였다. 유기농산물을 먹을 때마다 더 많은 화학쓰레기들을 버려야 하는 불편한 진실.


농부들은 농약없이 농약을 쓴 듯한 어여쁜 농산물을 만드느라 고생이 말이 아니고, 못생긴 놈은 버려지고 예쁜 놈만 팔리다보니 가뜩이나 생산량이 작은 유기농제품들의 가격은 올라가고, 거기에 포장재 가격까지 더해져 비싼 유기농을 먹느라 더 많은 돈이 필요하고, 그래서 더 바삐 일하고, 그리고 일해서 지친 몸을 건강에 좋다는 유기농으로 달래고…….


이런 상황들은 마치 방사능이 암을 죽이면서 암을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암을 죽이는 방사능이 정상적인 세포들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주고, 결국 이것들이 암이 된다. 그리고 다시 이 암을 치료하면, 또 암이 만들어지는 악순환. “그저 한 가지 위기에서 또 다른 위기로 옮겨갔고, 골치 아픈 문제를 다른 문제로 대체”하는 악순환(296쪽). 레이첼 카슨이 던지는 첫번째 질문이 이것이다. 단지 살충제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레이첼 카슨이 던지는 두 번째 질문은 좀 더 중요하다. 흔히 환경운동이라고 하면, 인간이 여타의 생명체를 생각하는 문제처럼 여긴다. 그러나 방사능을 보자. 방사능은 암세포를 죽이면서 암을 만든다. 이유는 간단하다. 방사능이 ‘생명’에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암세포는 그런 생명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일반 세포도 그런 생명이다. 환경운동이란 이런 ‘생명’에 대한 문제다.


우리가 놓치는 지점이 여기다. 하나의 생명에게 치명적인 것은 ‘동시에’ 다른 생명에게도 치명적이다.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게 하는 행동은 결국 인간이라는 생명까지 포함하게 되어 있다. 잡초에게 나쁘다면, 그 옆에 우리가 재배하고자 하는 식물에게도 나쁘다. 곤충에게, 새에게 나쁘다면, 인간에게 좋을 리 없다. 새만금 갯벌에서 수많은 생명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을 때, 평생을 그곳에 살던 어부들이 새만금에서 내몰렸듯이 말이다.


난 솔직히 자연보호라는 구호 아래 이루어지는 환경운동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하지만 인간이 살기 위해 자연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인간을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라는 말, 어딘지 익숙하지 않은지. 회사가 살기 위해서는 정리해고는 어쩔 수 없습니다, 국가를 위해서는 그 정도 희생쯤은 감수해야 합니다, 라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는 논리는 자본과 권력의 변명이다. 그 희생에는 언제나 새만금의 어부들처럼 어떤 인간들의 삶을 몰아내는 일이 들어있다. 자연을 희생한다는 건, ‘동시에’ 그런 사람들을 희생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침묵하는 봄은 나무, 새, 곤충 그들의 침묵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침묵이다.



그렇기에 내게 환경운동은 중요하다. 나무, 곤충, 새를 보호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과 어떤 사회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 문제이기에 때문이다. 레이첼 카슨의 말대로, 그건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싸움이 아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과 자본·권력의 싸움이다. 이 생명의 싸움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제주 강정 마을에서, 밀양 송전탑 문제에서, 철도파업 현장에서, 그리고 실직의 두려움에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들 속에서. 그렇기에 레이첼 카슨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두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 당신의 생명, 안녕하십니까.’



_신근영



침묵의 봄 - 10점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에코리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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