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감’에 대한 생각
이기헌(인문공간 세종)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번 오선민 선생님의 신간 『미야자키 하야오와 일상의 애니미즘』을 읽으면서 그런 질문을 여러 번 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관계’다. 작가는 시종일관 사람 그리고 물건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방법을 생각해보라고 권한다. 매일 만나고 함께 일을 도모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잘 해나가야 하는 건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평소 주의를 두지 않는 물건까지도 여기에 포함되다니. 작가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11편의 애니메이션 작품에서 인물들의 관계 맺음, 또 그들 주변에 배치된 물건들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나는 많은 사람 속에 뒤섞여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조용히 혼자서 다른 존재들의 끄달림 없이 지내는 것을 조금 더 좋아한다. 하지만 이 책은 말한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만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명력을 키우는 관계
예전에 새 자동차를 뽑은 친구가 차에 붕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틈만 나면 애정을 담아 붕붕이를 부를 때 난 정말 그 친구가 이상해 보였다. 그래봐야 고철 덩어리인데 그걸 사랑스러워하다니. 그런데 그런 내 마음 이면에는 붕붕이와 친구의 관계가 왠지 특별해 보여서, 나도 혼자 있을 때 내 자동차에 말을 걸어 보았다. 하지만 영 어색해서 몇 번 그러다 말았다. 그때 내 마음을 스쳤던 그 특별함이 아마 생명력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친구는 붕붕이와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을 주고받고 있던 것이다. 작가는 몸을 가진 모든 것들은 다양한 존재들 사이에서 힘을 주고받으면서 자기 생명력을 키운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심장을 작동시켜 바퀴를 굴리며 나를 원하는 곳으로 빠르고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자동차는 살아 있는 존재다.
작가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러한 생명력의 핵심으로 일상을 주목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머무르는 일상적 디테일이 인상적인데, 예를 들어 해적단 비행선 빨랫줄에 걸린 빨래의 종류, 토토로 집 단지의 개수, 키키가 일하는 빵집 벽지의 색깔 같은 것이다. 이런 섬세한 디테일이라니!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그 많은 장면들을 놓쳤음을 알게 되었다. 이토록 폭넓은 시야와 예리한 시각이 어쩌면 두 눈으로는 불가능한 일은 아닐까. 작가는 나우시카에 나오는 오무처럼 등에 여러 개의 눈을 숨겨둔 것은 아닐까 하는 우스운 상상을 할 정도였다. 다시 관계라는 키워드로 돌아가면 우리는 내 주변의 사람, 빨래, 물건, 더 나아가 풍경 전체와 인연을 맺고 있다.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관계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쌓아지는 것이 아니다. 애써 의미를 부여하고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을 매일 쏟아붓지 않으면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오선민, 『미야자키 하야오와 일상의 애니미즘』, 북드라망, 10쪽)고. 그러니 우리는 더 넓고 더 깊게 다른 존재에 시선을 두어야 한다.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자리 자리다. 나는 아이들 앞에서는 엄마로, 부모님 앞에서는 딸로, 책 앞에서는 읽는 사람으로 역할이 다르다. 조건에 따라 나는 다른 자리를 가져야 한다. 또 아이들 역시 내 앞에서 내 아이들이지 학교에서는 또 다른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바깥에서 신고 다니는 신발의 자기 자리는 신발장이지 식탁이 아니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내 자리를 잘 알아야 하는 것과 더불어 다른 존재들의 자리도 우리는 보아야 한다. 만물은 각자 자리한 곳에서 다른 것과 서로 의지하며 그 장을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그때 그 장은 와글와글 생명력이 일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가마 할아범, 가마 할아범의 재떨이와 꽁초, 온천물의 관계가 온천장을 돌리고 있다고 본다. 서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면 온천장은 결국 생기 잃어 신들이 찾지 않는 폐허가 되고 말 것이다. 만물이 우주적 관계성 속에 놓인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면 무기력의 늪에 빠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나답게
작가는 자기 자리 잘 찾는 방법으로 애니미즘이라는 관계적 사고법을 제안한다. 애니미즘은 만물에 혼이 있다는 의미로 생명이 다양한 것들과 이루는 관계에 따라 그 정체성이 결정되고, 시시각각 중단없이 변화의 장에서 자기 정체성을 계속 바꾸어 내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소피의 청소하는 모습에서 이러한 관계성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소피는 집안 물건의 필요와 쓸모를 알고 위치를 계속 조정하면서 청소를 했다. 나는 소피가 집안을 정리하며 자기의 취향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관계성 속에 놓인 자기 자리를 ‘자기 다운 방식’으로 찾으라는 말과 혼동도 느꼈다. 이 둘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가족들이나 다른 물건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소피의 취향으로 집이 꾸며진다면 당연히 그 집은 소피에게나 마음에 드는 곳이 될 것이다. 관계성이라는 점에서 생각할 때 소피의 자기다움은 자기 취향 고집과는 반대편에 있다. 자기다움은 자기만의 철학을 만들어 가는 자가 가지는 특권이다. 작가는 나 바깥의 다른 존재들과 관계 속에서 내 욕망과 재능을 구체적으로 생각할 때 나다움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어느 날 노파가 된 소피. 매일 아침마다 주름이 늘어가는 얼굴을 고민하는 나로서는 이 사건은 청천벽력과 같은 일인데, 소피에게는 큰일이 아니다. 소피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주변의 존재들과의 관계다. 집을 청소하고, 식사 예절에 대해 잔소리하고, 친구를 구하기 위해 성을 부숴 버리며 자신감 있게 문제를 해결한다. 할머니 소피는 자기 판단을 믿고 관계를 이끌어 간다.
〈마녀 배달부 키키〉가 보여주는 자기다움도 인상적이다. 키키는 풍요로운 도시로 이사 오면서 타인의 생각, 타인의 기준에 흔들리며 살게 되고, 마법을 잃어 하늘을 날 수 없게 되었다. 나도 종종 내가 잘살고 있는지, 이렇게 하는 게 정말 맞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질문의 시작은 내가 아니라 남의 말이다. 남의 평가에 마음을 쓰다 보니 방법을 찾지 못하고 화가 나거나 우울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키키 역시 그런 곤란한 날들을 겪는다. 키키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비행하고 마침내 마법을 다시 찾게 된다. 나답게 살려면 자기에 대한 신뢰를 놓치면 안된다. 그 정도는 되어야 남도 살리지 않겠는가. 그러니 질문을 하되 그 질문에 대한 선택과 판단은 나여야 한다. 삶에 정답은 없다. 다만 끊임없이 ‘변화의 파도를 타며 운명처럼 주어지는 낯선 과제를’(같은 책, 338) 나답게 풀어가야 한다.
책에는 답이 없다
작년 5월 첫째 아이와 함께 도쿄에 있는 지브리 스튜디오에 갔었다. 아이와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그리는 작품 몇 번씩 보았기에 한껏 기대하며 스튜디오를 관람했던 기억이 있다. 이번 오선민 선생님의 『미야자키 하야오와 일상의 애니미즘』을 읽으면서 ‘아 이 책을 읽고 지브리에 갔더라면…’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의 내용, 작가의 해석, 감독의 의도 등을 좀 더 알게 되니 지브리 스튜디오가 그때와는 다르게 뭔가 더 잘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책을 시작했을 때와는 다른 생각에 이르렀다.
작가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등장한 왜가리-남자를 ‘책’으로 해석했다. 다양한 해석의 포인트가 있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왜가리-남자가 주인공 마히토를 아랫세계로 안내하는데 책 역시 독자를 다른 세계로 안내한다는 것이다. 작가가 말하는 책의 정의를 읽어 보자. ‘책이란 우연처럼 다가오는 어떤 만남이다. 타인의 어떤 삶이다. 그것은 한 번의 만남일지라도 나의 시야를 넓힌다. 읽어야 할 것, 만나야 할 스승이 따로 있지 않다. 다만 펼쳐질 어떤 우연을 긍정하라. 이런 답도 저런 답도, 찾았다가 잃어 가며, 계속 친구를 사귀듯 읽으라.(같은 책, 468)’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일상의 애니미즘』을 읽으며 ‘아 이 책을 읽고 지브리를 갔더라면, 애니메이션을 봤더라면….’ 하는 식으로 아쉬움을 말했었다. 왠지 이 책이 어떤 정답을 가르쳐줄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말에 따르면 책은 진리가 아니고 나를 안내할 뿐이다. 안내자를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고 그 세계를 내 방식으로 나답게 만나야 한다.
나는 처음 이 글을 쓰면서 잘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질문했다. 책의 안내에 따르면 주변의 모든 것과 다양하게 관계 맺으며 일상을 살려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살 것인지에 대해 비전 탐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일상적인 나의 리듬을 깨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일하고 공부하고 싶다. 매주 월요일은 대청소의 날이다. 주말에 가족들이 집에만 있었기 때문에 집을 한번 꼭 털어내야 쾌적하게 한 주를 보낼 수 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밥하는 일은 가족의 건강에 중요한 미션이다. 그런데 종종 숙제에 쫓기고, 일에 쫓긴다며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대충 해결하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한다고 과연 내 시간을 아낀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시간만큼 숙제를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일을 더 하는 만큼 가족들의 식사는 소홀해도 될까. 그렇지 않은데도 막상 쫓기다 보면 리듬을 금세 잃고 만다. 지난주도 그랬다. 엄마의 반성은 언제쯤 끝날까. 이번 주는 행사가 좀 많지만 잘해 보고 싶어진다. 늦게 들어오는 날 식구들 굶기지 않으려면 내일 밀키트를 만들고 냉장고를 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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