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무엇이 될 것인가?
강평옥(인문공간 세종)
디테일의 미학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를 모두 봤다고, 여러 차례 봤다고, 그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런 그라도 『미야자키 하야오와 일상의 애니미즘』을 읽는다면 아마도 그런 장면이 있었나, 그런 의미가 있었냐며 영화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물론 오선민 작가가 미야자키 감독의 영화를 훨씬 많이 봤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주요 이유는 횟수가 아니라 ‘시선’에 있다. 그 시선은 몇 번이나 반복 재생해도 웬만해서는 보이지 않는 사소한 디테일을 향하고 있다. 그 디테일은 나, 인간, 주인공, 목적 중심의 시선으로는 볼 수 없는 세상과의 연결 고리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내가 놓쳤던 영화 장면을 재생해 본다. 몇 가지만 예를 들면 <이웃집 토토로> 자매가 엄마를 보겠다는 목적이 무산되자 마루에 완전히 뻗어버린 것, 그 아이들 곁에서 간다네 할머니가 빨래를 같이 개자고 한 장면을 다시 본다. 목적을 가진 기다림의 고통, 그리고 이를 해결하는 작고 사소한 배려의 힘을 생각해 본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치히로가 온천장에서 몰래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다. 큰 몸의 무의 신이 치히로를 가려줘 위기를 모면한 장면을 다시 본다. 치히로의 모험은 드러난 하쿠의 호의 이외에도 의도하지 않은 무의 신의 도움, 또 눈에 보이지 않은 수많은 것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는 <마녀 배달부 키키>의 2층 하숙집을 다시 본다. 이제야 라떼 다해본 고생담쯤으로 치부하느라 보이지 않았던 키키의 어둑한 방, 우울한 모습이 보인다. 모두 나에게 그저 목적지로 가는 길에 만난 엑스트라, 우여곡절 정도로, 자세한 내용은 기억에서 삭제된 장면이었다.
나는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소중한 순간과 디테일을 사소하다는 이유로 놓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책을 읽고 다시 영화를 재생하며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묻는다. 많은 것을 띄엄띄엄 보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만물의 의존, 일상의 철학
『미야자키 하야오와 일상의 애니미즘』은 미야자키 감독의 영화 11편 전(全)편을 ‘일상의 애니미즘’으로 해석한 책이다. ‘일상의 애니미즘’에서 ‘애니미즘(animism)’은 인간 이외의 존재에도 혼이 있음을 인정하는 사고이다. 애니미즘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만물이 서로 의존하며 존재한다. 오선민 작가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가마 할아범의 일터를 사물 중심으로 묘사한다. 거기 낡은 시계, 오래된 도자기, 하도 많이 봐서 뚱뚱하게 부푼 책, 자주 사용하는 칫솔, 재떨이 꽁초가 있다. 미야자키 감독은 그 사물 하나하나가 할아범의 살아온 세월, 그의 됨됨이를 말해준다고 한다. 그 사물들이 없는 할아범은 그 할아범이 아니다. 오선민 작가는 정리된 테이블을 보면 그 테이블을 정리했을 누군가, 또 누구라고 특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누군가는 썼을 세면대, 수건을 통해 공간에 참으로 많은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알든 모르든 만물과 할아범은 서로 의지하고 있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도 누군가가 고치고 닦았을 집기, 책상 위에 놓인 사소한 사물이 많다. 몰랐지만 나도 만물과 서로 의지하고 있다.
<마녀 배달부 키키>의 도입부는 키키가 바람 부는 언덕에 누워 라디오를 듣는 장면이다. 오선민 작가는 이 순간 바람이 불 때 만물이 어떻게 의존하는지 사운드에 주목한다. 하늘의 구름이 이동하고, 호수에는 잔물결이 만들어지고, 키키 주위의 꽃이 각자의 무게로 흔들리고, 머리카락과 치마도 제멋대로 움직인다. 풀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 벌레 날갯짓 소리까지 한데 섞이는 순간이다. 이렇게 보면 키키라는 인간이 바람 부는 언덕에서 라디오 듣는 것에 불과한 장면이 아니다. 그곳은 모든 것들이 모든 방식으로 서로 의존하는 애니미즘 현장이다.
‘일상의 애니미즘’에서 ‘일상’은 무슨 의미인가? 오선민 작가는 영화의 사건이 ‘일상’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벌어진다고 한다. 바로 요리하기, 청소하기, 빨래하기, 책 읽기이다. 지구를 구하고 아픈 엄마를 걱정하고 친구를 저주에서 벗기려고 해도 식음을 전폐하고 전투력에 불탄다고 될 일이 아니다. 먹고 자고 치우는 일상을 보내지 않고 해낼 방법이란 없다. 지금, 여기라는 일상에서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것 이외에 뾰족한 수는 없다.
최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의 일상은 책 읽기이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에 울던 마히토는 사라져버린 새엄마를 돕기 위해 낯선 길을 간다. 자신의 욕망만 붙잡고, 자신만 생각하던 마히토가 함께 있는 누군가에게 시선을 향한 것은 책을 읽고 나서이다. 마히토가 읽은 책은 친구 때문에 울고 웃으며 어떻게 훌륭한 사람이 될지 고민하는 내용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많이 아는 ‘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나와 연결된 누군가와, 어떤 일도 겪을 수 있는 커진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 중심이 아니라 만물이 의존하는 관계로 들어가는 힘은 특별한 곳에 있지 않다. 일상에 있다.
반복해서, 많이, 계속 쓴다
애니미즘의 세계에서 나는 ‘누구’가 아니라 ‘누구의 무엇’으로 존재한다. 만물이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미야자키 감독의 영화를 ‘그대들은 누구의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한 탐구로 해석한다. 책의 맨 마지막 <보론>에는 미야자키 감독이 미리 정한 시나리오를 그림과 영화로 구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미야자키 감독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자기만의 기술을 ‘반복해서 그린다, 많이 그린다, 계속 그린다’로 간단히 정리한다. ‘반복, 많이, 계속’은 동어 반복이 아니다. 차이가 있다. 자신이 찾아야 할 이미지를 발견할 때까지 ‘반복’하고, 이렇게 포착한 이미지를 ‘많이’ 그려서 정교화하고, 여기에 ‘계속’ 디테일을 붙이는 다른 그리기이다. 그림을 그려가면서 장면을 수정하는 동안 콘티는 매번 바뀐다. 그의 영화가 압도적인 디테일은 있지만 전지적인 조감도는 나오지 않는 이유라고 한다. 그의 머리에서 나온다고 해도 집단적 전승이라는 조건에서 벗어날 수는 없고, 창작자는 방아쇠를 당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미야자키 감독이 ‘누구의 무엇’인지도 매번 마주치는 만물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변하고 있다.
오선민 작가는 2021년 『그림 동화』 인류학을 시작으로, 22년과 23년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와 『신화학』 해석서, 이번 신간까지 ‘만물의 공생’을 주제로 글을 썼다. 해석한 책과 영화는 다르지만 ‘누구의 무엇’이 되는 주제를 일관되게 탐구했다. 그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로 23년 5월부터 매주 11회 인문공간세종에서 <달살롱> 특강을 진행했다. 또 23년 8월부터 35주 연속 북드라망 블로그를 통해 감독의 전(全) 작품을 배경, 사건, 캐릭터로 나누어 연재했다. 이어 수정을 거쳐 이 책을 썼다.
나는 매주 <달살롱> 특강을 듣고, 매주 북드라망 연재를 읽었던 운 좋은 독자이다. 우연한 기회에 나는 그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읽은 100여 권이 넘는 책을 봤다. 미야자키의 에세이는 물론, 지브리 먹방, 미야자키의 비행과 숲, 지브리 사람들, 미야자키가 영향받은 작품, 음악을 담당한 작곡가 히사이시 조의 생각, 미야자키가 그린 콘티 모음집이 망라된 책이었다. 나는 그가 받은 인세보다 참고 도서 책값이 더 들었겠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그는 이 책들을 읽고, 정리하며 따로 공책에 수없이 이런저런 도표로 그렸다. 미야자키 감독은 대충 떠오르는 심상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오선민 작가도 어쩌다 드는 느낌으로 글을 쓰지 않았음을, 나는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나는 영화를 많이 보고, 글을 여러 번 썼는데도 모르겠다는 말을 하고는 했다. 그의 작업을 곁에서 지켜보며 ‘많이’와 ‘여러 번’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나는 이 책을 읽고 그가 처음 <달살롱>에서 했던 생각을 이번 신간에 그대로 구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참고 도서 참조, 특강, 연재, 수정을 거치며 반복해서, 많이, 계속 썼다. 특강, 연재, 여러 책 집필을 통해 인간 이외의 타자까지 경유한 시선으로 계속 탐구했다. 책을 쓰는 동안 만났던 무수한 타자를 통해 그와 신간은 ‘누구의 무엇’이 되고 있다. 진행형이다. 이 책이 선보이는 디테일은 그런 시선에서 나왔다. 책은 서점에, 디테일은 이 책에 있다. 만물의 의존에 대한 디테일이 궁금하신 분이라면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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