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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철학관

한겨울에 읽는 8편의 소설 - 세계문학을 만나다 ①

by 북드라망 2013. 1. 29.

 한겨울에 읽는 8편의 소설 - 세계문학을 만나다 ① 


이야기는 ‘나’를 바꾼다




판글로스를 그토록 가련한 상태로 만들어 놓은 원인과 결과, 그리고 충족이유에 대하여 물었다. “아!” 판글로스가 말하였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인류의 위안거리이고 우주의 보호자이며 감각 능력을 갖춘 뭇 존재의 영혼인 그 다정한 사랑입니다.” “아!” 깡디드가 말하였다. “저도 겪었습니다 그 사랑을, 뭇 심정의 군주이며 우리의 영혼인 그 사랑을. 하지만 치른 대가는 입맞춤 한 번과 꽁무니에 가해진 스무 번의 발길질뿐이었습니다. 도대체 그 아름다운 원인이 어떻게 선생님께 그토록 추한 결과를 안겨 드릴 수 있었습니까?” 판글로스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오, 나의 귀한 벗님 깡디드! 우리의 존귀하신 남작 부인의 예쁘장한 시녀 빠게뜨를 그대도 아실 거요……”(143쪽)


그가 은인을 찾으려 바다로 뛰어들고자 하였으나, 철학자 판글로스가 그를 만류하면서 리스본의 정박지가 만들어진 것은 그 재침례파 신자가 그곳에서 익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음을 증명해 보였다. 그가 ‘선험적’으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동안에, 선체가 완전히 갈라져, 판글로스와 깡디드 및 덕망 높던 재침례파 신자를 익사시킨 난폭한 선원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악당 선원 녀석은 운 좋게 해안까지 헤엄쳐 갔으며, 판글로스와 깡디드는 판자 하나에 몸을 의지하여 해안에 닿았다.(148쪽) 


깡디드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당황하며 넋을 잃은 채, 또한 피투성이가 되어 온몸을 꿈틀거리며 홀로 탄식하였다. “만약 이곳이 존재할 수 있는 세상들 중 최선의 세상이라면, 나머지 다른 세상들은 도대체 어떨까? 내가 엉덩이에 몽둥이질만을 당한 것은 그래도 괜찮아. 불가레스족 병영에서도 이미 당했으니까. 하지만, 오! 나의 귀하신 판글로스여! 철학자들 중 가장 위대한 분이시여, 당신이 교수형을 당하는 것을 보고도 그 영문조차 몰라야 하다니! 오! 다정하신 재침례파 신자여, 인간들 중 가장 훌륭하신 당신이 항구에서 익사하셔야 하다니! 오! 뀌네공드 아씨여, 처녀들 중의 진주여, 사람들이 당신의 배를 갈라야 하다니!”(154~155쪽)


“이 지구의 나머지 다른 지역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고, 모든 것의 본질이 우리들의 것과는 아예 그 종류가 다른, 이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 두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그리고 깡디드가 다시 덧붙였다. “아마 모든 것이 순조로운 나라일 걸세. 왜냐하면 그러한 나라는 반드시 있어야 하니까. 그런데, 판글로스 선생께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베스트팔렌에서는 내가 보기에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았네.”(216~217쪽)



이 세상 모든 사물을 자르고, 자르면 무엇이 남을까?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그것은 모나드(monad, 단자)이다. 이 신비의 물체는 가장 최소 단위의 존재로 정신적인 것에 가까울 거라고 한다. 라이프니츠의 미분이론은 지금이야 '물질'문명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지만, 애초에는 '정신'적인 것에 가까운 이 실체를 찾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찌되었든 ‘실체’이기 때문에, 각각은 서로에 대해 명확히 독립적이어서(즉 꽉 막아놓고 존재하고 있어서), 원리상 서로가 서로를 들여다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겐 ‘창이 없다.’ 설사 그럴 힘이 있어서 옆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의 머리를 열어본다한들 ‘의식’을 찾아보기는 갠지스 강 모래알들 속에서 다이아몬드 찾는 것보다 어려울 것이다. 모나드 각각은 서로의 '의식'을 확인할 수 없다. 이것으로 ‘우리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라고 확신할 아무런 근거가 없는 셈이 된다. 라이프니쯔는 그들이 서로 관계할 방법이 없다는 이 점을  ‘난점’으로 보았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이것을 간단히 해결한다. 누군가가 모나드를 프로그래밍할 때,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각각 동일한 생각을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이 일치된 생각을 갖도록 미리 프로그래밍한 자, 그는 바로 '신'이다. 각각은 창이 없이 꽉 막힌 단자에 불과하지만, 서로는 저절로(혹은 프로그램에 따라) 조화를 이루며 최선을 향해 나아간다. 이게 바로 판글로스가 의지하고 있던 ‘예정조화설’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최선을 위해 존재한다’는 라이프니츠의 낙관론과 모든 일은 신의 예정된 조화에 의해 ‘원인과 결과’로써 연결된다는 예정조화설은 일종의 프로그램 구성설이다. 판글로스는 이 프로그램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 때문에 예정조화된 세계는 해체될 수 있다는 걸 라이프니츠는 간과한 것 같다. 애초에 구성될 때 궁극적 토대가 없이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 프로그램대로 쫓아가면 그 프로그램의 오류가 단번에 발견될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예정조화는 세계가 신에 의해서 예정되어 있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부터 곧바로 예정 부조화를 만들어 낸다. '예정조화설'의 생성 자체에 '충족이유'가 부재한 것이다. 자신의 이론 자체가 자신을 무너뜨리는 논리가 된 셈이다. 더군다나 현실적인 층위에서 벌어지는 부조화의 역사가 더더욱 그걸 의심하게 만든다. "도대체 그 아름다운 원인이 어떻게 선생님께 그토록 추한 결과를 안겨 드릴 수 있었습니까?" 


다시 말하면, 우선 현실적 층위의 역사가 부조화의 역사였고, 두 번째 아무런 근거 없이 신으로 비약해버렸기 때문에 신을 포기하기도 쉬울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 지점에서 깡디드는 묘한 전회를 이룬다. 그는 예정조화론에 따라서, 예정조화가 이루어진 세계를 향해서, 도대체 쉼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무모함을 보여준다. 그 무모함은 급기야 예정조화론을 무너뜨리는 역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만약 이곳이 존재할 수 있는 세상들 중 최선의 세상이라면, 나머지 다른 세상들은 도대체 어떨까?’ 아마도 모든 담론은 탄생할 때 스스로를 무너뜨릴 담론까지도 품고 태어나는가 보다.

르네 마그리트, <바람의 목소리>





그래, 그래, 바로 그거지. 청춘은 가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건 그런 쬐끄만 기계 중의 하나와 같은 거야.
 

내 아들이라, 아들이라. 아들을 낳아 녀석이 말귀를 알아들을 정도의 나이가 들면 이걸 설명해 줄 거야. 그러나 그때도 녀석이 이해하지 못하든지 또는 듣고 싶어 하지 않든지 해서 내가 저지른 짓거리-야옹거리는 암수 고양이에 둘러싸인 못생긴 할망구를 죽인 것 말이야-을 벌인다고 해도 내가 멈출 수는 없는 없겠지. 녀석도 제 아들놈을 막을 수 없을 거야. 여러분. 그런 일은 세상 끝날 때까지 돌고 돌아서 계속되겠지. 마치 거인처럼 된통 큰 녀석. 그러니까 하날님-코로바 밀크바에 감사드려야지-이 커다란 속에서 구리고 기름 때 낀 오렌지를 이리저리 굴리는 것처럼 말이야. (222쪽)



`Singing in the Rain'에 맞춰 살인과 강간을 저지르는 알렉스 일당(알렉스, 피트, 조지, 딤). 그러나 알렉스는 친구들의 배신으로 감옥에 가게 되고, 본성조차 루도비코 요법으로 개조되어 버린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청춘과 인간본성이 도대체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들 녀석의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날때면 이 소설의 알렉스를 떠올린다. 나는 시계태엽오렌지 같이 이러 저리 꽝꽝 부딪히는 아들의 청춘을 끝끝내 이해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멈추려 애쓰는 것이야말로 사랑과 도덕이라는 가면을 쓴 '루도비코 요법'이라는 것, 이것을 깨닫는 게 왜 이리 어려운 거냐.




우리 모두가 자력으로 괜찮은 귀족이 되는 그런 혁명을 하라

즐겁게 도망치는 당나귀들처럼 뒷발질이나 한번 하라


─D. H. 로렌스의 시, 「제대로 된 혁명」


우리 몸 깊숙이 유기적으로 달라붙어 있는 그 수치심이, 다시 말해 우리 육체의 뿌리 속에 깊이 웅크리고 있어 오직 관능의 불에 의해서만 쫓아낼 수 있는 그 오래디 오랜 육체적 두려움이 마침내 남자의 남근에 의해 일깨워지고 추적당해 쫓겨나고 만 것이다....위장하거나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궁극적인 벌거벗음을 한 남자, 즉 다른 한 존재와 함께 나눈 것이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


미래에 대한 어떤 확신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존재의 가장 훌륭한 부분을 진정으로 믿고, 나아가 그것을 초월한 다른 존재의 능력을 진정으로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오.


─『채털리 부인의 연인』



5년 전 옛 수유너머에 처음 와서 이것저것 주섬주섬 배울 무렵, 로렌스를 읽고서, 바로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뒷골목 싸구려 에로영화의 원저자쯤으로만 알았던 그를 원작으로 접하자, 그는 내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람으로 다가왔다. 사실 그의 아름다움은 근본적으로 ‘전투적인 아름다움’이다. 맬러즈와의 사랑 속에서 펼쳐지는 코니의 전투적 아름다움을 보노라면, 가슴이 뻥 터진다.
 
벽의 이쪽ㅡ갑각류의 세계. 코니는 자신의 삶이 다른 것들처럼 그저 굴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라그비 대저택의 음울한 방, 테버셜 탄광의 굴뚝 연기, 기계 엔진이 증기를 뿜어대는 소리. 글쎄 뭐 여기서 더 달라질게 있을까? 그냥 내버려 두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도 따로 없다. 아무도 쓰지 않는 수많은 방들, 무한 반복되는 일과들, 기계적인 질서들. 마치 지하에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녀의 주변 풍경은 변화를 싫어하는 클리퍼드와 영락없이 닮았다.

클리퍼드와 그의 친구들은 죽은 말과 표현에만 집착한다. 그들은 갑각류 무척추동물일 뿐이다. 클리퍼드는 삶의 형식들은 그대로 둔 채 형식 아래의 사적인 것만 바꿔 줄 수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다시 말하면, 삶의 주어진 몫이 애초부터 있었으며, 삶은 그 몫에 따라서만, 그에 걸맞게만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마치 그 껍질이 깨지면 안에 있던 살덩이들이 흩어져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요구하는 삶이란 소위 ‘온전하게 이룩된 삶’, 정점에 이르러 변하지 않는 삶이다. 그는 그의 주위를 접촉이 불가능한 갑각류의 세계로 만들어 버렸다. 부드럽고 살아있는 살들은 옷 속으로, 대저택의 수많은 방 사이로, 부르주아지들의 덧없는 관념과 대화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코니에게 자식을 낳아달라는 말을 할 때도 자식은 단지 몫을 갖고 만들어진 ‘그 애’일 뿐이다. 아마도 클리퍼드에게 ‘그 애’는 또 다른 갑각류 동물일 것이다.

갑각류들만 웅크리고 있는 벽의 안쪽에서, 코니와 클리퍼드는 육체적 접촉을 전혀 하지 않는다. 클리퍼드는 자신의 것, 자신의 정신에 어느 누구도 침범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는 육체의 불구이기 이전에 이미 정신의 불구인 셈이다. “어느 누구도 이 숲에 침입하지 못하게 하고 싶어!”

반격의 거점ㅡ육체의 쾌락. 그러나 젊음이란 놈은 어찌된 일인지 항상 씩씩거리고 불끈거린다. 이 젊음은 어떤 식으로든 발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젊음에, 욕망에 “뜯어 먹히고” 만다. 이 욕망을 불러 세우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육체의 쾌락이다. 젊음이란 것 자체가 바로 이 쾌락에의 욕망이다. 욕망은 쾌락을 원하고 기억하며, 쾌락은 행위를 불러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행위는 바로 육체의 접촉, 섹스다. 이 세상엔 여러 가지 쾌락이 있겠지만, 그중에 이 섹스의 쾌락은 어딘가 이상한 놈이다. 섹스라는 행위를 통해 쾌락에 도달하는 순간, 삶에 대한 두둑한 배짱이 생기고, 금지하는 것들에 대한 저항심이 생기니 말이다. 왜냐고? 따뜻한 섹스는 ‘부끄러움’이란 몸속의 오래된 벌레를 꺼내 저 멀리 내던져 버리기 때문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코니는 맬러즈와의 따뜻한 섹스가 가져다 준 쾌락을 가슴에 품고, 부끄러움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 자신의 관능적 자아, 부끄럼 없이 벌거벗은 자아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변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부끄러움들을 샅샅이 찾아 없애고 발가벗는 것이다. 그 순간부터 비로소 그녀는 갑각류의 세계와 결별하고 반격할 수 있게 된다. 마치 지켜야할 자신의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프롤레타리아처럼.

어떤 의미에서 클리퍼드는 사실 지배능력을 이미 상실한 자이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자꾸 고집을 핀다. 그가 하는 일이란 고작 ‘살아 있는 그림’(tableau vivant, 아름다운 풍경들) 앞에서 꽃밭만을 밟아 으깰 뿐인데도 말이다. 이 바짝 말라붙어 버린 이 존재에게 코니는 말한다. 당신은 지배하는 게 아니라고. 괜히 착각하고 우쭐대지 말라고. 당신은 바짝 말라붙은 존재일 뿐이라고 일격을 가한다.

이제 코니는 맬러즈를 만나러 갈 때조차도 연인을 만나러 가는 마음가짐이 아니다. 살덩이를 숨겨놓고 죽은 말과 표현 속에만 웅크리고 있는 클리퍼드와 그 친구들, 즉 갑각류 무척추동물들에 대한 “어떤 분노와 반항심이 가슴속에 불타는” 걸음걸이이다. 뭐든 올 테면 오라(á la guerre comme á la guerre)!

벽의 저쪽 ㅡ 참다운 미래. 부끄럼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승리하였다. 그녀가 벌거벗은 자아를 갖게 되자, 그녀에게 “어떤 도달의 깨달음”이 대가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코니는 부끄럼으로 빙 둘러싸인 자신의 자아가 해체되면서 벽의 저쪽으로 넘어갔다. 그녀는 맬러즈와 함께 자신의 참다운 미래를 이 자리로 가져왔다. 다시 말하면 쾌락, 욕망, 섹스, 해체, 미래가 차례로 그녀에게 다가오면서 '제대로 된 인생'이 펼쳐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음울한 인생을 부셔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생산해냈다.

이제야 코니는 진짜배기 귀족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는 외관상 귀족이었을 뿐 사실은 노예의 삶으로 허우적대고 있었던 건 아닐까? 맬러즈는 말한다. 뭔가 다른 것을 위해 살자고. 비즈니스에 찌든 모든 삶을 떨쳐버리라고. 노동으로 삶을 망치느니 아예 하지 말라고. 그런 것들은 전혀 필요 없노라고. 그러면서 우리에게 우리에 대한 끊임없는 신뢰를 요청한다.

당신의 몸 곳곳에 아로새겨져 있는 온갖 부끄러움들을 씻어 없애버려라. 그리고 당신의 존재를 믿어라. 그 순간, 비로소 당신의 배짱은 솟아오르고 당신의 반격이 시작될 것이다. 이것이 나의 로렌스주의다. 안녕, 존 토머스와 제인 부인 !




성자들이 보는 지복이라고 할까요. 보이지 않는 손이 만물의 베일을 벗기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한순간 우리는 만물의 신비를 보고, 그러면서 자신도 신비가 되는 거죠. 순간적으로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그러다 그 손이 도로 베일을 덮으면 다시 혼자 안갯 속에서 길을 잃고 목적지도, 그럴듯한 이유도 없이 비틀거리며 헤매는 거죠.


전 안개 속에 있고 싶었어요. 정원을 반만 내려가도 이 집은 보이지 않죠. 여기에 집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는 거죠. 이 동네 다른 집들도요. 지척을 구분할 수가 없었어요. 아무도 만나지 않았죠.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들렸어요. 그대로인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바로 제가 원하던 거였죠. 진실은 진실이 아니고 인생은 스스로에게서 숨을 수 있는, 그런 다른 세상에 저 홀로 있는 거요. 저 항구 너머, 해변을 따라 길이 이어지는 곳에서는 땅 위에 있는 느낌조차도 없어졌어요. 안개와 바다가 마치 하나인 것 같았죠. 그래서 바다 밑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오래전에 익사한 것처럼. 전 안개의 일부가 된 유령이고 안개는 바다의 유령인 것처럼. 유령 속의 유령이 되어 있으니 끝내주게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에드먼드, 159~160쪽


우리는 꿈같은 존재, 우리의 짧은 인생은 잠으로 완성되나니.


─세익스피어를 좋아하는 연극배우 출신 제임스 티론이 세익스피어의 말을 인용. 161쪽


행복한 길들은 말이 안 돼. 따분한 길들이 맞지. 무(無)로 바로 데려다 주는. 내가 간 곳도 바로 거기야. 무(無)의 세계 말이야. 얼간이들은 인정하려 들지 않겠지만, 결국 우리 모두가 가게 되는 곳.


─제이미, 201쪽




1912년 뱃고동 소리 들리는 항구 마을. 돈에만 집착하는 아버지 제임스, 마약 중독자 어머니 메리, 여자와 알코올에 빠져 사는 형 제이미, 결핵에 걸린 동생 에드먼드.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 티론 가족은 모두 태연한 척 하지만, 에드먼드가 병이 깊어지면서 서서히 두려움이 커진다. 결국 메리는 모르핀을 찾고, 아버지와 두 아들은 술을 찾는다. 다시 그들은 마약과 술의 힘으로 자신들만의 망상 속으로 들어갈 뿐이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다가오는 두려움도 정면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안개 속을 헤매는 '안개 인간들'인 셈이다. 유진 오닐 그 자신도 소뇌 퇴행성 질환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예순다섯 살의 나이로 보스턴의 한 호텔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때 “빌어먹을 호텔 방에서 태어나 호텔 방에서 죽는군”이라고 탄식했다고 하니, 이들과 그리 멀리 있지 않아 보인다.
 
술과 담배를 끊은 지 6년이 되어 가지만, 아직도 그 시절에 자주 가던 술집 테이블의 모양이나 위치가 느닷없이 생각날 때가 있다. 기억들의 지독한 정교함이란! 몸을 관통해서 들어앉은 기억들은 고집스럽게 자기 자리를 고수하며 그 지속력을 뽐낸다. 베르그송의 말대로 기억은 생명 그 자체일 테니 생명이 지속되는 한, 술과 담배의 맛은 영원히 내 몸 속에서 지속될 것이리라. 결국 금연 금주란 내 몸 속에 있는 그 기억들과의 긴장을 끝없이 견디어 내는 것이 아닐까싶다.

술, 담배를 끊으려고 무진 애를 썼던 무렵, 우연히 손에 잡혀 읽었던 희곡이 바로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등장인물들이 모두 술이나 마약으로 찌든 모습으로 등장하니, 물론 이 희곡은 술, 담배 끊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술과 담배 같은 것들이 등장인물들의 숨어있는 진실을 드러내게 하는 촉매제로 작용한다. 하지만 내 자신이 지독히 노예적이었던 터라, 희곡의 등장인물들이 무언가에 중독되어 방황하거나, 감염되어 있는 모습에 쉽게 감응했었다. 그 뒤로 술, 담배가 불현듯 생각나거나, 술, 담배에 쩔던 그 시절이 생각날 때면 그때 읽었던 이 희곡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를테면 나에게만은 ‘금연-금주 희곡’이었던 셈이다.



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뭉크,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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