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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철학관

풀 수 없는 문제? 우리는 이미 풀고 있다!

by 북드라망 2012. 11. 13.

그럭저럭 돌파!
 


이제 바야흐로 김소월이 읊었던 대로, 봄날이 오리라 생각하면서 ‘쓸쓸히 지나 보내야 하는 긴긴 겨울’(김소월, ‘오는 봄’)이 찾아왔다. 어떤 이는 겨울에 첫사랑이 생각난다지만, 나는 본래 남쪽 사람이어선지 겨울만 찾아오면 그놈의 추위 때문에 더럭 겁부터 난다. 서울 올라와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천정부지 전세값도 아니고, 이웃들의 야박함도 아닌 눈바람 매섭게 부는 겨울을 첫째로 들것이다. 정말이지 처음엔 추위만 찾아오면 아무런 대책이 서지 않았다. 따뜻한 남쪽나라에선 도무지 ‘추위대처법’ 같은 걸 배워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서울의 매서운 추위 앞에서 무능력 그 자체였다.


어떤 해 어떤 겨울에는 늦은 귀가로 눈발 속 밤길을 서너 시간 헤맨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끔찍함은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제쳐두고 추위를 제1의 적(敵)으로 삼게 하였다. 그만큼 나에겐 추위가 주는 트라우마가 세상에서 가장 컸다. 그래서 가끔 겨울만 되면 곰이 되어 한 석 달 따뜻한 곳에서 푹 자고 나오면 좋겠다는 공상이 들 때도 있다. 「쿵푸팬더」를 볼 때도 팬더 포의 감동적인 무술보다 그 친구가 갖고 있는 따뜻한 털가죽이 더 부러울 때가 있을 정도였다. 뭐, 공상은 공상일 뿐 별수 없이 두꺼운 이불을 둘둘 말아 둘째 아들 껴안고 고작 낮잠이나 자는 정도가 전부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제는 이불을 둘둘 말아서라도 그럭저럭 살아내는 것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간단한 체육복을 입고 추운 겨울에 달리기도 한다. 처음엔 이불을 둘둘 말아도 추위에 대한 공포(?) 때문에 불면의 밤을 지새운 걸 생각하면 많은 진전이다.


겨울의 甲은 역시 북극곰?!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문득 추위를 그럭저럭 견뎌내는 내 삶이 집 앞 시냇가에서, 손에 쥐고 던지면 그저 그렇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돌멩이의 삶과도 같아 보인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바람 때문에 얼마나 추울까? 내가 던졌으니까 별 수 없이 날아가게 되었을 것이지만, 아무도 어떻게 날아가는지를 알려주지 않아서 쉽지 않은 길이였을 텐데, 그래도 그럭저럭 바람들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걸 보면 참으로 기특하다. 사람들은 내가 던진 힘 때문에 운동에너지가 생겨서 날아간다고 할 테지만, 나는 왠지 그렇게만 생각되지 않는다. 돌멩이도 자신을 새처럼 생각하면서 날아가고 있을까? 공기를 가르며 새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돌멩이의 운명. 그리고 추위 속에도 곰처럼 되어 앞으로 나아가는 나의 운명. 그렇게 운명은 우리들을 감싸고 있고, 또 우리는 그렇게 운명을 똑같이 돌파하고 있는 듯하다.



차이의 방정식 : 미분적인 것, 이념적인 것, 잠재적인 것


하얀 백지 위에 아래로 볼록한 포물선을 그려보자. 그리고 오른편에 그 포물선을 따라서 ‘똑같이’ 하나 더 그려보자.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나서, 왼쪽 포물선과 오른쪽 포물선을 비교해 보라. 똑같은가? 당연히 다를 것이다(만일 다르지 않다면, 당신은 사람이 아니므니다 -.-;). 대체적인 윤곽이야 같아 보일지 몰라도, 디테일한 것까지 따져보면 각도나, 선의 길이 등 다른 것투성이일 것이다. 다시 똑같은 것을 그리려고 하여도 결과는 똑같다. 그렇다면 두 포물선의 차이는 어디에서 출현하는 것일까? 그림을 그린 나의 ‘의도’가 차이를 출현시킨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그림을 그리는 최초의 순간만큼은 ‘똑같이’ 그리려 하지 않았나. 따라서 그림을 그린 이의 의도가 이런 차이를 출현시킨 것은 아닌 것 같다. 이처럼 그림을 그릴 때마다 머릿속에 떠올린 포물선의 모습은 매번 똑같은데, 손에 연필을 쥐고 하얀 백지에 그 포물선을 그리기만 하면, 그때마다 ‘다른’ 포물선이 그려진다. 내 의도와는 하등 상관없이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같은 생각을 가졌더라도 무언가를 손으로 현실화시키기만 하면 그 순간 ‘다르게’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또 조금만 생각해보면 두 개의 포물선을 비교하기 전에도, 하나의 포물선 내에서 이미 이 ‘다름’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의 포물선을 그리기 시작해서 끝마칠 때까지, 우리는 그리는 순간순간 각 순간 사이의 다름, 즉 차이를 산출해야만 계속 그려나갈 수 있다. 하나의 포물선 안에서도 앞서 그린 선과 뒤이어 그려지는 선은 서로 달라야만 한다. 사실 이 다름 때문에 포물선을 그리는 행위가 끊이지 않고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앞서 그린 선과 완벽하게 똑같은 선만을 고집한다면, 우리의 손은 시작점조차 넘어서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뒤이어’ 그린다는 의미 안에는 언제나 앞과 다르게 그린다는 뜻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차이를 출현시키는 행위 그 자체인 셈이다. 그림을 그리면 차이가 발생한다. 차이가 출현해야 그림은 그려진다. 방향과 각도 그리고 선을 긋는 순간적인 움직임들의 차이가 선의 행로를 시시각각 결정한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이 순간적인 움직임들이 매번 달라야만, 즉 그려진 것과 그릴 것 사이에 어떤 차이들을 발생시키고서야 포물선이라는 그림은 완성된다. 따라서 두 개의 포물선이 서로 다르다면, 각각의 포물선 안에서 산출된 차이들이 서로 다르다는 말일 것이다. 결국 두 개 포물선의 차이는 각 포물선 내에서 산출된 차이들 간의 차이이다. 왼쪽 포물선이 그려지면서 출현한 차이들과 오른쪽 포물선이 그려지면서 출현한 차이들 간에 출현한 차이인 것이다.
 

들뢰즈는 수학을 통해 이를 좀 더 정교하게 설명한다. 고등학교 수학을 잠시 떠올려보자. 포물선은 방정식 y=ax²으로 일반화해서 표현된다. 이 방정식은 수많은 포물선들을 대표한다. 이 포물선의 방정식 y=ax²을 미분하면 dy/dx = 2ax라는 미분방정식을 얻게 된다. 이 미분방정식은 y=ax²의 점 (x, y)에서의 접선의 기울기를 나타낼 것이다. 이 식에 따르면 x=1 근처에서는 기울기가 2인 직선처럼 ‘움직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x가 한 칸 가면 y는  두 칸 가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말이다. 이처럼 미분이라는 것은 포물선에 내재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포착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차이”에 대한 수학적 포착을 보게 된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명백히 움직임의 정도를 드러내주는 바로 이 기울기야말로 차이를 만들어내는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차이를 산출하는 장은 수학적으로 말한다면 미분적(微分的)인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선을 긋는 순간적인 움직임을 창출하는 것은 포물선에 내재된 각 순간의 차이들이었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미분적인 것을 말함이다.
 


그런데 이 미분이라는 놈은 극한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 원래 dy/dx = lim Δy/Δx이었다. 여기서 d는 lim이 취해졌다는 것, 즉 극한값이라는 것을 표시해주는 것이었다. 델타(Δ)는 lim가 취해지기 전을 의미한다. 따라서 dy/dx는 극한의 순간에 생성된 비율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극한이나 경계는 함수의 극한이 아니라 어떤 진정한 절단(coupure)으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극한을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 사이의 어떤 경계”(들뢰즈, 『차이와 반복』)로 파악한다. 차이의 생성은 극한의 순간에만 드러난다는 말일까? 아무튼 여기서 “극한”이란 무한급수를 무한히 이어갈 뿐 결코 도달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결국에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어떤 존재이다. 0.9999……의 “……”가 가능한 것은 이것이 무한히 이어진다면 어떤 극한값, 즉 1에까지 이르리란 생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극한을 미리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미분적인 것이 가능하다. 거꾸로 말한다면 미분이 가능하기 위해서 극한이 요청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극한이 전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인 층위의 차이가 산출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극한을 전제하여야만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울러 이런 차이로서의 미분은 벡터다. 당연히 벡터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포물선에 내재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포물선 그 자체는 현실적인 것인 반면, 벡터들은 접점들이 어느 방향으로 얼마만큼 향하는가를 알려주는 수식일 뿐 하얀 백지 위에 그려진 포물선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있다!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이념적인 존재이다. 또한 포물선에 내재되어 있을 뿐, 하얀 백지 위에 현존하게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잠재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결국 벡터는 이념적이고 잠재적인 존재이다. 더군다나 미분은 하나의 특정 벡터로서만 존재하지 않고, 무수히 많은 벡터들로 구성된다. 그래야 포물선이 그려질 테니 말이다. 따라서 미분은 이념적이면서 잠재적인 어떤 “장(場)”이다. 앞서서 보았듯이 그것을 위해서 극한이 요청되었고, 또 그 극한으로부터 도출된다는 점에서 이미 예견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극한과 미분의 존재방식은 이념적이고 잠재적이다. 결국은 차이는 이념적이고 잠재적인 것이다. 어쩌면 이념 자체가 차이일 것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사태다.


해(解)가 없는 방정식 : 살아가는 것이 해(解)다


그렇다면 미분방정식을 푼다는 것은 차이가 산출되는 원리가 파악된다는 것이므로, 미분방정식을 풀기만 하면, 현실의 모든 사태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초기값만 있다면 주어진 미분방정식을 통해서 미래의 값들, 즉 궤도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 이런 생각이라면 y=x²라는 포물선(위 식이라면 a=1)은 (0,0), (1,1), (2,4)……과 같은 궤도를 이미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현실의 운동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돌멩이를 들고 위로 던졌을 때, 그 돌멩이가 그리는 포물선을 y=x²의 공식으로 전부 예측할 수 있을까? 그러나 dy/dx = 2x라는 미분방정식을 세울 수는 있어도, 돌멩이의 궤도를 아무런 오차 없이 그야말로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뜻 보면 미분방정식의 해들이야말로 포물선의 기울기로서 순간순간의 속도를 가르쳐주는 것이므로, 이 방정식을 풀기만 하면 돌멩이의 미래 궤도를 정확하게 그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y=x²이라는 방정식은 수학적 공간에나 맞는 식이다. 현실적 공간에서는 그 유효성이 심각하게 훼손된다. 방정식은 각종 변수들, 즉 바람, 지형, 돌멩이를 쥔 손가락 모양 등등에 따라 수도 없이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방정식의 안정성은 쉽게 무너지고 만다. 더군다나 돌멩이를 던질 때, 최초의 속도를 알아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최초에 내가 돌멩이를 던지는 순간의 속도가 결정될 리가 없다. 그것은 사후적이다. 따라서 완전한 상태의 실험적 상황이 아니라면 초기값을 사전에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사실 실험적 상황에서도 그런 신적인 정확성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궤도 예측을 위해서 수정된 어떤 미분방정식을 세울 수는 있어도, 현실에서는 그 방정식의 해가 나오지 않는다. 방정식의 해가 어딘가에 있긴 하겠지만, 실제로는 찾을 수 없는, 현실에서는 “해가 없는 방정식”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돌멩이의 운동이 어떤 경로로 가게 될지에 대해서 조금도 결정되지 않는 것이다.


현실적인 모든 것은 항상 새롭게 갱신되는 잠재성들의 모임들로 둘러싸여져 있다.
-질 들뢰즈 지음,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519쪽


따라서 돌멩이는 미분방정식의 ‘어떤’ 기울기를 “운명”으로 갖고는 있지만, 어떤 경로를 가게 될지에 해당하는 “삶”은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다. 운명은 주어져 있지만, 답은 결정되어 있지 않다. 어떤 외생적인 정답도 돌멩이의 궤도를 가르쳐 주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궤도가 알려지지 않았는데도 돌멩이는 위로 치솟으며 보란 듯이 포물선을 그려내는 것이다. 마치 그 방정식을 이미 풀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풀 줄 모르는데 푼다! 어떤 ‘미분비’를 지닌 돌멩이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자유롭게’ 그 미분방정식을 풀어내고야 만다. 스스로의 몸으로 포물선을 그려내며, 차이를 산출한다. 즉 돌멩이는 자기 스스로 미분방정식의 정확한 해를 찾아낸다. 돌멩이는 적분을 모르면서도 적분을 수행해내고 있는 것이다(들뢰즈, 『차이와 반복』 382쪽). 따라서 미분이라는 운명은 모험에 찬 운명, 긍정으로 가득한 운명이다. 그것은 도무지 “해를 알 수 없는 방정식”, 즉 “풀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현실로 흘러나오면서 미래를 가열차게 돌파하는 운명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매번 극한으로 다가가면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몸짓일지 모르겠다. 그 순간 돌멩이는 자신의 미분을 긍정하며 그것이 던져준 문제를 풀어내며 앞으로 전진한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온몸으로 배우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돌멩이의 눈물겨운 비행이다. 실로 ‘자유로운 운명’이라고 할 만하다. 돌멩이는, 그리고 우리는 모두 다 이런 자유로운 운명 속에서 삶을 그럭저럭 돌파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이 추위에 “사무치는 눈물은 끝이 없어도, 하늘을 쳐다보는 살음의 기쁨”(김소월, ‘오는 봄’)으로 ‘오는 봄’을 기다리는 것일 게다.



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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