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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과학

변신(로봇)은 자연에도 있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0. 31.

변신과 영웅에 대한 비밀
「형태에 있어서 새로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역자 서문*

 

박영대(남산강학원 Q&?)

 

 

물고기진드기, 영웅의 재림

 

모든 남자아이들이 그렇듯이, 변신로봇은 어린 시절 나의 영웅이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된장찌개 냄새가 부엌에서 솔솔 풍겨도, TV를 떠나지 못했다. 지구를 위협하는 악의 무리에 맞서, 수많은 로봇들이 시대를 거치며 명멸해갔다. 나는 그 중에서 ‘볼트론’을 사랑했다. 평소엔 사자로 있다가도, 가루라 제국이 쳐들어오면 로봇으로 변신하는 그 늠름함을 사랑했다. 이 글을 쓰면서 오랜만에 검색하고 있는데, 오, 나의 영웅이시여!

 

한때 남아들의 시선을 휩쓸었던 볼트론!

 

모든 남자아이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커가면서 변신로봇을 잊어갔다. 변신은 로봇이나 만화에서만 가능한 얘기였다. 하지만 얼마 전 살아있는 변신로봇을 보게 되었다. 돌아온 영웅, 이번엔 사자가 아니라 물고기진드기(魚蝨, 학명 Argulus japonicus)였다.

 

이들은 물고기 표면에 기생해서 살아간다. 어렸을 때는 갈고리모양의 발로 물고기 표면에 붙어있다. 하지만 네 살가량이 되면, 갈고리 발이 빨판으로 ‘변신’한다. 갈고리발이 급격히 작아지면서 갈고리발톱을 만들던 근육이 빨판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진드기라 느낌이 별로 안 오시나? 사람이라면, 팔꿈치 아래가 없어지고 팔꿈치에서 근육이 튀어나와 그게 빨판으로 바뀐다는 소리다. 말 그대로 ‘트랜스포머’다.

 

그렇지만 변신 자체가 대단한 건 아니다. 나비나 매미 같은 웬만한 곤충들도 애벌레와 번데기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도 나비이면서 애벌레일 수는 없다. 헌데 놀랍게도 이 진드기의 다리는 갈고리이면서 빨판인 시기가 있다. 하나의 다리에 두 형태가 같이 있기 때문에, 변화과정 중에도 물고기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기생을 삶의 방식으로 택한 진드기의 노하우인 셈이다.

 

형태는 주어진 게 아니라 계속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물고기진드기. 로봇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자연에서도 분명 '변신'이 존재한다.

  

 

이 놀라운 변신은 어떻게 가능할까. 만약 나도 이런 변신이 가능하다면, 나의 영웅이 아니라 내가 영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 팔에 빨판이 있다면, 스파이더맨처럼 벽을 타고 다닐 텐데. 생물들이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비밀을 알아보자.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누가 주었나?

 

진드기의 변신이야기를 듣자마자, ‘살아남기 위해서 그랬겠지’라고 생각하기 쉽다. 격변하는 환경에 따라, 적합한 기능을 가진 생물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생물은 도태된다. 그러니 빨판은 진드기가 달라붙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설명이 생물학적 ‘기능주의’ 시각이다.

 

기능주의는 유기체 속의 부분으로 기관을 본다. 따라서 기관은 철저히 유기체의 생존을 위한 것이고, 유기체가 부여한 기능을 받아들인다. 이를 합목적성이라고 하는데, 유기체가 목적이고 각 부분이 수단이 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엔 묘하게 목적론이 들어있다. 갈고리는 걸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빨판은 달라붙기 ‘위해서’ 생겨났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 ‘위해서’는 누가 정할까. 생물의 형태를 미리 정하는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데스노트>의 명대사! 하지만 라이토는 게임에서 진다. 아무리 강력한 무기를 소유해도, 세상을 한 명의 의지로 계획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줌.


 

목적이 미리 있다는 사고방식에서는, 목적이 존재를 규정한다. 어려운 말로 포장해서 그렇지 꽤나 황당한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얘기를 많이 들어왔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내가 미처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이미 민족과 반공국가 건설의 목적을 가진 것이다. 그렇다면, 갓 태어난 아기는 울기도 전에 말할 것이다. “엄마, 전 민족과 국가를 위해 태어났어요!” 이는 우리의 존재를 국가나 사회 시스템, 유기체 속으로 편입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것을 벗어난 삶은 옳지 못하고 가능하지도 않다면서.

 

그래서 기능주의적 시각에서는 물고기진드기의 변신이 불가능하다. 어린 진드기의 발은 갈고리 기능을 위해서 태어났고 거기에 최적화되어있다. 빨판기능을 만들 여유도 없고 목적에도 맞지 않다. 새로움을 용납하지 않는 태도인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형태변화는 일어난다. 그래서 기능주의에서는 마지못해 유전자에 새로운 변화가 이미 들어있다고 말한다. 근데 이미 있는 게 새로운 것인가? 기능주의와 목적론을 벗어나, 생물의 근본적 새로움을 생각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상호작용이 형태를 만든다

 

 

선천적으로 앞다리를 못 쓰는 염소가 있다. 이 염소는 스스로 뒷다리만으로 걷는 방법을 습득했다. ‘메~’하고 걸어다니는 염소를 떠올리면 정말 귀여운데, 동시에 이 염소는 생물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례이기도 하다. 일단 뒷다리로 걷기 시작하자, 염소의 등, 배, 골반에 있는 골격과 근육들이 모두 변했다. 사람이나 캥거루처럼 원래 두발로 걷는 동물의 몸과 비슷해졌다. 애초에 두 발로 걷을 수 없었던 염소가 신체를 바꿔가는 모습이 경이로우면서도 감동적이다.

 

염소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신체의 가소성(可塑性, plasticity) 때문이다. 성형수술을 영어로 plastic 수술이라고 한다. 그러니 가소성이란 성형수술처럼 형태를 바꾸기 쉬운 성질을 가리킨다. 염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이런 특성을 갖고 있다. 물론 성형수술을 하는 우리도! 가소성으로 인해 자라나면서 새로운 형태를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형태가 바뀌는 것이지? 중요한 것은 신체요소들의 상호작용이다. 유기체의 목적이나 기능은 변화를 이끌지 못한다. 물고기진드기의 다리가 변하는 과정을 보자. 그림 A는 한 살 때의 모습이다. 갈고리 모양을 갖고 있다. 이후 B에서 4세가 되자, 1번과 2번 다리마디가 커지면서, 원통형으로 된다. 그러면서 근육들도 변하기 시작한다. 그림 C의 6세가 되면, 갈고리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고, 다리모양과 근육들은 완전한 빨판의 형태를 갖춘다. 전체 변신과정은 다리의 외골격과 다리근육 사이의 상호작용하는 운동이 만들어냈다.

 

형태는 [구성요소간의 상호의존적] 운동 속에서 만들어지는 내적/외적 요청=문맥에 응하여 예측불가능한 자명성(합목적성)을 창시한다. …… 해당 유기체를 만들어내는 운동 속에서 기존의 자명성을 변환해 가는 계기가 있었다. 그 계기는 그것으로서 나타나지 않고, 변환을 항상 이미 구성하고 있음에 의해서만 소급적으로 식별된다.

 

정리하면, 요소들의 상호작용이 형태를 만들어낸다. 기능주의에서 구성요소가 유기체의 수단이었다면, 여기서는 요소들의 상호의존적 운동이 전체를 구성한다. 곧 전체는 부분들의 상호작용으로서만 있을 수 있다. 우리에게 생물의 형태는 고정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형태를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된 것으로 보기 쉽다. 원래는 부분이 먼저 있고 전체가 결과이지만, 우리는 전체가 원인으로 먼저 주어지고 우리 자신이 결과라고 여긴다. 여기에 원인과 결과의 전도가 있다.

 

우리의 뇌에도 Plasticity의 성격을 띤 세포들이 있다고 한다. 아름답지 않은가^^


 

생물의 새로운 형태는 새로운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다. 사실 생물에게 구성요소 자체는 이미 새로운 것이다. 건강한 성인의 몸은 하루에만 약 2조개의 세포가 새로 만들어지고 죽어간다. 하지만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일정하다면, 새로운 형태는 불가능하다. 서로간의 주고받는 운동형태를 바꿔내는 것이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열쇠다.

 

효과로서의 유기체 

 

그렇다면 ‘나’라는 유기체, 나의 형태란 어떤 것일까. 기능주의가 ‘나’를 기준으로 요소들의 기능을 파악했다면, 운동하는 생명에서는 요소들이 기준이 된다. 전체에서 부분으로의 전환! 그래서 상호작용의 효과가 유기체다. 각각의 근육, 뼈, 신체기관들이 자기 나름의 의미를 갖고 살아가고, ‘나’는 그들의 활동 뒤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다양한 신체기관들이 우글거리는 장, 그것이 유기체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도 마찬가지다. 거기엔 미리 정해진 법칙이나 원리가 없다. 상호적 운동들이 만들어가는 자연, 저자는 이를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골격은 근육에 있어서, 근육은 신경에 있어서, 신경은 감각모에 있어서, 저마다의 의미를 획득하고, 변용의 계기를 얻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근육은 골격과 관계하고, 관절면은 서로 합치하고, 치아는 서로 맞물리고, 신경은 적절하게 이어지고, 빨판은 중앙에 흡인근을 가지고, 교미기관은 자웅으로 결합하고, 벌레나 바람은 꽃가루를 연결하고, 밀은 흙이나 습기 총합하면서 그 몸을 구성한다.

  

 

좀 더 다양하게 음미해보자. 유기체나 자연뿐만 아니라, 국가나 사회시스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회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감히 바꾸려고 생각하지 못한다. 나 하나 바뀐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이 말은 너무나도 기능주의적 한탄이다. 사회나 제도, 체제가 미리 주어져 있지 않다. 그것들은 요소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면, 내가 내 주위사람과 함께하고 있는 운동형태가 바뀌지 않는 것이다.

 

* 이 서문은 밑에 '더 보기'를 클릭하시면 번역된 것으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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