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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 애니미즘

[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 애니미즘] 늙음의 저주 –운명애를 가르치는 축복

by 북드라망 2024. 3. 28.

《하울의 움직이는 성》 ②사건

 

늙음의 저주 – 운명애를 가르치는 축복   

 


내 발목을 내가 잡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핵심 사건은 저주 풀기이다. 저주를 푼다는 것은 《마녀 배달부 키키》부터 시작해 《붉은 돼지》,《모노노케 히메》,《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까지 계속 이어지는 테마다. 그런데 앞 작품들에 비해 하울과 소피의 모험은 저주의 메커니즘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면서, 저주에 대한 사랑이 곧 운명애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는 저주에 걸리는 이들이 유독 많다. 저주에 씌는 데에 어떤 법칙이 있지는 않을까? 하울은 능력 있는 마법사였다. 더욱더 훌륭해지고 싶은 마음에 캘쉬퍼에게 마음을 건네 저주에 걸린다. 그는 마음을 빼앗기게 된 이후로 도대체 어디에 마법을 써야 하는지를 모르게 된다. 결국 마법을 써도 좋을 모든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게 된다. 캘쉬퍼는 원래는 별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져 소멸될 위기에 처하자 자기 능력을 하울에게 주고 그의 심장에 의탁해 영생을 갖게 된다. 하지만 하울의 심장에 의지해야 하므로, 살기는 살지만 하울 없이는 못사는 노예 신세가 되었다. 황야의 마녀는 젊은 심장을 갖고 싶어 환장을 하다가, 설리번의 계략으로 마력을 잃고 욕망을 채울 그릇이 낡아버린 호호 할머니가 된다. 여기까지 계산해보면 멋진 마법을 갖고 싶다, 영생을 얻고 싶다, 팔팔한 심장을 구하고 싶다, 이런 욕망이 저주의 근원임을 알 수 있다. 즉 자기 욕심에 매몰되면 저주받게 된다. 


이 법칙에 따라 소피와 무대가리가 저주에 걸린 이유도 따져볼 수 있다. 소피는 딱히 뭘 갖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듯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소피가 예쁜 모자를 쓰고 거울 앞에서 한번 쓰윽 웃어 보인 적이 있음을 떠올릴 수 있다. 소피도 예쁜 외모가 갖고 싶었던 것이다. 무대가리의 경우는 어떤가? 그의 왕국이 설리반의 나라와 전쟁중이라고 하니, 무대가리로 변한 이 왕자 역시 확장된 자기 왕국을 갖고 싶어 안달이 났던 것은 아닐까? 그도 원래 얼굴이 반반했던 듯하니 설리반과였을 것이다. 이렇게 주위 상관 없이 자기 욕망을 쭈욱 따라가다 보면 자기도 모른 채 저주에 걸려, 원래의 방식으로 그 욕망을 밀어붙일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저주는 타인의 악의 때문에, 운 없는 자가 걸리는 불행이 아니다. 자기 욕망에 쭈욱 끌려간 이들이 처한 진퇴양난의 국면이다. 그런 의미에서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서 바람 계곡 따위는 태워 없애도 된다고 생각했던 크샤냐, 타타라 마을을 지켜야 하니까 숲은 불에 태워져도 된다고 생각했던 에보시도 저주에 걸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출처 - 다음 영화

 


저주의 동화학
하울이나 캘쉬퍼의 저주보다 소피의 저주가 독특하다. 할머니가 된 뒤 소피의 외모가 쭈그러들었다가 펴졌다가를 자유자재로 반복하기 때문이다. 저주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타인의 욕망이 아니라 내 욕망이라면 푸는 일 역시 내 욕망을 어떻게 바라보게 되는지에 달린 일일지 모른다. 소피의 허리가 확실히 펴진 것은 자기 외모에 전전긍긍하는 하울을 보며 속이 터져, 황야에 나와 비를 맞으며 ‘나는 예뻤던 적이 한번도 없어!’하며 큰소리로 엉엉 울 때였다. 그리고 설리반 앞에서 자신 있게 하울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이해하면서 그 스스로 저주를 풀 것이라고 믿는 마음을 표현했을 때다. 이때 소피는 허리만 펴진 게 아니라 얼굴까지 펴져서 완전히 저주에 씌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소피의 저주가 풀린 이유는 공업 도시 사람들처럼 모두의 아름다움, 모두의 생각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의 판단과 자기 진실에 더욱 마음을 쏟아서다. 킹스베리로 하울을 대신해 떠나게 되었을 때, 소피는 하울이 마법으로 어렵게 다려준 파란 드레스 위에 자신의 낡은 모자를 쓰고 집을 나섰다. 모자 따위 예쁘고 안예쁘고가 무슨 상관인가? 나는 나인데! 소피는 대도시 거리에서 군인들의 경비행기 뒷자리에 드레스 자락을 날리며 타고 있는 아가씨를 보고는 이렇게도 말한다. ‘유치하게!’ 그렇다. 누군가 예쁘다고 칭찬해줘야 만족이 되는 마음이란 유치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생각이다. 그리고 그 생각도 하울에 대한 것 즉 타인의 삶에 대한 진심이기에, 소피는 자기 저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동화-인류학의 관점에서 보면 저주는 거는 자와 푸는 자가 다른 게임이다. 그래서 저주가 실은 자기의 원초적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런데 일단 이것은 숨은 논리이고 표면에서 보면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저주도 ‘누가 대신 풀어 주도록’ 되어 있다. 황야의 마녀를 보자. 그녀는 자기가 건 소피의 할머니-저주를 풀 줄 몰랐다. 그래서 궁전의 계단을 오를 때 소피에게 ‘공부 좀 더 하라!’는 타박을 받았다. 다른 동화도 떠올려보자. 백설공주도 그렇고, 개구리 왕자도 그렇고, 인어공주도 그렇다. 저주에 걸리는 이유는 제각각인데 풀 때에는 반드시 정황을 모르는 누군가가 헌신적으로 그의 운명에 개입하는 방식이어야만 한다. 저주는 기본적으로 저주를 거는 자, 받는 자, 푸는 자가 벌이는 3자 게임이다. 해결의 열쇠를 쥔 이는 반드시 ‘아무것도 몰라야’ 한다. 


인류는 저주의 관계학을 이런 동화로 풀어왔다. 갑자기 두 사람의 문제에 끼어들게 되는 이 세 번째 키맨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선 다른 사람이 내 저주에 대해 알 수 없다는 점은 내 욕망이 타인과 직접적으로는 무관한 것임을 가르친다. 그건 겨우 ‘너만의 문제’인 것이다. 다음, 소피는 캘쉬퍼와 하울의 저주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황야의 마녀와 자기 사이의 저주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소피는 모르는 자이기도 하고 아는 자이기도 하다. 저주의 동화학이 가르치는 바는, 잘 모르고 직접 관계도 없지만 얽혀 있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점이다. 저주를 푸는 자는 내가 아니므로 나는 내 삶의 주체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이의 운명에는 내가 빠질 수 없다. 


자기 문제는 자기가 못 풀도록 되어 있는 이 구조에서 각자는 타인에게 헌신하고 인내하고 이해하면서 자기 저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소피는 구부정한 허리와 쭈글쭈글해진 피부를 받아들이고, 다시 또다시 더러워지는 하울의 성을 치우며, 자신과 삼각관계 라이벌이나 다름없는 황야의 마녀와 적의 부하인 개 힌까지를 돌보았다. 마녀와 힌이 원래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만 어쨌든 황야에서는 함께 있을 수밖에 없고 자기가 아니면 돌볼 이가 없음을 이해했다. 소피는, 각자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욕망의 무게를 감당하며 타인에게 의탁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에서 겨우겨우 목숨을 이어간다는 것을 알았으리라.   

 

미야자키는 특히 ‘헌신’에 무게를 둔다. 소피는 저주를 푼 뒤 되찾게 된 회색빛 긴 머리카락을 캘쉬퍼에게 주고 성을 새롭게 일으켰다. 소피의 이 머리카락은 ‘예쁨’의 허상에 사로잡히지 않게 된 소피만의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그런데 소피는 자기만의 미모를 한 방울도 아까워하지 않고 캘쉬퍼에게 던져 준다. 식구들 머물 집이 없는데 잘나 무엇하겠는가? 헌신이란 자기를 돌볼 여유조차 갖지 않는, 전적으로 타인을 향해 있는 마음이다. 소피를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이런 소피의 마음을 사랑한다. 


소피 이상으로 헌신하는 이는 무대가리다. 물론 무대가리도 처음에는 할머니 소피가 자신을 구해준 보답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하다보니 재미가 들린 것일까? 무대가리의 배려 행진이 이어진다. 무대가리는 소피가 숄을 잃어버렸을 때 찾아주고, 집이 필요하면 알아봐 주고, 비를 맞을 때 우산을 가져다주고, 빨래를 말려야 하면 빨랫줄의 기둥이 되어 준다. 그의 헌신은 나중에 식구들 전부가 부서진 성 위에서 다치게 될 것을 막는 데까지 간다. 자신의 몸체인 막대기가 깎여 부러질 때까지 식구들을 위해 성의 마지막 판자 조각을 떠받친 것이다. 처음에는 소피에 대한 연민이었겠지만 나중에는 성의 식구들 전체에 대한 사랑으로 그의 마음은 꽉 차 있었다. 이처럼 자기의 불운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자는 구원의 기회를 얻는다. 소피의 러버 하울 역시 악마가 될 위험을 전혀 돌아보지 않는다. 악마가 되어서라도 가족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처 - 다음 영화

 

그런 의미에서 계단 오르기 장면을 다시 보고 싶다. 나는 미야자키의 어떤 전쟁씬보다도 이 계단의 대결을 좋아한다. 노인이 되면 계단을 오르기 힘들다는 것도, 자기 욕망만 붙들고 있으면 얼마나 힘든가도 여기 아주 잘 나와 있다. 소피는 그 높은 계단을 뚱실한 개 힌까지 데리고 오르면서도 힘이 펄펄했다. 이때 소피는 할머니 체력이 아니었다. 설리번을 만나야 하울을 왕명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미션에 온 힘을 모으게 되면서 그 본연의 에너지가 솟아 나오게 된 것이다. 이때 소피는 한 계단 한 계단을 비틀거리며 올라오는 황야의 마녀를 향해 응원까지 보냈다. 소피는 자신을 괴롭힌 자가 전혀 밉게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자기 처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소피는 그 누가 어떤 저주를 자신에게 내리든 상관없는 지점까지 갔다. 원래 자기 욕망이 무엇이었는지 잊는 문턱까지 갔던 것이다. 계단을 오르는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울과 힌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소피 곁에서 황야의 마녀는 점점 더 쭈글쭈글해진다. 궁전 안에 놓인 의자를 보고는 쉬어야겠다는 일념으로 퍼져 앉게 되자 자기 마력을 다 뺏기고 만다. 마녀는 설리번에게 쫓겨났던 자기 명예를 설욕한다는 데에 급급했고 자기 피곤 덜기에만 바빴다. 황야의 마녀는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게 되면서 오히려 자기 마력을 잃는다. 하지만 이런 고집쟁이 마녀도 소피가 주는 밥을 먹고 마르클의 돌봄을 받으면서 다른 사람이 된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복수라든가 명예 회복을 부르짖는 대신 캘쉬퍼를 신기하게 바라보거나 젊은 심장을 향했던 과거의 사랑을 느긋이 회상한다. 미워 죽겠다던 하울과도 기분 좋게 화해한다. 불의 캘쉬퍼가 자기가 그토록 원했던 하울의 심장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움켜쥐기는 하지만, 소피가 달라고하니 그렇게도 갖고 싶냐며 내어준다. 황야의 마녀는 소피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면서 설리반보다 훨씬 멋진 할머니가 된다. 

 


운명은 출발점
저주는 정말 나쁜 일일까? 《천공의 성 라퓨타》의 파즈는 라퓨타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라퓨타가 있었고, 그것을 지탱한 비행석이 있었기에 자신이 시타를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모노노케 히메》의 아시타카는 자기 불운을 탓했을까? 그는 재앙신 나고의 증오 저주에 붙들린 팔을 들고 길을 나섰기 때문에 신들의 숲에서 세상 가장 아름다운 존재를 만났다. 소피도 마찬가지다. 순식간에 90세의 할머니가 된 덕분에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예뻐야 한다는 청춘의 사명도 다 던져버리고, 당장 해야 할 일을 찾으며 사람들을 사귀어간다. 그리고 사랑을 하게 된다. 소피는 황야의 호수에서 빨래를 다 널고 해질녘 차 한잔을 하면서 ‘여기까지 와 보다니’라고 감탄한다. 저주는 소피를 아주 멀리까지 데려다 주었다. 

 

장 주네라는 프랑스의 소설가는 이름을 저주라고 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불린다. 내 이름을 쓰는 자는 언제나 남이다. 그래서 주네는 이름을 ‘너는 이러이러한 존재야’라고 구속하는 결계처럼 생각한다. 작가는 바로 이런 이름과 싸운다. 여기까지는 치히로의 온천장 모험 이야기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소피와 함께 이번에는 다른 이론을 전개한다. ‘이름’이 굴레이기는 하지만 굴레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쿠가 치히로에게 이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던 까닭도 너의 삶은 너를 불러주는 누군가에 의해서만 의미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름은 불리는 것 자체만으로 타인과의 관계 속으로 나를 밀어넣게 되는 마술이다.  


치히로는 잃어버린 이름을 찾았다, 이때 관객이 알게 된 점은 우리가 많은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피의 저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피는 하나의 이름을 쓰지만 모두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가는 존재가 되었다. 마르클은 소피가 원래의 가족에게 돌아가버릴까봐 꼭 붙들며 함께 하자고 애원하고, 캘쉬퍼는 다시 별이 될 수도 있었지만 소피와 함께 살려고 다시 성의 부뚜막으로 돌아온다. 저주는 타인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곧 운명임을 알려준다. 장 주네의 말을 다시 해석하면, 누구도 이런 저주에 붙들리지 않고 살 수는 없다. 

 

황야의 마녀는 내(소피)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다. 해터스 모자 가게에서의 소피가 더 할머니 같았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아버지의 부채를 책임지며 근근이 손님들 모자 장식에 파묻혀 있을 때의 소피도 저주를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문제는 어떤 저주에 걸려 있는지를 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나의 저주 풀기가 너에게 달려 있는 문제라면 저주의 한복판에서 내 주변을 둘러보며 누가 있는지를 보자. 

 

소피의 흰 머리카락은 검은 머리카락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미야자키가 저주의 의미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미야자키는 젊음을 되찾게 되는 이야기로 끝을 맺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늙음을 나쁜 일이라고 해석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작품을 만들 때 지브리의 많은 스텝들이 귀여운 여자아이가 아니라 할머니가 주인공이라는 점에 아연실색했다. 그들 모두가 할머니라도 좀더 우아하거나 예쁘게 그려야 한다고 의견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미야자키는 철저히 노파로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다. 그리고 작품에서 보듯 소피는 실로 쭈글쭈글, 주름마다 생기가 솟아나는 할머니가 된다. 소피는 할머니가 된 뒤에 더 사랑스럽고 더 활기차며 더 멋진 여성이 되었다. 우리 모두는 자기 조건에서 출발해서 생각지도 못한 곳까지 간다.  


미야자키는 삶의 조건으로 늙음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할머니 소피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능청스러움’이다. 우리의 할머니들이 그렇듯 누구를 만나더라도 케미 뿜뿜이다. 즉 할머니-소피는 남의 이런저런 상태를 자신의 쭈글거림 안으로 잘 말아 넣을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나다. 

 

특히 소피는 말솜씨가 대단하다. 여동생 레티와의 대화도 몇 마디 잘 이어가지 못했던 모자가게의 소피는, 계단 내리기를 어려워하는 노인을 돕겠다는 청년의 말이나 황야에 가서 좋을 게 없다는 목동 부부의 말에도 유쾌하게 응대한다. ‘알아서 할게~’ 말을 잘할 뿐 아니라 말로 남에게 뭔가 시키기도 잘한다. 캘쉬퍼를 협박하고 놀리며 거의 구워 삶다시피할 정도로 소피의 칭찬과 격려는 힘이 세다. 불을 구워 삶는 소피다! 소피의 ‘멋지다’ 한 마디면 캘쉬파는 그 무거운 잡동사니들을 끌고 높은 산맥도 오를 수 있고 아름다운 호숫가로 내려올 수도 있다. 

 

소피는 거짓말도 할 수 있게 된다. 황야의 마녀와 함께 킹스베리의 성에 갈 때, 자기 모자 가게의 이름을 ‘펜드래건’이라고 속이기도 하고 새 일자리를 구하려 성에 간다고 말을 지어내기도 한다. 설리번 앞에 가서도 ‘우리 아들(하울)은 전쟁에 나갈 수 없답니다, 겁쟁이라서요’라는 식으로 떨지도 않고 ‘너, 나가 떨어지는 것이 좋겠어!’를 전달했다. 동시에 설리번 앞에서 이 왕국은 음흉하다며 질타도 했다. 소피는 약속도 할 수 있게 된다. 별들의 호수에서 하울의 과거와 조우한 뒤, 소피는 저주로 엮이고 있는 어린 하울과 캘쉬퍼에게 다시 만나자라고 약속한다. 소피는 언어의 달인이 된다. 

 

노파가 된 소피는 누구의 허락을 받지 않고 산다. 타인의 삶에 개입하는 것에도 자신감이 넘친다. 마르클이 허락한 적 없는데도 식사 예절을 가르치고, 집 지키느라 악마 되기 직전인 하울을 말리기 위해 의논도 없이 성을 부숴버린다. 미야자키는 이것이야말로 늙음의 매력이라고 한다. 할머니 소피는 자기 판단을 믿고 간다. 육체의 생기가 아니라 말의 생기로 능동적으로 사건의 맥락을 타며 문제를 해결한다. 중요한 것은 젊어지는 일에 있지 않다, 내 나이를 잊을 수 있어야 한다. 말의 힘을 길러야 한다.  

 

출처 - 다음 영화

 

 

글_오선민(인문공간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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