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 애니미즘

[미야자키하야오-일상의애니미즘] 청소는 나의 운명

by 북드라망 2023. 12. 21.

《마녀 배달부 키키》③ 캐릭터   

 

키키(3) 청소는 나의 운명

 


키키는 붉은 돼지
키키는 과연 어떤 마녀가 될까? 바닷가 마을에 계속 머무르게 될까? 설마 톰보와 결혼까지 하고?


키키는 마녀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리는 마법사 계열의 개시를 멋지게 알리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후의 마법사들과 비교해보면 키키에게는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온천장의 유바바는 다섯 손가락 전부 반지를 끼고서, 온갖 금은보화로 장식한 오피스와 내실(內室)에서 일한다. 움직이는 성의 하울도 지저분하기는 하지만 자기 방을 엄청나게 꾸미고 살며 외모 가꾸기에도 소홀함이 없다. 바다 여신의 딸인 포뇨는 외모에는 큰 관심이 없지만 그 어머니 그란 만마레 역시 귀걸이며 목걸이며 화려한 화장이 대단했다. 그란 만마레는 움직일 때마다 별빛과 물빛이 그 주변을 화려하게 가득 채웠다. 미야자키의 마법사들은 모두 화려하다! 

 

그런데 키키를 보라. 같은 마녀인데도 수수하다. 검은 옷에 장신구라고는 머리에 꽂은 커다란 붉은 리본뿐이다. 앞의 세 마법사와 마녀들에 비하면 특히 그 방이 검소하다. 그러고보니 블링블링한 마녀들의 전신이 되는 것은 의외로 《라퓨타》의 공적(空賊) 도라와 그의 아들들이다. 《붉은 돼지》에 나오는 공적들도 엄청나게 화려하게 비행선을 도색하고, 독특한 유니폼으로 갖은 멋을 다 뽐내었다. 그란 만마레는 만물의 어머니이시니까 예외로 하자. 유바바, 하울, 도라와 공적들이 외모에 집착하는 것은 자기 욕망에 충실해서다. 그래서 이들은 왕이나 권위자와는 늘 대립한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이다.  


키키에게 다른 마법사들과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비행능력에서다. 사실 키키는 마법사 계열이라기보다는 비행사 계열이라고 할 수 있다. 빗자루를 깎기도 하고 실제로 날기도 하니까. 기술자이자 조종사라는 점에서는 나우시카(《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와 파즈(《라퓨타》), 그리고 톰보와 계열이 같다. 여기서 톰보와 키키의 미래도 점칠 수 있는데, 둘 사이에 러브 스토리가 만들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능력이 같기 때문에 경쟁자가 된다. 


키키와 가장 닮은 캐릭터는 미야자키가 바로 다음에 작업하게 되는 《붉은 돼지》의 포르코다. 포르코는 마법사는 아닌데 저주를 받아 반인반돈(半人半豚)이 된다. 마법 때문에 살고 죽기에 키키와 처지가 같다. 포르코가 키키의 분신인 것은 그가 해적들과 대립한다는 점에서 확실해진다. 포르코는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날지 않는다. 키키도 포르코도 자기 비행기에 자기 것을 싣지 않는다. 키키는 배달품을 싣고, 포르코는 아이들을 태운다. 


더 나아가면 포르코와 키키 모두 라디오 듣기를 즐긴다는 점도 닮았다. 포르코가 와이셔츠가 하나밖에 없는 단벌 신사고, 그 역시 집 없이 무인도에서 소박하게 지낸다. 그러므로 키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포르코와의 차이에서 접근해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 또 하나, 키키의 비행기는 빗자루다. 단지 배달일만 그리고 싶다면 우편배달기나 Fedex 물류 비행사를 꿈꾸는 소녀의 이야기여도 된다. 미야자키는 왜 빗자루를 선택했을까? 

 

출처 - 다음 영화


    


배달의 키키
키키는 배달부다. 배달부는 물건의 자리를 찾아주는 사람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누군가를 치료하는(엄마 마녀), 누군가의 사랑을 중개해주는(공장 지역의 견습 마녀) 것이 아니라 왜 배달하는 마녀에 집중했는가? 


키키는 모두 5번을 배달한다. 첫 번째 배달에서는 빵집에 두고 간 공갈 젖꼭지를 오소노를 대신해 아기에게 돌려준다. 자기 집을 찾기도 바쁠 때인데, 문득 곤란에 처한 아기를 위해 빗자루를 탄다. 두 번째 배달은 디자이너 언니의 부탁으로 그 조카 생일 선물이 될 까만 고양이 인형을 가져다주기이다. 여기서 키키는 갑지가 불어온 돌풍 때문에 숲에 인형을 떨어뜨리게 되고, 자기 고양이를 인형 대신으로 위장해서 배달한다. 세 번째 배달은 어떤 아저씨가 무거운 짐을 부탁한 것인데, 키키는 낑낑거리며 들고 계단을 올라 배달에 성공한다. 네 번째 배달품은 푸른 눈의 할머니가 손녀 생일 파티를 위해 준비한 청어와 호박쌈 파이이다. 이때 키키는 오븐 고장에 비까지 내려 톰보가 초대한 자신의 파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네 번의 배달에서 키키는 자기 집, 자기 고양이, 작은 자기의 몸, 자기의 파티를 모두 내려놓으며 누군가의 부탁을 수행한다. 키키가 배달한 것은 모두 자신의 소유나 욕망과는 무관한 것들이다. 미야자키가 생각한 배달이란 일차적으로는 소유와 대비되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키키가 걸어서 했던 다섯 번째 배달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키키는 톰보와의 약속을 말없이 어기게 된 그날 비를 많이 맞아서이기도 하고, 자기의 능력에 회의가 생기기도 해서, 감기 몸살을 앓게 된다. 회복 후 키키는 오소노가 시키는 대로 누군가에게 빵을 배달하게 되는데, 알고보니 아주머니가 키키를 위해 톰보에게 빵으로 대신 사과할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다. 키키는 다섯 번째 배달에서 비로소 자신의 사과를 배달하게 되지만, 자신이 무엇을 왜 배달하는지는 모르고서였다. 빗자루를 타고 배달할 때에는 타인의 욕망을, 걸어서 배달할 때에는 자신의 마음을! 자기를 위해서는 날 수 없다, 난다면 누군가를 위해서다! 


《마녀 배달부 키키》는 미야자키 작품 중 가장 많은 상품이 나오지만, 키키는 철저히 소비의 세계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키키의 배달은 늘 정해진 금액 이하나 이상의 노동과 교환된다. 키키는 성실하니까 조금 저축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키키의 방에는 새 물건이 들어오지 않는다. 빈 유리병에 꽃이 꽂혀 있기도 하고, 화덕 옆에 못보던 서랍장이 놓이기도 하지만 가게에서 샀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소박하고 낡은 느낌이 든다. 어디서 주워 온 것은 아닐까?  

 

키키는 자기를 위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심지어 빗자루조차 말이다. 고향 마을을 떠날 때, 키키는 애써 깎아 둔 자신의 빗자루 대신 엄마의 오래된 빗자루를 타고 나왔었다. 이 빗자루가 부러지게 되어, 새로 빗자루를 깎아 보았지만 결국 톰보를 구할 때는 거리 청소부 아저씨의 대솔을 빌렸다. 앤딩 씬에서 키키가 타는 것도 바로 이 솔이다. 청소부 아저씨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 아닐까? 키키는 끝까지 자기 빗자루라할 것을 갖지 못한다. 


마지막에 키키는 추락하는 비행선에 매달린 톰보를 구해 지상으로 데리고 내려온다. 키키의 빗자루는 이제 물건이 아니라 사람을 싣게 되므로, 비로소 여기에서 빗자루는 한 대의 비행기가 된다. 같은 비행사지만 키키가 톰보보다 수준이 높다. 톰보는 그저 재미 때문에 난다. 키키는 자기 목숨을 걸고 톰보의 목숨을 구한다. 이렇게 비행의 품격이 다르니, 동종 업계에 종사하지만 키키와 톰보가 남녀 사이로 발전할 가능성은 낮다. 키키에게 배달이란, 비행이란 타인의 삶을 어떤 자리로 데려다주는 행위이다. 비행이 누군가를 태우는 일이며, 그 누군가가 어디에 이르러야 할지를 함께 생각하는 일임은 다음 작품 《붉은 돼지》에서 다시 다루어지게 될 것이다.   


서구 문화에서 마녀란 마을 바깥에 사는 존재다. 어떤 규율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방탕한 자기 욕망의 주체자다. 그런데 도시 안에 들어와 사는 키키는 마녀로서 소외를 겪는다. 키키는 자유롭지도 않고 제멋대로도 아니다.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해주기를 빵집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현대는 노동을 자기 재주를 통해 자기 욕망을 실현시키는 일이라고 보는 시대다. 그래서 남들을 위해 하는 일, 다른 목적에 종속된 일, 그런 미션들은 ‘그림자 노동’이라고 폄하된다. 그래서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이 평가절하되기 일쑤다(이반 일리치,『그림자 노동』). 그런데 미야자키는 마녀가 배달을 한다고 한다. 배달이야말로, 누군가의 목적을 위한 노동이야말로, 마법이라는 것이다. 이 마법은 끊임없이 키키를 고독하게 만들고 힘들게 했다. 하지만 타인들의 마음을 응원하는 자야말로 마녀다. 자기 욕망을 보고 날지 않는 자야말로 마녀다. 톰보는 죽었다 깨어나도 가질 수 없는 저 위대한 능력, 마음 먹으면 언제라도 날 수 있는 그 능력은, 타인을 보고 가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최고의 능력인 것이다. 

 

출처 - 다음 영화

 


마녀가 빗자루를 드는 이유 
키키의 비행기는 원래의 기능이 흙먼지 풀풀 날리는 마당을 쓸기로 되어 있는 빗자루다. 키키가 나중에 쓰게 되는 솔-빗자루도 원래는 도심 아스팔트 위 쓰레기를 치우는 물건이었다. 배달과 청소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배달은 물건들의 자리를 찾아주는 일이다. 각자 맞는 자리에서 만물은 생명력을 얻는다. 편안하고 건강한 삶을 영위한다. 공갈 젖꼭지를 되찾은 아이는 느긋한 마음이 되어 더 잘 웃게 될 것이다. 고모 대신 도착한 선물로 조카는 섭섭함을 덜 수 있을 것이다. 천공에서 살아 돌아온 톰보의 안녕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할머니가 청어와 호박쌈 파이 말고 알록달록 유행하는 드레스를 손녀에게 선물하셨으면 어땠을까 싶지만, 버릇없는 이 아이도 어른이 된 어느 날 청어 파이를 떠올리며 그 사랑을 크게 되새기게 될 것이다. 


물건에 제 자리를 찾아준다는 의미에서 키키의 배달은 빗자루와 잘 어울린다. 빗자루를 탄 마녀라는 관점에서 키키의 숨은 능력에 대해 더 생각해보자. 청소란 정리정돈이 기본이다. 신발은 식탁 위에 있을 때 더럽지, 신발장 안에서는 더럽지 않다(메리 더글라스,『순수와 위험』). 공간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각각의 사물이 자기 있을 자리에 있도록 하는 일이다. 쓰레기란 용처를 잃은 사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떤 물건도 그 자체로 쓰레기가 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키키를 계승하는 이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의 청소부 소피이다. 정작 마법사는 성주 하울이지만, 실제로 빗자루를 들고 쓸고 닦는 이는 소피이다. 하울의 방은 온갖 아름다운 것들로 꽉 차 있다. 하울은 예쁘게 반짝이는 모든 것들 속에 푹 파묻혀 정신없이 지내면서 왜 청소는 못할까? 청소를 하려면 물건들의 제자리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물건들의 제자리란 어디 정해진 위치 같은 것이 아니다. 집에 갓난아이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유리컵과 깨지기 쉬운 도자기들은 모두 높은 선반 위로 올려놓아야 한다. 건강이 좋지 않아 많이 누워 있어야 하는 환자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크게 움직이지 않아도 누워 있는 자리에서 필요한 것을 바로바로 집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수험생이 있는 집은 또 어떨까? 이렇게 그 공간에 누가 있는가, 지금이 어떤 때인가가 사물의 위치를 결정한다. 

 

그럼 아이와 노인이, 수험생과 갱년기 주부가 함께 사는 공간에서는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까? 그렇다. 청소에는 이렇게 차이 나는 관점들을 종합할 수 있는 비전이 필요하다. 이 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어떤 관계였으면 좋겠는지,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세상의 사물들과 관계 맺어야 할지, 가족 전체의 가치관이 먼저 만들어져야 청소도 할 수 있다. 이때 특정한 누군가의 관점으로 공간 전체를 도배하는 것은 곤란하다. 너무 어리거나 너무 건강이 좋지 않은 누군가는 배려해야 하지만, 되도록 모두가 사물과 편안한 관계를 누릴 수 있어야 그 집이 편안해진다. 그러니 청소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 취향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하울이 청소를 잘 하지 못했던 까닭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대책 없이 주워 모았기 때문이다. 자기의 욕망, 자기의 기억, 자기의 두려움. 하울은 이 모든 것을 끌어안고 사느라 성에 누가 들어오는지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소피는 견습 마법사 마르클과 저주 받은 지팡이, 황야의 마녀, 하울 이 모든 이들이 성안에서 함께 살고 있음을 전체적으로 본다. 소피는 설거지 되어 있지 않은 식기와 빵 부스러기로 어지러운 식탁이 신경이 쓰인다. 소피는 자신은 단 한번도 예쁜 적이 없었다며 비 오는 날 성 밖에서 한바탕 울지만, 금방 털고 들어와 여러 가지로 고생한 하울을 돌본다. 외모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를 꾸미기보다는 다른 이들의 처지와 문제에 더 마음을 쓴다. 키키는 이런 소피의 전신(前身)이다. 마음이 고운 이 아이는 사물들을 이리저리 옮겨줄 때, 그 물건을 누가 보내는지 어디에서 받는지 계속 마음을 쓴다. 

 

출처 - 다음 영화

 

 

미야자키는 자기 소유로부터, 자기 취향으로부터 달아나라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모순적이기도 하다. 슬럼프에 빠진 키키에게 조언을 해준 우르술라는 ‘자기답게 그리기’를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키 역시 자기 능력의 의미에 대해 스스로 묻고 답해야 남들을 위해 배달도 할 수 있었다. 자기답게 날기는 어떻게 자기 취향 내려놓기와 연결될까? 


마지막에 키키는 부모에게 편지를 쓴다. ‘배달일이 자리를 잡아서 약간 자신감이 붙었어요. 가끔 우울하지만 저는 이 마을이 정말 좋답니다.’ 앞편에서는 키키가 언제고 다른 마을로 떠날지 모른다고도 해석해보았다. 키키는 이 마을에서 자기의 물건을 갖지 않으려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마녀란, 모든 사물의 제자리 찾기로서 비전을 세우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마녀는 굳이 낯선 곳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키키는 앞으로 바닷가 마을에서 만들어지고 부서지는 많은 물건들의 자리를 이리저리 찾아주면서 날 것이다. 이 마을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일일지, 모두가 어떻게 물건을 주고받으면 좋겠는지 생각을 거듭하는 가운데 키키가 아니면 불가능한 방식으로 하늘을 날 것이다. 가끔 우울한 이유는 거기에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모색과 궁리를 거듭하는 일은, 자기의 궤적을 고집하지 않는 비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키키는 바닷가 마을에서 오래오래 살 것이다. 바닷가 마을이 좋은 곳이어서가 아니라, 어디서나 많은 물건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돌아다닌다는 것을 보고 살기 때문에. 경로란 그어볼수록 많아진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에. 키키는 이 많은 경로들, 시도와 모색의 모험들 앞에 가장 자기다운 방식으로 당당하리라.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