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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의 책들

『신화의 식탁 위로』지은이 오선민 선생님 인터뷰

by 북드라망 2023. 7. 25.

『신화의 식탁 위로』지은이 오선민 선생님 인터뷰

 



1. 선생님의 전작 『슬픈 열대, 공생을 향한 야생의 모험』이 인류학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새롭게 소개하신 책이었습니다. 이번 『신화의 식탁 위로』는 부제가 ‘레비-스트로스와 함께하는 기호-요리학’인데요, 기호-요리학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신화의 식탁으로 가는 길을 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사람들은 왜 이야기하기를 좋아할까?’ 이것이 저의 출발점입니다. 어떤 이야기라도 하는 맛이 있지 않습니까?^^ 인생의 다양한 단짠단짠을 느끼게 해주니까요. 레비-스트로스는 여기에 하나의 의견을 덧붙입니다.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서’라고 말이지요. 인간은 자신의 편견을 되돌아보고, 이기적 욕심을 내려놓기 위해, 타인이 겪은 온갖 모험을 이야기했다고요. 그는 이런 태도를 ‘야생의 사고’라고 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무문자 사회의 신화를 연구했습니다. 열대의 인디언들은 문자를 거절했는데요, 자연의 어떤 것도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생기로운 현실을 응고시키는 문자는 삶에 부적절하다고 본 까닭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찾아보니 열대는 사람이 표범이 되고, 여인이 무지개가 되고 하는 식으로, 결국에는 모든 것이 자기 자리를 옮기며 궁극의 조화를 모색하는 이야기로 가득했습니다. 인디언들이 이런 이야기를 즐긴 까닭은 표범에게서 먹이가 된 아비를 보고, 무지개에서 하늘과 땅을 잇는, 즉 없음과 있음을 잇는 모성을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무지개’는 비온 뒤 하늘에 떠 있는 그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대신 ‘뭔가가 벌어져 있음’ 혹은 ‘관계가 비틀려 있음’을 암시하지요. 또 그것의 ‘연결 가능성’도요. 이렇게 신화의 언어는 지시체를 재현하지 않고 의미의 관계망을 견인합니다. 하여,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의 언어를 ‘기호’적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신화(myth)에 대한 정의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처럼 다양한 욕망과 기질을 지닌 초월적 신들의 무용담일 수도 있고요. 인류가 자기 무의식의 심층을 분석하기 위해 사용한 내면 여행의 안내서(캠벨)일 수도 있습니다. 민족학에서는 신화를 각 문화의 고유한 정체성을 표현하는 상징체계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정의들 대부분은 문자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고대국가의 옛이야기를 분석하면서 나왔습니다. 이와 달리 무문자 사회에 주목한 레비-스트로스는 신화를 ‘대칭적 사고의 보고(寶庫)’로 정의합니다. 신화는 창발하는 생명의 장 안에서 누구에게도 편중되지 않는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고요. 

 

야생의 신화들은 ‘자기’를 해체해서 광대한 숲의 네트워크에 접속시키자고 하지요. 이때 요리의 비유를 적극 활용합니다. 이야기 속에서 굽기, 끓이기, 발효시키기는 각각 ‘태운 연기로 하늘과 대지를 연결시키기’, ‘녹인 물로 마시는 모두를 하나되게 하기’, ‘썩게 함으로써 만물을 생명의 근원으로 되돌려 보내기’로 이해되는 겁니다. ‘먼 것은 가깝게’, ‘편중된 것은 고르게’, ‘살고 죽기는 함께’인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만물과 적극적으로 연결된 삶을 살라고 자꾸 권합니다. 저는 신화를 기호-요리학으로 새롭게 규정하면서 인생의 다양한 맛을 음미하는 비법 같은 것을 배우려 했습니다.    

 


2. 『신화의 식탁 위로』를 ‘먹텔링의 기원을 찾아서’란 글로 시작하셨는데요, ‘먹[食]+텔링(telling)’이란 어떤 것인가요? 단순히 ‘먹는 이야기’만은 아닐 것 같아서요. 


책 제목을 보시고 먹방을 떠올리실 수도 있겠습니다.^^ 요즘 먹방 유튜버들은 엄청난 종류와 양의 음식을 먹으면서 100만이 넘는 구독자 수와 조회 수, 그에 비례하는 수입을 얻고 있다고 하지요. 미디어에서 유행하는 예능 프로그램들은 어디서 무엇을 먹을까를 두고 게임을 하는 것도 많더라고요. 먹는 이야기는 만드는 과정도 먹는 모습도 과장되어 표현되기 때문에 모두 재미있습니다. 과로로 지친 우리에게 확실히 에너지를 주고요. 보고 있으면 영혼이든 신체든 살이 오르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 전래동화에는 할머니가 호랑이에게 떡을 주는 이야기도 있죠. 사실, 먹는 이야기는 우리만 즐긴 것이 아닙니다. 그림 형제가 수집한 민담도 사과 먹다 목에 걸리는 백설공주, 과자의 집에 갇히는 헨젤과 그레텔 등 모두 뭔가를 먹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류가 먹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까닭은 ‘먹어야 산다’는 생의 근본 조건을 음미하려 해서가 아닐까요? 그런데 요즘과 비교해 보면 옛날의 먹는 이야기는 ‘내가 먹힌다’는 테마를 더 중요하게 다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설공주도 사과 덕분에 죽고, 헨젤과 그레텔도 과자 때문에 죽기 직전까지 갑니다. 과거의 먹텔링을 듣고 있으면 정신이든 몸이든 부서지고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지요. 저는 신구(新舊)의 두 먹-텔링이 보여 주는 이 차이가 흥미롭습니다. 

 

먹-텔링은 기본적으로 무엇을, 누구와, 어떻게 먹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합니다. 그러니 식재료의 바삭한 질감과 달고 짠 맛 자체에 집중하는 이야기일 수만은 없고요, 근본적으로는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를 먹여야 한다’는 절대 진리를 직시하기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먹-텔링을 운명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먹히게 될 생명의 장 전체를 통찰하려는 시도니까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하는 윤리학인 셈입니다. 

 

 


3. 이 책의 ‘신화의 식탁 위’에 오른 메인 메뉴는 꿀, 옥수수, 야생돼지 그리고 [놀랍게도] 사람…입니다. 이 메뉴는 어떤 기준으로 선정하셨을까요?


레비-스트로스는 『신화학』에서 남아메리카 여러 부족의 옛이야기를 많이 소개합니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부족의 입사나 장례 의례를 뒷받침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편의상 그런 신화들을 요리의 관점에서 정리하고 제목을 붙였는데요(‘날것과 익힌 것’, ‘꿀에서 재까지’, ‘식사 예절의 기원’), 제가 그 표제를 식재료의 관점에서 정리해 보니 제일 많이 나오는 메뉴가 꿀, 옥수수, 야생돼지가 되더라고요. 그런데 신화는 기호-요리이기 떄문에 실제의 꿀이나 옥수수, 야생돼지를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신화가 좋아하는 기호들은 모두 양의적입니다. 이쪽에도 속하고 저쪽에도 속해서, 어느 편도 절대적인 진리처는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에 좋지요. 꿀은 곤충이 인간처럼 발효시키는 음식이라는 점에서 양의적입니다. 심지어 벌은 자연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생활을 하지요. 옥수수는 껍질을 벗겨야 먹을 수 있습니다.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드러내야만 하는데, 또 그 안에는 수많은 알곡이 있습니다. 표면과 이면의 관계를 사색하기에 딱 좋지요. 돼지는 또 어떤가요? 인간이 먹을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먹고 먹힘의 연쇄를 설명하기에 좋지요. 인간의 피부 아래에 있는 것이 결국 누군가의 고기라는 점에서, 껍질을 벗겨 먹는 옥수수를 떠올리게도 해줍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이지요. 남아메리카에 전통적으로 식인 관습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맨 처음 인디언을 마주한 스페인 사람들이 그들을 혐오하게 된 까닭도 ‘인간이 인간을 먹는다’는 ‘끔찍한 풍습’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배가 고파 인간을 먹는 인디언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뛰어난 능력을 얻고자 하고, 부족의 고상한 성질을 보존하기 위해 특별한 인간을 요리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신화에서도 인간이 먹히는 사건이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먹히는 인간은 덕 없는 인간입니다. 제 욕심만 채우려 들다가는 질병이나 죽음의 화신이 나타나 그를 먹어 버리지요. 신화가 인간을 식재료로 삼는 이유는 사람이면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가르치기 좋아서였습니다. 물론 이때에도 신화는 잡아먹히는 것을 나쁜 일로 보지 않습니다. 먹히는 그 인간은 생멸의 장에서 누군가를 살리게 될 테니 복을 짓는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4. 『신화의 식탁 위로』는 ‘청소하기’로 끝을 맺는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사는 건 ‘먹어치우는’ 게 아니라 ‘먹고’, ‘치우는’ 일이라는 걸 당부하시는 느낌이기도 했고요. 선생님께서 ‘먹기’와 ‘청소하기’를 통해 하고 싶으셨던 이야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요즘 제가 공부하고 싶은 큰 주제는 ‘밥하고 청소하기의 인류학’입니다. 이번에 책을 쓰면서 밥하기의 문제를 다르게 보게 되었는데요, 먹고 먹히는 관계를 고민한 옛이야기를 읽다 보니, 청소하기도 결국은 관계에 대한 예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잘 보신 것처럼 우리는 ‘먹고’ ‘치우기’를 따로 고민해야 합니다. 먹기가 타인을 나에게로 불러들이는 일이라면 치우기는 내게로 온 것을 내보내는 일이니까요. 

 

신화는 치우기를 어떻게 볼까요? 무문자 사회의 신화에는 똥이나 오줌, 정액과 월경혈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신화 속 ‘더러운 것들’은 ‘멀고 가까움에 있어 거리 조정이 실패한’ 사태를 지시합니다. 맞습니다. 똥은 더럽다고들 하지만 밭에서는 최고의 거름입니다. 신발은 식탁 위에 있을 때만 더럽습니다. 신화는 더러움의 기호를 적극 활용해서, 삶에 치우침이 일어나게 되는 사태를 지적합니다. 몰래 혼자 꿀을 먹은 소녀가 똥을 덮어쓰게 된다는 식이지요.

 

청소의 문제에서 저에게 큰 영감을 준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입니다. 미야자키의 작품에는 실제로 요리하고 청소하는 이야기가 함께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요리하고 청소를 잘하는 주인공은 인사도 잘하더라고요. 청소를 하기 위해서는 깨끗한 상태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합니다. 신화는, 깨끗한 일상이란 다른 욕망을 지닌 자들이 조화롭게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우선은 싫고 나빠 보여도 결국은 함께 맞추어 살아가야 하는 관계들로 가득한 것이 이 우주입니다. 내 주변을 채우는 사물들에게까지 감사의 인사를 보내는 행위가 곧 청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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