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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의 책들

슬픈 열대, 공생을 향한 야생의 모험 저자 인터뷰

by 북드라망 2022. 7. 18.

『슬픈 열대, 공생을 향한 야생의 모험』 저자 인터뷰

 



1. 선생님께서는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타자’를 찾아 떠나는 동화라고, 창발하는 시공간을 살아야 하는 ‘자신’을 이해하고 성숙시키는 책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언뜻 보면 ‘타자’를 찾아 떠난다는 것과 ‘자신’을 이해하고 성숙시킨다는 것이 상반되게 느껴지는데요. 이에 대해 조금 더 설명 부탁드립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남미로 떠난 것은 27살이던 1935년입니다. 당시의 파리는 타자에 관심이 많았어요. 기계로 개발되지 않은 천연의 자연, 회사도 학교도 없이 미개한 식민지들. 서양문명-백인남성을 기준으로 어떤 대지나 인종을 열등한 ‘타자’라고 불렀던 것이죠. 유럽인들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타자의 세계로 떠났다가 우쭐해져서 돌아오곤 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유럽식 근대화를 인류사의 정점으로 생각하는 이 편협함에 잔뜩 인상을 찌푸리면서 남아메리카로 떠났습니다. 과연 그들이 정말 나와 다를까?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까? 하면서요.


『슬픈 열대』는 1950년, 그가 42세 되던 해에 쓰인 여행기입니다. 놀랍죠. 레비-스트로스는 이미 『친족의 기본구조』(1949)를 비롯한 여러 연구로 학계에 큰 이름을 날리고 있었으니까요. 굳이 여행기가 아니어도 충분히 남미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왜 『슬픈 열대』라는 형식이 필요했을까요? 게다가 여행기라지만 남미 소개가 주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열대를 통과하는 자기를 그리려고 했습니다. 타자의 삶에 관심을 두었던 인류학자는 왜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요? 이 글을 쓰기 위해 그는 왜 15년이 필요했을까요? 

 

우리는 레비-스트로스에게 타자와 자기의 위치를 묻는 일이 중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의 어려움도요. 그의 주요 저작은 『야생의 사고』(1962)와 『신화학』 4권(1964~1971)입니다. 이 두 책은 1950년대 초반에 기획되었고 『슬픈 열대』와 함께였습니다. 그런데 뒤에 출간된 두 책 모두 타자의 정신구조를 다룬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슬픈 열대』 집필의 이유는 선명해집니다. 레비-스트로스는 타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자기를 먼저 설명해야 했습니다.

 

『슬픈 열대』에는 자아와 타자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잘 나와 있지요. 레비-스트로스는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콰라족, 투피 카와이브족 등을 직접 방문하며 관찰했고 유럽으로 돌아와서도 여러 문헌을 꾸준히 살피며 자타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 내릴 수 있었지요. ‘자연 안에서 공동체를 꾸리고 살아야만 하는 인간은 우주적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슬픈 열대』는 어떤 민족에 속해 있든지 인간은 자연과의 공생, 타인과의 공생을 삶의 근원적 목표로 설정한다는 것을 보이는 책이어야 했습니다. 열대에 들어간 그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자타의 구분은 표면적일 뿐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책 안에서 타자를 ‘내가 살아볼 수도 있었을 어떤 삶을 사는 자기’로 정의했습니다.

 

여행은 다른 습속 체험입니다. 나와 다르게 사는 사람들은 인생을 다른 관점에서 보는 자기들입니다. 그래서 다른 풍경 속을 걸으면 내 상식, 내 도덕의 한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겨우 인간, 그것도 백인에 불과함을 깊이 받아들이게 되면 ‘나’는 모든 존재의 근원적 고뇌에도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생각은 옳지도 완전하지도 않아요. 레비-스트로스는 오직 타자만이 그런 반성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2. 책을 읽다 보면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듭니다. 선생님께서는 레비-스트로스에게 여행은 서서히 다른 존재가 되어 가는 경험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다른 존재가 되어 가는 여행은 어떤 여행일까요?

『슬픈 열대』가 주는 큰 즐거움 중 하나는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열대를 생생히 탐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호기심 많고 친절한 가이드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레비-스트로스가 문장력을 대폭발시키는 7장 ‘일몰’은 정말 해질녘 대서양을 미끄러져 가는 듯한 착각을 안겨주지요. 20장을 넘기다 보면 갑자기 카두베오족 문신을 한 아가씨가 ‘고상하다는 것은 이런 거야!’ 하며 우아하게 지나갈 것 같고요. 책을 덮고 눈을 감으면 압도적인 자연 앞에서도 당당하고 예의 바른 인디언 청년이 나타나지요. 레비-스트로스를 따라 숲을 돌아다니다 보면 뭘 못 가져서 전전긍긍하는 제 모습이 작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열대를 경이와 감사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지구의 어딘가에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좀 마음이 커지는 것 같아요. 그들 눈에 나는 어떻게 비칠까도 생각해 보게 되고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타자’란 표면적으로는 달라 보이지만 근원적으로는 나와 같은 인류입니다. 다른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은 보로로족이나 카두베오족처럼 말하고 행위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나의 욕망과 습관을 비춰 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적 삶의 다양함에 주의를 두다 보면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다른 내가 되기란, 어디에 있건 누구를 만나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간다는 의미이고요.

 



3. 야생의 사고가 ‘이분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이분법이라 하면, 극단적인 구분의 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요.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고 배척하는 이분법이 아닌 상호의존성을 기반으로 한 ‘열대의 이분법’이 궁금합니다.

이분법에도 종류가 있겠지요. 가장 유명한 것이 흑백을 분명하게 가르는 식으로 척도 들이대기를 좋아하는 이분법입니다. 이런 이분법은 종종 정반합(正反合)으로 전개되는 변증법과 결합합니다. 차이 나는 두 항 중 하나를 옳다고 가정한 다음, 다른 항에서 옳지 않은 것들을 부정해 가는 논리이지요. 이런 변증법은 항들을 고정된 무엇으로 보고 부정해야 할 악덕 색출에 바쁘니 편집증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루어야 할 무엇’과 ‘되어야 할 나’를 목적으로 설정하는 이 변증법적 이분법에 익숙합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열대 인디언들이 삶을 개척하는 방법도 이분법적이라고요. 그런데 좀 다르답니다. 숲의 이분법은 각 부족마다 고유한 신화 논리의 골조를 이룹니다. 인디언들에게 신화란 하나의 자연학이자 윤리학이지요. 우주·만물의 기원을 분석하는 동시에 사람들끼리 어떻게 지내야 할지를 파악해내는 과학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를 두고 ‘야생의 사고’라고 명명했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이분법은 사고를 편의적으로 시작하기 위한 방법일 뿐, 자연 그 자체를 객관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개념틀은 아닙니다. 또 야생의 이분법에서는 목적을 우주·자연의 조화로 설정합니다. 그런 까닭에 이분되는 각 항들이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우주에는 천상(높음)과 지상(낮음)이 있다’, ‘그 안에는 천체가 뜨는 방향과 지는 방향이 있다’, ‘모든 존재는 생과 죽음을 갖는다.’ 이분법적이기는 한데 모두 관계적이네요? 하나의 옳음을 계속 밀고 가는 식이 아닙니다. 자연 안에 모든 것이 맞물려 있음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전체를 부분에서 분절하는 이분법인 셈입니다. 홍수가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높은 것은 낮아지고 낮은 것이 높아집니다. 천체의 경우도 따져 보지요. 계절에 따라, 해인지 달인지에 따라 별무리의 뜨고 짐은 다른 모양을 갖지요. 관점에 따라 방위도 달라집니다. 우주·자연이 부단히 변화한다는 것을 알며, 까마귀에게 좋은 것이 곰에게 좋을 리는 없음을 인식하기에 여기에는 부정이 없습니다. 목표는 조화입니다.

 

그래서 열대의 이분법은 상보적입니다. 『슬픈 열대』에 소개되는 보로로족은 죽음과 삶의 상보성을 일상의 원리로 구조화시켰습니다. 보로로족의 두 반족, 세라족과 투가레족은 철저히 족외혼을 고집했어요. 장례도 꼭 다른 부족이 치러 주었고요. 대립하지만 생사의 문턱에서는 반드시 의존하지 않을 수 없도록 이들은 자기 문화를 구조화시켰습니다. 인디언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내가 사냥한 것은 내가 먹을 수 없다’라든가 ‘남자는 잡을 수만 있고 요리할 수는 없다’라는 규범이 있어, 밥 한 끼를 만들어 내려고 해도 역할 중복이 없는 다양한 분업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하죠. 나와 타자, 남자와 여자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지만, 반드시 둘이 손을 맞잡고 살 수밖에 없도록 습속의 도덕을 제작한 것입니다. 이렇듯 야생의 이분법은 우주의 모든 부분은 상호적으로 맞물릴 수밖에 없음을 통찰하는 대칭의 기호학입니다. 

 


4. 저희는 보통 정해진 위치와 고유한 역할이 있다는 것을 자유롭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열대 원주민들에게는 이러한 특징이 오히려 공생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 같습니다. 구성원 각자의 고유한 역할을 기반으로 한 열대의 공생은 어떻게 가능한 건가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정체성, 개성 같은 것이 참 중요하지요. 여기에는 내가 빈 그릇처럼 덩그러니 있고, 바깥에 이런저런 환경이나 물건이 놓여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깥에서 뭔가를 들고 들어와서 이 그릇을 채우는 것을 두고 스펙을 쌓는다, 개성을 찾는다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자유’라는 말도 바깥의 뭔가를 간섭 없이 취할 수 있다는 의미로 쓰게 되고요. 

 

그런데 자연을 관찰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봄에 개구리가 크게 울어야 가을에 곰이 살찌듯 모든 것은 전체적으로 맞물려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때를 아는 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맞물려 있어야 잘 사는 것인지를 이해하는 일이 됩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열대의 공생은 자본주의 사회를 모델로 하지 않습니다. 이끼에서부터 독수리에 이르기까지 온 관계를 통합적으로 사고하는 가운데 자기 자리 하나를 찾아내는 일이 숲의 공생입니다. ‘고유한 역할’이란 때와 장소에 맞는다는 의미이지, 여성이니까 한국 사람이니까 하는 식의 정체성론과는 무관합니다. 게다가 열대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만 관심을 두다가는 큰일이 나지요. 풀벌레 하나, 별 하나와의 관계까지도 종합적으로 통찰하는 가운데 애써 찾아내는 나만의 위치값, 그것이 고유한 공생입니다. 많이 알고 많이 가진 고유함이 아니라 우주적 조화의 한 부분으로 활약하는 고유함인 것이지요

 


5. 『슬픈 열대』는 탁실라 유적과 챠웅 사원에서 마무리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여행을 통해 무엇을 알게 되었기에 고향인 프랑스도 여행지인 남미도 아닌 저 먼 아시아의 땅에서 여행기를 끝내게 되었을까요?

당연합니다. 만약 파리로 돌아오는 것으로 여행기가 끝났다면 자기 정체성에 집착하는 이야기가 되었을 거예요. 자타의 근원적 공통성, 우주·자연의 조화에 주목한다면 세상 어디에서도 친구와 적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레비-스트로스는? 

 

사실 우리는 마지막 여행지가 한적한 불교 사원이라는 점을 더 들여다보아야 해요. 레비-스트로스는 사원이 건초 냄새나는 조용한 헛간 같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승려가 있고요. 그들은 짚으로 된 매트 옆에서 제식에 필요한 장식물 마련에 힘쓰고 있지요. 변변찮은 제구에 온 정성을 쏟는 사려 깊은 겸손함! 레비-스트로스는 깨달음에 이르려는 그들의 성의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부처를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절을 했습니다. 지구별의 모든 존재에게 감사하면서. 부정, 빈곤, 재난의 어리석음이 넘쳐남에도 우리 각자는 서로에게 너무나 많은 빚을 지고 있으니까요. 그 누구도 혼자 있지 않다, 우리는 서로에게 배울 것이 너무나 많다! 레비-스트로스는 법에 예의를 다하는 승려들을 그림으로써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자기가 어떻게 타인들과 살아야 하는지를 정리했습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야만인들이여 안녕! 그리고 여행이여 안녕!” 레비-스트로스는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뭇 존재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반짝반짝 빛나기를 기원했을 겁니다. 자신이 펼칠 인류학은 오만했던 자기를 떠나고 또 떠나는 지적 모험이 될 것이라는 약속도 담겨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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