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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열의 자기만의 고전 읽기

칼과 바다, 정치사상가 한비자 읽기 (2) : 생애와 저작 ②한비와 이사, 라이벌?

by 북드라망 2022. 6. 3.

칼과 바다, 정치사상가 한비자 읽기 (2) : 생애와 저작 ②

한비와 이사, 라이벌?



앞의 얘기를 토대로 사마천의 전을 정리해 보자. 전에서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다. 한비가 왕실의 후손이라는 것, 말더듬이로 글을 잘 썼다는 점, 그리고 진나라에서 죽었다는 사실. 마지막 이야기는 널리 전해 온다. 마지막 사실이 한비의 생애를 압축한다는 점에서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사와 한비의 관계를 이야기하면 이사의 처지에서 한비의 생애를 다르게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사를 얘기하는 게 순서에 맞을 것이다.


한비열전을 다시 읽어보자. 사마천은 한비가 “이사와 함께 순자에게서 배웠다”[與李斯俱事荀卿]고 했다. 이 말은 한비와 이사가 동기동창인 걸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현대 중국의 걸출한 역사가 전목[錢穆]은 「이사한비고」[李斯韓非攷, 『선진제자계년』先秦諸子繫年 소재]에서 이사와 한비를 비슷한 연배로 가정했다.) 한비는 공족(公族)으로 지체 높은 신분이었고 이사는 보잘 것 없는 천민이었다. 이 둘이 순자의 문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문자 그대로 읽어 전국시대 신분이 와해되는 증거로 읽을 수 있다. 허나 신분이 흐트러지는 와중이라 해도 둘이 너나들이하면서 막역한 사이로 지냈다고 보긴 어려워 보인다. 다른 문장을 보자. “어떤 사람이 한비의 글을 전해 진나라에까지 알려졌다. 진왕이 「고분」(孤憤)·「오두」(五蠹)의 글을 읽고서는, ‘아, 과인이 이 사람과 만나 함께 노닐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라고 하였다. 이사가 말했다. ‘이는 한비가 쓴 글입니다.’ 진나라가 이 말에 급히 한나라를 공격했다.”[人或傳其書至秦. 秦王見孤憤五蠹之書, 曰:“嗟乎, 寡人得見此人與之游, 死不恨矣.” 李斯曰:“此韓非之所著書也.” 秦因急攻韓.] 「고분」·「오두」 두 책만을 언급했지만 이에 앞서 사마천은 한비의 주요 글로 두 작품 외에 「내외저」(內外儲)·「설림」(說林)·「세난」(說難)을 들면서 10여만 언(여기서 言은 字라는 말이다. 10여만 글자나 되는 거작을 썼다는 뜻이다. 중국은 글자 수로 작품의 사이즈를 말한다)이라 했다. 한비의 글 가운데 「고분」·「오두」가 가장 유명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진시황이 읽고 감탄했다. 아마 당시 글은 지금처럼 완성된 단행본 책의 형태가 아니라 한 편 한 편씩 유통되는 형태였을 것이다. 편(篇)의 형태가 더 일반적이어서 당대인은 아무도 『한비자』로 묶은 방대한 한 권짜리 온전한 책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진나라는 이미 상앙(商鞅)을 통해 법가의 전통이 굳건하게 뿌리내린 터라 통치에서건 사상에서건 법가의 주장에 익숙했다. 더구나 진시황이 축객령(逐客令)을 반포했을 때 이사가 「간축객서」(諫逐客書)를 써서 축객령을 철회시키고 두각을 나타내는데 이사의 글이 명문이다. 한비의 글을 읽고 감탄했다는 말은 진시황의 높은 안목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진나라가 이 말에 급히 한나라를 공격했다”는 다음 문장 역시 사실(史實)로 읽기보다는 한비의 글에 대한 사마천의 애정이 드라마틱하게 표현된 것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진시황 본기」나 「진세가」(秦世家) 「이사전」(李斯傳)의 사실(史實)과 견주어 보면 한나라를 공격한 시기와 계기는 한비와 관성련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한비에 매혹되었다 한들 총명한 임금이 책의 저자 때문에 한나라를 공격했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사마천은 「세난」(說難)의 전문을 옮겨 적어 한비의 글에 존경을 표했지만 「고두」와 「오분」이 명문 중에 명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사의 반응. 이사는 한비가 쓴 글이라고 했다. 진시황은 처음 읽는 글인데 비해 이사는 그 글을 이미 읽었다는 말이다. 진시황이 읽기 전, 한비가 뛰어난 작가로 유명해지기 이전에 이사는 한비의 저작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한 가지 추론을 해보자. 이사와 한비는 나이 차이가 있지 않았을까. 순자 문하에서 같이 공부했다고는 하나 한비가 선배가 아니었을까. 사마천의 진술은 같은 시기에 배운 걸로 잘못 읽을 소지가 있지만 동고동락하며 한솥밥 먹는 사이가 아니라 순자 문하 사람이었다는 일반 진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순자가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한 시기는 초나라에서 벼슬을 얻어 난릉령(蘭陵令)을 지내다가 그만두고 난 이후로 알려졌다. (난릉은 남방이 아니라 현재 산동성山東省에 있다.) 순자 말년이다. 순자는 장수한 인물로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근거가 있다. 이 부분은 순자를 다루는 글에서 얘기하기로 하자. 『순자』(荀子) 「의병」(議兵) 편에 이사가 순자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실려 있다. 이사 나이 20여 세 즈음으로 추정한다. 이사가 순자 문하를 떠나 진(秦)나라에 들어간 것이 30여 세 가량. 한비는 한왕(韓王) 안(安) 6년에 진나라에 사신을 가 이듬해에 세상을 떠나는데 이사가 진나라에 머문 지 15년이 된 때였다. 한비가 세상을 떠날 해는 이사의 나이를 45세 즈음으로 볼 수 있다. 한비의 나이는? 『한비자』 「문전」(問田) 편과 「외저설(外儲說) 우상(右上)」 편에 당계공(堂谿公)이라는 인물이 보인다. 한비가 당계공과 대화를 나누는데 이때 한비의 나이를 20세 정도. 당계공은 한(韓)나라 소후(昭侯) 때 사람으로 한비를 만났을 때 이미 90여 세였다. 당계공의 나이를 기준으로 한비의 출생년을 역산해(한韓 리왕釐王 초년으로 계산할 수 있다) 죽은 해(진시황 14년)를 따져보면 한비의 나이는 65세쯤 된다. 추정치이긴 하지만 이를 받아들인다면 이상은 전목(錢穆), 「이사·한비고」(李斯韓非攷), 『선진제자계년』(先秦諸子繫年, 河北敎育出版社, 1965/2000)과 진기유(陳奇猷), 「한비생졸년고」(韓非生卒年考), 『한비자신교주』(韓非子新校注, 上海古籍, 2000/2008)를 바탕으로 작성했다. 


이사와 한비는 20세 가량 나이 차이가 있는 셈이다. 이사가 순자문하에서 수업하던 시절 한비는 이미 자신의 학문이 어느 정도 정립된 시기였고 이때 사마천이 명문으로 꼽은 「고분」·「오두」 등의 글을 썼고 늦어도 이사가 진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한비의 글을 읽었다고 상상해도 무방하리라. 


이사는 자신이 한비보다 못했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자신 못난 위인이 아니었음에도 한비에게 열등감을 가졌던 걸 보면 인간이란 사회적 지위나 권세, 명예나 부富가 전부가 아니라 다른 욕망을 품는 모양이다. 호사가들은 이사가 실제 한비를 죽였다고 보고 질투에 따른 살해라고 해석한다. 썩 구미에 당기는 해석은 아니지만 그들의 말에 동의한다면 이사가 한비를 부러워했던 마음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하리라.  

 

 

 글_최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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