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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의 책들

『예술을 묻다』지은이 인터뷰

by 북드라망 2022. 5. 3.

『예술을 묻다』 지은이 인터뷰

 

 

1.  예술의 기원을 묻고, 감각을 묻고, 미추를 묻고, 재현을 묻는 이 책의 질문들은 예술에 대한 우리의 통념에 금이 가게 합니다. 선생님께서 이처럼 네 가지의 물음을 통해 ‘예술’을 묻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음... 현재 제가 예술을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이른바 예술 애호가도 아니지만, 『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를 쓰기도 했고(^^) 대학원에서 전공한 과목이 미술사이고 보니 여기저기서 미술 강의를 심심치 않게 하는 편이에요. 강의를 다니면서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이, 예술에 대한 편견 내지는 환상이 아주 심하다는 겁니다. 물론 다른 분야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예술에 대해서는 유독 더한 것 같아요. 무턱대고 예술은 아름다운 것이라거나, 예술은 그냥 느껴지는 대로 느끼면 된다거나... 과학이나 철학을 배우듯이 무언가를 차근차근 배우려 하기보다는, 흡사 사랑에 눈먼 사람처럼 좋아하거나 소유하고 싶어 하는 거죠. 이래서 예술을 삶의 문제로 가져오는 데 실패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원, 감각, 미추, 재현은, 제가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예술을 말할 때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들 혹은 너무 당연하게 수긍해 버리는 전제들이 아닐까 싶어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이 시공을 관통하는 보편관념일 거라는 생각, 감각의 배치에 대한 문제 제기 없이 감각에만 탐닉하는 태도,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 그리고 예술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나 기존의 통념을 읽어 내려는 태도 말입니다. 이렇게 기원, 감각, 미추, 재현이라는 네 가지 개념을 다시 질문하면서 예술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예술 전반을 다룰 수는 없는 노릇이라 저는 주로 미술에 국한해서 얘기했지만, 이 주제들은 예술 일반으로 확장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한편으로는, 예술과 관련된 일종의 反지성주의에 대해 질문하고 싶기도 했어요. 사실, 요즘처럼 ‘예술’이라는 말이 흔해진 시대가 있을까요? 젊은 친구들하고 얘기를 나누다 보면 ‘예술적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정말 많아요. 그런데 가만 보면, 그 예술이라는 게 외부를 꾸미거나 자신을 표현하는 것 정도로 이해되고 있달까요. 감각적이고 다재다능하다는 건 알겠는데, 도무지 지성을 느낄 수 없어요. 지성은 감각하는 걸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경향마저 있는 것 같고요. 그런데 생각하는 역량 없이, 느끼는 역량이 확장될 수 있을까요? 즉흥적이고 습관화된 ‘반응’을 감수성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지성이 결여된 감수성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만큼 질문하고, 질문하는 만큼 느끼는 거죠. 느끼는 만큼 실천하는 것일 테고요. ‘예술’이라는 어떤 실체에 대해 논하기보다는 예술을 매개로 생각의 길을 내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 ‘예술’의 개념과 실천은 어디서 왔는가, ‘감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추’에 대한 가치평가에 내재된 욕망은 무엇일까, 우리가 감각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과 동일할까 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우리의 관성적 사고를 건드리고 싶었습니다.


2. 선생님께서는 이 책에서 예술은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이나 표현 욕구의 분출이 아니라 세계와 삶, 타자에 대한 하나의 태도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이는 ‘인간 활동의 작품’으로서의 예술을 누락시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예술과 예술 아닌 것, 예술가와 예술가 아닌 이의 경계를 새롭게 그리고, 다시 지워나가는 과정을 지속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데요. 어떤 의미인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사실 그 문제를 계속 의식했습니다. 어떤 장르가 됐든, 일반적으로 예술은 제작된 대상과 분리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예술적'이라고 할 때 그 말이 지시하는 대상은 뭘까? 형식? 기능? 아니면 사물 자체?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모두를 포함하지만 그중 어느 것 하나를 꼬집어 ‘예술’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죠. 이를테면 물질로서의 그림은 캔버스와 안료로 이루어졌고, 그려진 이미지들은 일정한 형태와 색채로 구성되었으며, 그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 ‘의미’를 가지고 있죠. 그 중 어느 하나를 가리켜 예술이라고 하는 건 불가능해 보입니다. 예술/예술적인 것은 그 다양한 차원들을 하나로 꿰어 의미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게 아닐까요? 예술가도 예술품도 ‘예술’을 이루는 구성요소일 뿐이지 그 자체로 예술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조각가가 흙을 빚어 형상을 만들어 낸다고 할 때, 우리는 인간의 조형적 활동과 그 결과물만을 예술이라고 하지만 사실 거기에는 흙과 물의 활동도 포함되어 있거든요. 우유와 밀가루와 설탕으로 만들어지는 ‘쿠키’라는 생산물이 인간의 노동 이전에 소와 햇빛과 바람 등등의 증여를, 증여와 노동을 전제로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요즘처럼 미디어 작업을 하는 경우에는 가져다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든가 기계의 노동 같은 것도 필요하죠. 제 생각에, 예술은 점점 더 예술가의 개인적 작업일 수 없게 되는 경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어디까지가 창작인지... 툴tool과 창작의 경계도 모호하고, 창작 자체가 이미 흘러 다니는 무수한 아이디어들에 기반해 있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죠. ‘예술’이라고 불리는 활동, ‘예술가’라고 불리는 직업군들은 계속 남아 있겠지만, 그 의미는 이미 전과 달라졌고, 더 크게 달라질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예술/비예술의 경계를 지우자 말자, 할 차원이 아닌 거죠. 저는 이미 지워지고 있는 경계 자체를 주시하면서, 우리가 여전히 움켜쥐고 있는 예술 관념을 문제 삼아 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예술을 결과물보다는 비가시적인 차원(태도, 삶, 비전 등)과 연관시키려 시도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였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작품은 예술적 대상이 아니라 ‘예술적인 것’을 매번 새롭게 정의하고 사유하도록 하는 방편에 불과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사실, 오래전에 푸코가 던진 질문을 처음 접했을 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어요. 책에도 썼지만, 푸코는 이렇게 질문하거든요. 왜 예술은 대상을 창조하는 문제로 환원될까, 왜 삶이 예술작품이 될 수는 없는 걸까, 라고요. 제게는 이 질문이 기존의 예술 개념을 삶으로까지 확장한다기보다는 기존의 예술 개념과 활동 자체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아주 신선했죠. 맞아! 왜 예술은 가시적 대상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국한되어야 하지? 인격이라든가 생활 양식, 생각을 도야하고 연마하는 것이야말로 탁월한 기예(art)가 아닐까?


공부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제가 지닌 ‘예술’ 개념이 대단히 편협하고 고정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걸 절감했어요. 그걸 넘어가고 싶었죠. 인간, 인간의 활동, 예술작품, 작가와 같은 근대예술의 토대 자체를 되묻고 싶었습니다. 현재의 예술을 과거와 미래로 소급적용하는 대신, 어떤 형태일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는 ‘미래의 예술’, 지금과는 전혀 달랐을 ‘과거의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현재를 낯설게 보고 싶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3. 예술은 감관을 제어하고 단련하는 수행이고, 예술 행위는 마치 탁발과도 같다고 하셨습니다. 얼핏 보기에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예술과 수행이 마주치는 지점에 대해 좀더 말씀해 주세요.

앞 질문하고 연관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미술을 ‘전공’하면서 만난 무수한 작가들로부터 얻게 된 게 있다면, 작품이라는 결과물이 삶이라는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1999년인가 2000년인가, 아무튼 제가 그 무렵 처음으로 연구실에서 맡은 강의가 반 고흐 강좌였거든요.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유명한 화가라 자료도 많고 해서 시도해 본 건데, 아... 정말 많이 배웠어요. 제가 예술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게 된 건 8할이 반 고흐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의 생각들, 그가 그림을 대하는 태도, 삶을 살아가는 자세, 삶과 작업이 연결되는 방식... 제가 예술을 ‘수행’이라고 생각하게 된 건 반 고흐 덕분이었어요. 이어서 세잔, 클레 같은 화가들을 만났죠. 상투적 표현이지만 ‘위대한 화가’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화가들이에요. 작품이 곧 삶인 화가들이죠. 이 말은 참 설명하기 어려운데, 이건 도덕적 의미가 아니라 차라리 종교적 의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화가들, 그리고 어떤 영화감독들과 작가들은 ‘예술’이라는 관념이 아니라 삶에서 출발합니다. 이때 삶이란 비전vision(통찰)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기 감정이라든가 즉각적인 감각, 혹은 예술가적 자의식이 아니라 우주의 진동에서 출발하는 거죠. 자신을 둘러싼 세계 전체의 신호를 읽는다고 해야 할까요? 블레이크의 유명한 시구절을 빌려 말하면,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는 경지인 거죠. 자신의 신체와 신경을 일종의 영매로 변신시키는 거라고도 할 수 있어요. 그럴 때라야 들꽃이 아니라 들꽃 속에 담긴 천국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속의 감각에 얽매이지 않아야 해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느낄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극도로 절제하고 수련하는 일종의 ‘능동적 금욕주의’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병과 건강에 대해서도 자율적인 척도를 가지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하고요. 이런 점에서 종교의 수행자와 다름이 없어 보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비전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도무지 쉬는 법이 없어요. 늘 성실하게, 흔들림 없이, 누가 뭐라든 자신의 길을 갑니다. 내키면 하고 안 내키면 말고 식의 태도가 없어요. 계속 갑니다. 계속 시도하고 끊임없이 질문하죠. 그런 식으로 자신의 고유한 건강과 긍정하는 법을 발명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예술적 산물이란 그런 삶의 잔여물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아요. 모든 존재하는 것은 무상하니까 어떤 식으로든 사라질 날이 오겠죠. 하지만 그런 예술품을 만드는 근원적인 태도 내지 힘은 어떤 식으로든 감염되고 전파되고 기억되는 게 아닐까요. 예술이 아니라 그들이 걸어간 '길'이 남는 거죠. 예술은 짧고, 삶은 계속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의 핵심적 문제를 종교적 수행과 동일한 차원에서 해석하고 싶었습니다.


4. 선생님께서는 학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셨는데, 대학원은 미술사로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신 계기가 있으실까요? 선생님에게 ‘예술’은 어떤 것일까요?
『재현이란 무엇인가』 개정판을 쓰려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갑자기 예술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뭐냐는 질문을 받고 보니 잠시 멍해지네요.^^ 제가 직장을 그만두고 공부를 해야겠다 생각했을 때, 당시만 해도 '문학'에 확신이 없었어요. 좀더 넓게 공부하고 싶었죠. 그러면서도 은연중에 ‘못다 이룬 꿈’에 대한 갈망 같은 게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어렸을 때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우선은 그림 배울 형편이 안 됐고, 또 성적은 쓸데없이 좋았거든요.^^ 그렇다고 갑자기 그림을 그릴 순 없잖아요? 그럴 재능도 없었지만, 전 책을 읽는 게 더 좋거든요. 마침 90년대 초반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가 막 뜨고 있었는데, 이래저래 책들을 읽다가 ‘이거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미술사’라니, 역사도 공부하고 문학도 공부하고 적절하게 철학 공부도 할 수 있겠구나, 게다가 미술작품을 논한다니, 그림은 못 그려도 그림에 대해 떠들 수는 있지 않을까... 미술이라는 창을 통해 한 시대를 들여다보자! 뭐 대충 이런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들어가서 공부를 해 보니, 생각과 너무 달랐어요. 학부 때 공부한 분야도 아닌데다, 난 배우고 싶어 죽겠는데 강의는 거의 없고 프레젠테이션은 많고, 돈 버는 족족 화집 모으고 슬라이드 찍다가 허송세월했죠. 이걸 계속 해야 하나 싶더라구요. 그러던 차에 학교 바깥으로 돌며 철학을 공부하고, 근대를 공부하고... 역시 학교 체질은 아니었어요. 되려 미술사로부터 동떨어져서 공부를 하다 보니 새롭게 보이게 된 것들이 있었죠.


결론적으로 대답을 마무리하자면, 예술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 ‘예술’에 대한 약간의 환상과 허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원을 마치기까지의 과정은 그 허세를 내려놓는 과정이었고요. 아마도 그 덕분에 책을 쓰면서 그러저러한 질문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서면 인터뷰와 다른 풀버전의 동영상 인터뷰는 요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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