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약선생의 헤테로토피아

[헤테로토피아] 20세기 정치경제학 비판 – 노동 ‘주체’ 속으로 난입한 자유주의

by 북드라망 2022. 4. 22.

20세기 정치경제학 비판 – 노동 ‘주체’ 속으로 난입한 자유주의

 

미셸 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8~79』, 오트르망(심세광, 전혜리, 조성은) 옮김, 난장, 2012. 

 


자본시장의 고고학적 신체
연초 회사는 전년도 마감한 후에 실적을 평가하느라 정신없다. 내가 있는 금융기관은 시장 금리가 농구공처럼 급격히 튀어 올라 시장을 상대하는 직원들도 정신없어한다. 30년 동안 이 짓을 하며 살아왔는데도 이런 상황이 돌아오면 매번 똑같이 힘들다. 매번 똑같은 상황을 경험하고 또 경험해서 신체가 어련히 단련되었거니 하다가도, 그런 상황이 또 돌아오면 그때마다 같은 강도로, 그렇지만 매번 다른 양상으로 내 신체를 강타한다. '사건'이란 똑같아 보여도 그때그때 맥락에 따라 다른 특이성을 품고 신체를 때리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훈련을 해서 그 결과로 어떤 사건이든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된다는 시각이 얼마나 소박한 바람이고, 비현실적인 기대인가. 현실 세계에서 그저 훈련만 해서 좋아지는 것은 없는 듯하다. 단지 훈련 그 자체가 능숙해질 뿐인 것 같다. 훈련하고 있는 그 과정이 만족을 주고, 평안심을 주는 것은 아닌지. 이걸 30년이나 직장생활을 하며 수없이 위기를 겪고서야 어렴풋이 깨닫다니.

 
그러나 그것을 공유하는 각각 주체들의 경험과 느낌은 천차만별이다. 신입직원들 중엔 경제학을 공부한 친구들이 많다. 그들과 가끔 경제학에 관해 대화를 나누어 본다. 그때마다 느끼는데 이 친구들은 ‘일드 커브’(Yield Curve, 수익률곡선)나 ‘제로 커브’(Zero Curve) 같은 개념의 정의나 도식, 그리고 수리적 접근에 대한 이해가 높다는 느낌을 늘 받는다. 개념의 역사나 배경에 대해서도 굉장히 많이 알고 있다. 아마 교육기관의 효율적인 수업과 시험, 그리고 다양한 매체의 경제 뉴스들을 통해 획득한 능력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굉장히 이상한 것이다. 왜냐하면 내겐 그런 개념들이 도무지 책이나 수업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젊은 시절 나는 지금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면 알게 되는 ‘일드 커브’나 ‘제로 커브’라는 개념들이 너무 어려웠다. 왜냐하면 그런 커브가 생성되는 원화 시장이 없어서, 마치 돌을 씹는 기분으로 머릿속에서만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80년대, 90년대에는 우리에게 채권시장 자체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므로, 개념을 확인할 실제가 없었다. 

 

그런데 IMF 사태가 도래하고, 자본시장이 본격 형성되고, 동시에 우리가 거래를 직접 하면서 시장 자체를 만들어가고, 또 커브의 수익률 점을 시장에 참가하는 우리가 직접 찍어나가면서 그게 이른바 ‘시장금리’(가격)라는 게 되고, 드디어 그 금리가 서민의 대출금리로 실제 되는 걸 옆에서 직접 보고서야, 바로 그때 비로소 십 년 전 대학생 때는 도무지 알 수 없던 일드 커브가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왜 제로 커브가 필요한지 온몸으로 감각하게 되었다. 파생상품 가격 결정이론이라든지 파생상품계약서도 그렇고, 구조화 상품의 수익 구조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구체적 시장과 함께 그것들이 내 신체로 들어왔다. 시장을 감각 한다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이고, 그러기 위해 어떤 과정의 점진적인 양상이 내 신체에 형성되었다. 그것은 시장의 구체적 역사와 함께 내게 들어온 구체적 시장 감각의 운동이다. 금융실명제, OECD 가입 그리고 이어서 찾아온 IMF 사태, 채권과 장외 파생상품 시장 성립과 확대, 투자금융과 대체투자 시장의 형성 등등 금융의 거시사건들 밑에 깔린 시장 참여자 신체 감각의 역사가 지층이 되어 내 신체에 차곡차곡 쌓였다. 어쩌면 나 자신 자체가 한국 자본시장의 고고학적인 신체일지도 모른다. 

 

 

 

이해관계의 공화국
사실 이런 신체는 나 같이 금융기관에 종사하는 개인에게만 도래한 것은 아니다. 나라의 거의 모든 기구와 사람들도 이런 경제학적 신체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거의 모든 것이 경제적 이해관계를 따지며 반응하고 행동한다. 푸코는 이 주제를 ‘국가이성과 정치경제학의 접속’(branchement de l'économie politique sur la raison d'État)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통치실천과 진실체제 간의 접속’(branchement entre pratique de gouvernement et régime de vérité)이라고 정리한다(『생명관리정치의 탄생』 55~56쪽; 프랑스어본 31쪽). 정치경제학이라는 진실체계가 통치실천에게 다가가 그 행사를 조절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진실체계가 작동하는 진실의 장소는 경제학자들의 머릿속이 아니라 바로 ‘시장’이다. 그는 통치실천이 정치경제학이라는 과학을 만나서, 더욱 정교해졌다거나, 사회단체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압력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는 국가 따로, 시장 따로 작동했던 시대를 지나, 이제 통치실천이 작동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참조하는 진실진술의 장으로 시장이 구축됐다는 것, 아니, 차라리 시장을 위해서 통치실천이 다시 구축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통치를 진실되게 행사하려면, 통치가 시장의 진실에 맞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눈치를 본다거나, 압력을 받아 억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시장은 자연적 메커니즘으로 움직이는 것이고, 거기서 형성된 ‘자연가격’에 입각해 통치가 하는 일, 통치가 취하는 조치, 통치가 부과하는 규율을 만든다. 즉 시장의 자연적 메커니즘과 자연가격이 통치실천을 검증하거나 오류를 판별한다.  

 

언젠가 무슨 계기로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의 작품들을 대부분 보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열차 안의 낯선 자들>, <이창>, <레베카> 이런 작품들을 너무 재미나게 보았다. 워낙 명작들이라 말이 필요 없는 작품들이지만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고, 또 사색과 영감을 추동하는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면 <열차 안의 낯선 자들>에서 테니스 장면은 지금 봐도 긴장감이 넘친다. 시합을 끝내고 살인자 브루노를 쫓아가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가이와 상대, 경기 관중이 화면을 바꿔가며 교차되고, 공이 오고 가는 소리만 크게 들리는 장면. 그리고 브루노가 하수구 속에 손을 넣어 떨어진 라이터를 집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장면이 함께 교차된다. 장면 장면이 리드미컬하고 손에 땀이 나게 펼쳐지는데, 주제, 대사, 장면 모두가 정교하게 짜여 있어서 다 보고 나면 마치 엄청난 철학책을 읽은 듯이 굉장한 희열을 느끼게 된다. 

 

이 영화 전체에는 영화의 주제, “교환 살인”이 정교하게 스며들어 있다. 유명한 프로 테니스 선수인 가이는 어느 날 기차 안에서 브루노라는 사내를 만나는데, 브루노는 가이에게 ‘교환 살인’을 제의한다. 가이가 브루노의 아버지를 살해해 주면, 브루노는 상원의원의 딸과 결혼하기 위한 가이의 이혼 요구를 거절하는 가이의 아내를 죽여주겠다는 것이다. 가이는 행실이 좋지 않은 아내 밀리엄과 이혼을 원하지만, 그녀와 합의를 보지 못한 채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가이는 이 제안을 거절하지만, 브루노는 이를 무시하고 유원지에서 가이의 아내를 목 졸라 죽인다.  

 

여기서 나는 가이가 과연 공범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졌다. 영화에서 가이는 표면적으로 무죄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봐도 가이의 무죄와 유죄 사이 경계가 희미하다고 여겼다. 가이는 브루노의 범죄를 의도적으로 수수방관한 것은 아닌가. 만일 브루노는 국가의 통치실천, 가이를 시장으로 상상하면, 이런 수수방관의 내통 관계가 그럴듯하다. 시장은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고, 결론도 그리 나지만 그게 사실은 그런 게 아니라, 내 눈엔 시장(가이)이 통치실천체인 국가(브루노)를 은밀히 움직였다는 것. 

 

가이와 브루노의 기이한 내통과 같이 새로운 통치-경제의 관계는 자유주의 통치성을 그 전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되게 한다. 이제 통치는 사회체 내의 다양한 ‘이해관계’(les intérêts)에만 집중한다. 새로운 통치, 새로운 통치이성은 개인, 사물, 부, 토지 같은 통치성의 물자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어쩌면 통치성은 이해관계의 망 아래서 제한을 받으며 행사되는 것으로 되었다. 물론 하나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복수의 이해관계이다. 그전에만 해도 국가는 통치를 통해서 사물과 토지에 관한 것들을 획득했다. 그러나 이제 이해관계망에 의해 구성되는 통치는 그때그때의 유용성에 따라 다른 가치들을 획득한다. 통치는 이제 이해관계라는 현상의 공화국에 의해서 행사된다. 세상의 모든 정치는 이해관계 조정이 되어 버렸다. 

 

 


자유주의의 관점주의 혁신
1990년대 초 은행 본점엔 부서마다 타이피스트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거래처리와 회계처리도 시스템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것은 장부에다 직접 기록하면서 했다. 그러다 점점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자 업무 과정을 모두 전산화하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바꿀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극히 일부를 개발하여 자동화하다가 점차 범위가 확대되어 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대부분의 수작업들이 자동화되어갈 즈음, 이제는 직원들의 업무뿐 아니라 고객이 수행하는 작업마저 디지털라이제이션(digitalization)이 되어가고, 머릿속에서나 이루어지던 의사결정 행위까지 알고리즘이 되어 가고 있다. 이제 금융기관은 모든 것이 가장 효과적으로 비용 처리되고 관리될 수 있는 방식으로 체계화되어 간다. 그러나 나는 손으로 했던 그 기억, 이를테면 유성영화 시절에 기억하는 무성영화처럼, 그때 그 기억과 손맛을 잊지 못한다. 심지어 그 감각으로 지금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경우도 많다. 감각은 지층처럼 겹겹이 쌓여 종종 분출한다. 그러니까, 사회적 감각이 고고학적으로 지층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의 지층화는 금융기관만의 현상인 것 같지 않다. 이제는 심지어 경제 영역을 넘어서서 범죄를 관리하는 영역에서도 그런 경제적 유용성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처리된다. 푸코는 베커의 「범죄와 처벌」이라는 논문에서 개인으로 하여금 형벌에 처해질 수 있는 위험을 야기하는 모든 행동을 범죄라고 정의하는 장면을 중요하게 여긴다. 물론 이 정의만 읽으면 그럴듯한 정의이고, 이게 뭐 그리 중요하게 여길 것이냐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 이 ‘관점’의 차이에는 자유주의의 커다란 혁신이 숨어 있다. 즉, 이 정의는 범죄의 내용 그 자체를 유지하면서도 범죄를 일으키는 자의 관점, 혹은 범죄를 일으킬 자의 관점으로 들어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행위의 주체에게 범죄란 어떤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범죄자조차 자신의 범죄의 대가를 수긍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오면서, 범죄에 앞서 계산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신자유주의의 핵심적 전회가 숨어 있다. 이렇게 정의하여 범죄에 접근하면 이제 교통법규의 위반과 계획적 살인 간에는 어떤 차이도, 심지어 도덕적 차이도 없어져 버린다. 모든 사람은 하나의 행동에 투자하고 거기로부터 이득을 기대하며 손실의 위험을 감수하는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은 방식으로 취급된다. 범죄자도 다른 투자자와 똑같다. 정상적인 행위를 하는 것과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행위를 하는 것과 심지어 계획적으로 살인하는 것이 모두 투자 행위이고, 그 투자로부터 얻는 이득 차이에 따라 행동 주체는 정확히 계산한다고 가정된다. 이런 관점에서 형법은 주체에게 마음속으로 형벌이라는 특수한 위험을 고려하게 만드는 유용성의 원칙이 된다.  

 

자유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유용성 차원의 관점을 가지고 법조차 경제화시키고 있었다. 이것은 굉장히 니체적인 행동이다. 니체는 모든 인식은 인식하는 자의 관점에 제약된 해석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 제약에 대한 반성조차 다시 어떤 관점의 제약하에 놓이기 때문에 관점주의적 해석 바깥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즐거운 학문』 374). 이렇게 놓고 이 시선으로 세상을 보면 하나의 ‘참된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니체의 관점주의는 단순히 하나의 대상에 대해 여러 관점이 존재한다는 식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다시 실체론적인 참된 관점을 찾아 나서야 할 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의 관점주의에서는 다른 관점으로 다른 해석을 가하면 새로운 대상이 생성된다는 점에서 대상조차 관점에 의해 만들어진다. 여기서 관점은 다른 세상으로 가는 웜홀이다. 자본의 자유주의자들은 관점을 이동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창조한 셈이었다. 그들은 시장의 유용성에 기초하여 새로운 통치성을 만들어냈다.  

 

 


20세기 정치경제학 비판-노동 ‘주체’ 속으로 난입한 자유주의

푸코는 시장경제가 실제로 국가에 형식을 부여하며 사회를 변혁한다고 한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하게 만드는 요점이다. 왜냐하면 국가의 통치가 처음부터 끝까지 시장경제를 수반하도록 만든 이 지옥 같은 세계를 시장경제의 위대한 사회변혁으로 올려세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많은 비판이 여기에 집중된다. 그러나 푸코가 이 변혁을 긍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은 명백하다. 만약 시장경제가 변혁한 이 사회를 긍정한 것이라면 그것은 여전히 종속적인 것이지 자유의 상태가 아니며, 그 이후 그가 진행한 주체 연구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는 신자유주의에서 어떤 것을 보기 위해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일까.     

 

푸코는 늘 우리에게 그가 가려진 틈으로 보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을, 그러니까 자신에게는 보이지만 사람들은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는 것처럼 숨겨놓은 것을 전달하려고 애를 쓴다. 어쩌면 이것이 푸코의 학문적 윤리이기도 한 것인데, 자기가 보기에 우리에게 절실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려진 채 넘어가 버리는 것을 반드시 드러내고야 마는 것이다. 예컨대 그는 정신병리학에 의해 정신병으로 가려져 있던 니체나 아르토의 광기를, 칸트의 인식론이 고정불변의 아포리아적 형식으로 가둬둔 경험 형식의 역사성을, 기독교의 사목 권력에 의해 고백 문화에 가려진 파레시아를, 근대 기업의 자기계발 담론으로 묶여버린 저 아래 자기배려의 영성을,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민영화로 가둬버린 탈-국가를 다시 복원시키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정신병리학이, 고색찬란한 과학과 인식론이, 교회와 기업과 국가가 그 능동적 가치들을 이미 전유하고 사용해 버린 그런 것들이다. 그렇다면 그것부터 재전유해야 할 것이다. 부르주아들이 이미 그것들을 전유하여 성공한 바 있다면, 프롤레타리아도 그것들의 경로를 쫒아가 배워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단지 벽돌 하나를 바꾸어 우리 쪽으로 돌려놓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그들의 약탈을 다시 약탈해야 한다는 것. 위험을 무릅 쓰고 말한다면 푸코의 표어는 ‘다시 전유하라’라고 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른 분석을 포함해서 푸코 담론의 저항적 맥락에 아무런 모순도 없다. 푸코 그 자신이 원했던 대로 푸코를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 강의에서 푸코는 통치실천과 진실진술의 체계로서 신자유주의 이론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통치이성이 자유주의적 시장의 진실-그것의 요체는 바로 ‘자연 가격’일 것이다-에 의해서 제한되는 모습으로 기술된다. 하지만 그것은 다시 추상적 개요로 보일 뿐이며, 실제의 국가와 시장 사이의 관계는 훨씬 더 복잡하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사회체를 구성해내기는 실로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나치즘뿐 아니라 케인즈적 시장 개입이나 전체주의적 국가 운영 앞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위기 속에 빠진다. 푸코의 말대로 자본주의의 위기는 그들에게 자유주의의 위기와 다름없었다. 푸코가 신자유주의 분석에서 보여준 것은 신자유주의가 통치이성을 제한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통치이성이 신자유주의적으로 바뀌어 시장에 패배했다고 간과하고 마는 이론들에 대한 원리적인 비판이다. 그것만 가지고 현실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다시 미궁에 빠질 뿐이다. 

 

푸코는 프랑스와 미국의 독일 자유주의 적용을 고찰하고 있다. 특히 푸코는 ‘인적자본’이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푸코에게 이것은 자본이 17, 18세기에 행했던 경제학으로 노동의 도입이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바뀌어 20세기 경제학에 새로운 방식으로 노동이 재도입되고 있는 현장이다.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이 통치성에 대해 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전, 영토, 인구』나 그 직전 작품인 『감시와 처벌』과 완전히 다른 원리적 고찰을 행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이를테면 ‘20세기 정치경제학 비판-노동 주체의 변환’으로서 읽혀야 한다.         

 

푸코는 이제 경제의 임무는 인간 행동의 형태, 인간 행동의 내적 합리성을 분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임무 변경이 통치실천을 노동자의 관점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이고 또 처음으로 노동자를 능동적인 경제 주체로 만드는 것이라고 덧붙인다(『생명관리정치의 탄생』, 316쪽). 이미 자유주의적 통치성은 프롤레타리아 주체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노동자들도 자본의 한 형식으로 다시 재도입된다. 이때의 자본은 어떤 사람이 일정 정도의 임금을 벌 수 있도록 해주는 신체적·정신적 요소들의 총체이다. 노동자, 당신들은 기업이고 자본이다.

 

따라서 푸코가 주목한 것은 인적자본의 도입은 자유주의에 있어서 획기적인 태도 변경이라는 점이다. 여전히 국가주의에 의거한 경제체제가 강하게 남아 있는 세계이지만, 자유주의가 이루고자 했던 것은, 국가주의와 사회주의에 핵심으로 남아 있던, 그래서 자유주의가 넘보지도 못했던 그 노동-주체 속으로 직접 들어가서, 그것들을 현상학적으로 바라봄에 다름 아니다. 그 현상학적 전회 위에서 모든 사회적 관계를 다시 구성하자는 것. 다른 관점에서 말하면 자유주의의 태도 변경은 노동 그 자체가 아니라, 노동이 놓이는 관계의 장을 다르게 보고, 그 안에서 출발점인 노동자-주체에게 타격을 가한 정밀한 공격인 것이다. 푸코는 이 공격을 매우 중대하게 살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 신체 위에 구성된 전쟁터를 말이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이 주역이나 명리학을 공부하는 것을 따라 나도 덩달아 배운 적이 있다. 배우고 나서 하나 깨달은 게 있다. 내가 놀란 것은 그것의 예언력이 아니다. 놀랍게도 고대 명리학이 상대 주체와 상상을 공유하는 굉장히 정교하고, 유혹적인 분석 격자(틀)라는 것이다. 이 격자와 접촉하기만 하면 보통은 같은 상상 아래에서 과거와 미래가 구성된다. 우선 이 격자 안으로 들어오면 곧바로 해석된 언어의 힘이 상대를 강타한다. 사주팔자라는 정교한 격자에 의해 해석된 언어들이 상대의 과거를 재계열화하고, 그 계열화의 서사에 따라서 미래를 욕망하게 만든다. 예컨대 당신은 관운이 커서 조직에서 활동하는 게 나을거야, 그러면 상대는 곧바로 과거에 자기가 소속된 조직에서의 활동을 환기하고, 다시 그런 과거들을 끊임없이 추수한다. 그러고 나서 해석자의 상상과 공유된 시간 아래에서 과거와 연결된 미래 경로에 자신의 운명을 던지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공동체가 작동하는 방식과 원리적으로 똑같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게 푸코가 신자유주의를 분석할 때, 신자유주의 메커니즘에서 통찰한 것과 동일하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이론들(하이에크나 프리드먼류)은 통치성이 개인적 주체에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사회-주체간 접촉면에 만들어 놓은 매우 정교한 격자이다. 이 격자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모든 사태를 경제적 유용성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사람들이 모두 그 목표로 끌려간다. 격자 안으로 들어가면 이미 정교하게 유용성 관점의 지식망이 구성되어 있고, 이 지식망 안에서 욕망이 움직이니까, 모두가 맞아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진실진술 체계이며, 인구분석을 통해 실증성을 확보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적 경제이론에 대해 내부의 개별 요소를 가지고 비판하면 반론의 여지가 별로 없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이 격자를 다른 격자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 경제적 인간에서 윤리적 인간 격자, 공부하는 인간 격자, 소수자 지향 인간 격자 등등으로 주체의 접촉면에 만들어진 격자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 그 의미에서 주체에 직접 접촉하며 유일무이하게 성공한 적이 있던 신자유주의의 경험은 굉장히 중요한 역(易)의 자산이다. 푸코의 자기 배려나 통치성 이론을 가지고 자기계발론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것을 자주 본다. 물론 의미 없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건 이미 철 지난 이야기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자본이 자기계발론으로 사람들을 끌어내 기업의 자원으로 축적할 수 있었느냐를 아는 데에 있다. 마치 교회가 니케아 공의회 이후 ‘성신’을 유입하여, 비신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게 된 것과도 같다. 어쩌면 이 강의는 이제 80년대 불꽃 같은 주체 탐구를 앞둔 푸코의 강렬한 예광탄이었을지 모른다.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주체의 접촉면에서 엄청난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푸코는 홀로 이 전투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