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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의 책들

북튜브 신간! 『이반 일리치 강의』 지은이 인터뷰

by 북드라망 2021. 10. 13.

『이반 일리치 강의』  지은이 인터뷰

 



1. 이반 일리치는 그렇게 널리 알려진 사상가는 아닌데요. 독자들을 위해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우선, 이반 일리치는 메이저 사상가가 아니라 마이너 사상가입니다. 하지만 아주 강렬한 팬덤을 가진 사상가이지요. 우리나라에서는 70년대부터 책이 번역되고 소개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절판되곤 했어요. 그런데 머지않아 또 복간되더군요. 늘 어디선가 누군가는 반드시 이반 일리치를 다시 소환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반 일리치는 신기할 정도로 생명력이 긴 사상가입니다.


두번째로 이반 일리치는 유럽 출신이지만 남미에서 20년을 살았습니다. 그를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만든 『학교 없는 사회』(1971)는 푸에르토리코에서의 교육 경험이 직접적인 바탕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교육기회를 주기 위해 도입된 의무교육제가 왜 가난한 사람들을 계속 가난하게 만들 뿐이지?’ ‘사회적 평등을 달성하기 위해 행해지는 학교 교육이 왜 결과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확대하는 거지?’ 푸에르토리코에서 일리치는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1960년대 남미, 소위 ‘저개발국’에서 광범위하게 행해진 ‘경제개발 ○○개년 계획’ 같은 프로젝트를 눈앞에서 목격하면서 ‘발전’(development)에 대해 질문한 것이지요. 개발, 발전, 성장, 즉 “모두가 부자 되세요~”라는 근대의 슬로건이 달성 가능한지 혹은 생태적으로 바람직한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이반 일리치는 근대문명에 대해 가장 본질적이고 급진적인 비판을 한 사상가입니다. 


셋째, 이반 일리치는 대학제도 밖의 연구자입니다. 하지만 그의 강연은 늘 사람으로 북적거렸고, 그가 쓰는 책마다 족족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학교 없는 사회』(Deschooling society, 1971), 『성장을 멈춰라』(Tools for Conviviality, 1973),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Energy and Equity, 1974), 『병원이 병을 만든다』(Limits to Medicine, 1975) 같은 책이지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일리치가 자신의 그런 책을 ‘팸플릿’이라고 불렀다는 점입니다. 종교개혁,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등 세계 문명의 근본적 전환기에 기존의 제도출판 밖에서 소책자 형태로 간신히 제본만 하거나 때로는 표지도 없이 찍어서 배포되었던 팸플릿!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책이 아카데미가 아니라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읽히고 새로운 정치적 행동의 자극제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거리의 사상가’였습니다.


넷째, 이반 일리치는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님입니다. 하지만 사제생활 초기부터 그는 살아 있는 기독교 공동체 신체로서의 교회와 제도와 권력으로서의 교회를 구별했습니다. 덕분에 로마교황청과 불화하고 결국 파문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인으로 살았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데요. 왜냐하면 이런 개인적 토대가 그를 다른 좌파 정치인과 다른 에토스를 갖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반 일리치에게 희망이란, 권력의 교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정치적 대안은 환대의 기풍과 우정의 정신을 가진 새로운 공동체들의 건설이었습니다. 정치성과 영성이 함께 가는 사상가! 사람들에게 가장 강렬한 영감을 주는 대목입니다.


2. 이반 일리치의 책들을, 선생님께서 몸담고 계신 <문탁네트워크>의 ‘소의경전’(핵심 사상이 담긴 경전)이라고까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리치 사유의 어떤 점이 선생님과 문탁네트워크 활동에 영향을 끼쳤을까요?

소박하고 자율적인 삶이죠. 이반 일리치가 주장한 것은 우리는 모두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로서 스스로 자기 삶의 양식을 창안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것을 어떻게 충족시킬지를 사회적 명령이나 전문가의 진단에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문탁네트워크의 출발도 그러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삶의 전환기에 놓인 갑남을녀들이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대학원을 가거나 유학하러 간 게 아니라 우리 집 거실에서 세미나 테이블 하나를 놓고 작은 세미나를 열었지요, 그걸 기점으로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각자의 주머니를 털고, 지혜를 모으고, 크고 작은 능력을 섞었습니다. 그렇게 마을작업장을 만들어 화폐경제 밖에서 자립하려고 노력했고, 마을학교를 만들어서 제도학교에 가지 않거나 갈 수 없는 청소년들과 함께 공부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마을공유지를 만들어 공동식탁을 운영했습니다. 순환의 지혜와 나눔의 기술을 익힌다면 한 끼 2,500원으로도 풍성하고 즐거운 식사를 할 수가 있더군요. 이제는 마을약국을 만들어 몸과 질병, 늙음과 죽음의 네트워크를 구성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을작업장, 마을학교, 마을약국처럼 겉으로 드러난 어떤 성과가 아닙니다. 진짜 소중한 것은 너무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언성을 높여서 싸우기도 하고 같이 헤매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관점을 기꺼이 바꾸고 새로운 영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돈과 권력이 아니라 서로 돕고 협력하는 삶이 이렇게 짜릿하고 흥분되고 기쁨을 주는 것인지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지난 십여 년간 우리는 “우정이 없었더라면 서로에게 불가능했을 존재형식에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일리치에게 받은 최고의 선물이죠.


3. 이 책의 2장과 3장에서는 ‘학교’와 ‘병원’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요. 교육과 건강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인 학교와 병원을 일리치는 어떤 이유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요? 

건강하게 살고 싶고,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고, 원하는 곳에 가고 싶고, 세상사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싶고,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고 싶은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추구하는 방식은 근대사회에서 표준화되어 버렸죠. 아프면 누구나 병원에 갑니다.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으면 학교나 학원에 갑니다. 이동하고 싶으면 더 빠른 자동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삶에 대한 욕망은 이런 식으로 전문가와 그들이 만든 제도에 대한 의존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을 일리치는 ‘가치의 제도화’라고 부르고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자기 삶의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살면 살수록 무능해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가치의 제도화를 습득하는 첫번째 장치가 바로 학교입니다. 왜냐하면 학교는 ‘지식의 전수’나 ‘인격의 함양’ 같은 가치와 관계된 곳이 아니라 근대 소비사회의 신화를 저장하고 유통하는 게임의 구조로 작동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학교라는 게임의 규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배움을 교과별, 학년별로 잘게 나누고, 시험이나 점수로 그것을 측정하고, 전문가가 만들어 놓은 평가척도를 통과하면 다음 단계로 진급합니다. 즉 커리큘럼에 의해 세분되어 제공된 지식을 소비하면 다음 단계의 지식 소비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것은 앎의 기쁨이나 삶의 깨달음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아도 더 높은 단계를 향해 중단 없이 ‘진보’하는 형태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일리치가 보기에 학교에서 익히는 것은 무엇보다 바로 이런 게임의 규칙, 미션수행을 통해 다음 단계로 이동해야 살아남는다는 게임의 규칙입니다.


병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각 문화마다 병을 치료하고 통증을 해석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고유의 방법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어느 시점이 되면(이반 일리치는 이 시점을 1950년대 중반쯤으로 잡습니다) 그동안은 간단한 처치나 사소한 생활습관의 변화로도 고칠 수 있는 작은 질환조차 모두 병원에 가서 전문가 의사의 진단을 받아서 치료되어야 하는 것으로 사회적 배치가 바뀌게 됩니다. 진단과 치료는 의사가 독점하고 우리는 자기 몸으로부터 완벽하게 소외되어 버립니다. 이런 상태를 이반 일리치는 ‘삶의 의료화’라고 말합니다. 이반 일리치에 따르면, 근대사회는 의료권력(생명권력)의 사회입니다. 


4. 우리는 이미 거대한 규모의 도구들이 제공하는 편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디지털이 일상화되면서, 이 무형의 ‘도구’는 우리 삶을 더 동여매고 있는 듯한데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의 방향을 전환하고 실천을 이어나가야 할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물질적 풍요가 주는 쾌락은 달콤하지요. 더 빠르거나 더 맛있거나 더 편리한 것들을 우리는 선호합니다. 그것이 팬데믹을 가져오고, 북극곰을 굶어 죽게 만들고, 고래의 뱃속을 플라스틱 빨대로 채우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멈출 것인가? 멈추지 못할 것인가? 인류가 어떤 기로에 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멈추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론에 빠져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결국 닥친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라는 낙관론을 펼치지요.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쉽게 미래를 낙관하게 되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종말론자가 되고 싶지도 않아요. 그래서 저는, 일리치주의자로서(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저는, 희망에 기댑니다. 희망은 일리치에 따르면 기술적 해결이 아니라 자연의 선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하죠. 인류의 생존 여부는 희망을 사회적 힘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혼자서는 힘드니까 친구들과 함께 하려고 하고, 너무 힘들고 어려우면 하기 힘드니까 재밌고 쉬운 것부터 하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이 미친 속도에서 탈주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습니다. 이분들에게서도 계속 배웁니다.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작은 실천들을 사부작사부작 엮어 나가는 것. 다만 이것을 꾸준히 하는 것. 이것이 제가 사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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