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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의다락방] 『간디 자서전』— 삶이라는 진리 실험

by 북드라망 2021. 9. 14.

『간디 자서전』

— 삶이라는 진리 실험

 

 


1.간디에 대한 나의 잘못된 인식

“나도 지금 우리나라가 순수한 비폭력의 정치 불복종 운동을 하기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군사가 준비되지 못한다고 도망을 가는 장군은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게 가장 귀한 비폭력의 무기를 주셨는데, 만일 내가 오늘의 위기에서 그것을 쓰기를 꺼린다면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간디는 못가지고 가난한 사회의 주류가 아닌, 억압받고 탄압받는 소수 약자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평생 돕고 지원했다. 누가 한 말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오직 흑인만이 흑인을 이해할 수 있고 가난한 사람만이 가난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나는 이 말을 그들의 입장에 서야지만 이해할 수 있다는 말로 이해했다. 간디도 그랬던 것 같다. 변호사로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었지만, 소박하게 살았으니 말이다.

간디는 이름을 들으면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분이다. 그러나 솔직히 처음에 간디에 대한 나의 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다. 처음에 알게 된 것은 유치원 때 동화책 위인전에서 간디를 본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러니까 이 책을 읽기 전에 인터넷 기사에서 간디가 아동성애자이고 인종차별을 했다는 내용을 보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서 그것이 오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정말로 제대로 알지도 않고 그에 관한 소문을 믿은 것을 반성하게 되었다. 간디를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가 평화주의자라는 것 외에는 딱히 아는 것이 없는데, 어쩌다가 간디의 이미지가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간디의 이미지가 어떻건 간에, 인도에서 간디는 영웅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그 빼빼 마르고 조그마한 분이 어떻게 영웅이 될 수 있었을까? 간디가 가진 것은 군사력이나 힘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것은 그 자신 밖에 없었지만, 그의 활동은 그 어떤 강력한 힘보다 더 호소력 있게 인도와 영국에 영향을 미쳤다.

 

2. 간디의 삶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મોહનદાસ કરમચંદ ગાંધી )는 1869년에 인도의 포르반디르에서 상인 계급으로 태어났다. 그는 마하트마(위대한 영혼) 간디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간디는 아버지 카바 간디와 그의 네 번째 부인인 어머니 푸들리바이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자신의 어머니는 매우 종교적인 분이었다고 한다. 아플 때마다 단식을 했다고 하는데, 간디가 단식을 한 것이 왠지 어머니를 좀 닮은 것 같았다. 그는 13살 때 조혼을 했는데 그 때는 결혼을 가볍게 생각했기에 매우 행복했지만, 지금은 자신이 어렸을 때 욕구에 붙들리게 한 원인이기도 하다며 매우 후회한다고 썼다. 그는 일곱 살 때 아버지가 라자스다니크 조정의 한 사람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라지코트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 10대 시절을 보냈다.

내가 무엇보다 놀랐던 점은, 간디가 어렸을 때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조용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했지만, 과연 거짓말을 하지 않는 학생이 평범한 학생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때 간디는 ‘거짓말’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경우는 나의 편의를 위해서, 혹시라도 나에게 불이익이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간디에게는 거짓말을 해서 자신에게 불이익이 오지 않도록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와 한 약속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살아가는 데에 정해놓은 신념처럼 말이다.

간디는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1887년에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학비가 덜 드는 사말다스 학교에 들어갔지만, 수업 내용을 따라가지 못해 한 학기만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의학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형의 반대로 아버지가 원한 법학 쪽으로 공부를 바꿨다. 법학 공부를 하러 런던 대학교로 갔지만 식성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어렸을 적에 친구가 ‘고기를 많이 먹어야 영국인처럼 강해진다’는 말을 한 것을 계기로 고기를 먹어보았지만 힌두교신자로써 양심에 찔려 그만둔 뒤로는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대학교에는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1891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간디는 인도로 귀국하였지만 그 때는 이미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였다. 인도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성격이 하도 내성적이어서 법정에서 제대로 변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정받지 못했다. 간디는 처음에 1년간 남아프리카 인도계 상사에서 근무하며 자신의 동족들이 백인들에게 차별 받는 모습을 보고 독립 운동을 결심하게 되었다.

 


영국은 18세기 후반 7년 전쟁의 결과를 결정한 1763년의 파리 조약으로 프랑스 세력을 인도에서 몰아낸다. 그리고 이것을 시작으로 영국 동인도 회사가 주도하는 식민지화가 진행되며, 여러 전쟁들을 통해 인도 지배를 확립했다. 그 결과 1813년부터 영국의 대인도 무역이 자유화되었고, 산업 혁명을 이미 달성하고 있던 영국에서 기계 제조 직물이 인도로 유입되었다. 이 때문에 인도의 전통적인 면직물 산업은 파괴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간디’라고 하면 혼자 옷을 만들어 입는 모습을 떠올리는데, 이런 상황과 연관된 것이다. 간디는 영국의 기계가 제조한 옷을 입지 않고 자신이 직접 만든 옷을 입었다.

간디와 여러 사람들의 비폭력 운동으로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드디어 영국에서 독립을 한다. 그러나 이슬람교도는 파키스탄으로, 힌두교도는 인도로 가는 민족분열이 벌어지게 되며 종교 갈등으로 수만 명이 학살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간디는 이를 중재하려 했지만, 힌두교 신도들에게는 이슬람교도를 편드는 것처럼 보였던 것 같다. 결국 간디는 1948년 1월 30일에 뉴델리에서 열린 저녁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반이슬람 성향의 힌두교인에게 총을 맞아 암살당한다. 그 때 그의 나이는 79세였다.

 
3. 간디에게 온 성장의 순간들

"진리의 이상은, 한번 세워진 맹세는 정신으로나 글자로나 충분히 지켜져야 할 것을 요구한다. 지금 현재의 경우를 말한다면 나는 내 맹세의 외형만을 지킴으로써 그 맹세의 목숨인 정신을 죽여 버렸다. 내 마음이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곧장 갈 길을 못 찾고 있다. 바꾸어 말한다면 바른 길로 곧장 나갈 용기가 나에게 없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두 가지는 동일한 하나다. 왜냐하면 의심은 결국 믿음이 없거나 또는 약한 데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밤이나 낮이나 내 기도는, "주여, 내게 믿음을 주시옵소서"였다."

믿음이란 뭘까? 사람에게 믿음을 주기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한생을 살면서 10명 정도 믿음이 가는 사람이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살아가며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을 만나는데 그 중 진정으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1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니! 나는 진정으로 믿음을 준 사람이 있을까? 내 모든 것을 다 풀고 말해줄 사람이 있나? 생각해 보니 내가 누군가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 적은 있지만, 나의 모든 것을 모두 터놓고 말할 만큼 믿음이 가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좋은 친구를 사귀려면 좋은 친구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거라고 했다. 즉, 내가 먼저 믿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믿음을 주는 것은 쉽지가 않다. 만약에 내가 누군가에게 쉽게 믿음을 줄 수 있다면 믿음을 주었다가 안 좋은 일을 당한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친구들한테 내 비밀을 다 말했다가 그 친구들이 다른 친구들에게도 말하고 다녀서 내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난 일을 겪은 후로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을 준다는 것이 더욱 쉽지가 않은 것 같다.

"나의 변호사로서의 20년간의 대부분은 수백 것의 사건을 화해시키는 데 쓰였다. 그로써 내가 손해 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돈으로도 그렇지만 내 영혼으로는 더구나 그렇다."

누군가를 화해시킨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싸운 당사자끼리 화해를 하는 것은 쉬울지 몰라도 제 3자가 나서서 해결한다는 것은 그만큼 둘 사이의 사정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한 쪽의 편도 들지 않고, 말 그대로 ‘화해’시켜야 하니 말이다. 이런 일을 하면 여러 사람의 심리를 들여다보아야 하니, 간디가 이런 일들을 하면서 나중에 비폭력주의를 실행하며 여러 사람들을 이해하고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고 종이와 펜을 가져오라는 시늉을 하셨다. 그러고는 쓰셨다. “마지막 예배를 준비하라.” 그런 다음 팔에서 호신패를 끄른 뒤 툴라시 염주의 금목걸이를 끌러서 떼어놓았다. 그러고는 곧 숨이 지셨다."

그의 어린 시절은 요즘 시대와는 상반되는 시대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요즘시대에는 하지 않는 조혼에다가 병을 고치기 위한 치료 방식이 단식 투쟁이라니! 한 사람이 성장하기까지 많은 과정이 필요하듯 간디도 여러 일들을 겪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어린 시절에 대해 쓴 것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내용은 자신의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마음을 다해 봉사를 하였음에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자신이 정욕에 붙들려 있었다며 한탄했다. 솔직히 내가 이 부분에서 놀란 것은 간디 때문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카바 간디’ 때문이었다. 죽기 전에는 주로 ‘내가 왜 이렇게 살았을까.’ ‘다시 한 번 산다면 더 잘 살 텐데.’ ‘내 남은 재산들이 아깝다.’와 같은 생각들을 한다는데 끝까지 자신이 모시던 신을 모시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비록 내가 특별한 종교가 있지는 않아서 신이라는 것이 있는지, 끝까지 그 신을 섬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 일은 간디에게 무척이나 큰 가르침을 주었을 것 같다.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일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어려울 것이다. 소중한 사람이 죽으면 분명 새로이 느끼는 것도 많겠지만, 그만큼 상실감도 많이 느낄 것이다. 이 경험은 간디가 어린 모습에서 벗어나게 해준 큰 계기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왜냐하면 소중한 사람이 없어지면 빈 자리가 클 뿐더러, 죽음이 많은 것을 바뀌게 하고, 그 죽음이 자신에게도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신비로운 의미를 모릅니다. 이것(목걸이)을 걸지 않는다 해도 어떤 해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럴만한 이유 없이, 어머니가 사랑과, 내 행복에 힘이 될 것이라는 확신로 내 목에 걸어준 이 목걸이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 이것이 낡아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면, 그때에 새로 다른 것을 걸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끊을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은 간디가 유럽에서 기독교인을 만나서 한 말이다. 코츠씨라는 사람이 간디의 목에 걸려 있는 툴라시 염주의 바이슈나바 목걸이를 보고 미신이라 하며 그 목걸이를 끊어버리겠다고 하자 간디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나는 간디가 한 가지 종교에 굉장히 의존하며 그 종교의 말에만 따르고자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간디는 너무 종교에 믿음을 주어 종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도 아니었고, 여러 종교도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나는 자신의 것만 옳다고 생각하지 다른 사람의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많이 봤고, 나도 심지어는 그렇게 행동할 때가 있다. 하지만 간디는 코츠씨가 자신의 가족이 가지고 있던 종교를 모욕했다고 화를 내지도 않았고, 자신이 속했던 종교를 부끄러워하며 변명하지도 않았다. 이 부분을 읽으며 간디가 어린 시절에 비해 굉장히 많이 성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는 욕구에 휩쓸려 자신이 다른 일들을 하지 못할까 걱정했다는데 이제는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4. 간디에게서 배운 점들

간디에게서 정말로 배울만한 점이 많은 것 같다. 무엇보다 간디는 자신의 기준이 명확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가치관이 있어서 거기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자신의 인생 동안 국가를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를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요즘 사람들(특히 나)은 하나를 끝까지 하지 못하고 금방 싫증을 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의지가 있어서 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만, 그 혼자서는 사회를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어떤 사람의 열정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함께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소용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간디가 한 일은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간디가 한 일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위해 온갖 일을 다 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간디는 자신의 사심을 채우기 위해서 비폭력주의를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 배우고 싶은 점은 간디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꿈이나 간절함이 없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오래가지도 못하고 즐기지도 못할 것이다. 간디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목표를 확실히 두었던 것 같다. 너무 목표에만 붙잡혀 있으면 좋은 것은 아니지만, 간디는 자신의 목표를 잊지도 않았고 하릴없게 행동하지도 않아서 좋았다.

나는 홈스쿨링을 한다고 하지만 ‘과연 내가 홈스쿨링을 하는 것이 맞기는 한 걸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람들이 내가 학교를 가지 않는다고 하면 여러 가지의 시선들이 있다. ‘혹시 쟤 퇴학당한 게 아닐까? 사실은 양아치이고?’ 아니면 ‘우와, 멋지다! 그럼 막 선행하고 그러는 거야?’ 이것도 아니면 ‘그래? 그럼 넌 어떻게 공부해? 나 좀 가르쳐주라’ 이런 여러 가지 시선들로 나를 본다. 비록 칭찬도 있긴 하지만, 이런 말을 들으면 무게감이나 죄책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혼자서 열심히 공부하는 그런 타입도 아니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일 뿐인데. 그리고 심지어는 간디처럼 목표를 가지고 절실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비록 ‘대학’이라는 목표가 있긴 하지만 이건 모두가 가지고 있는 너무 대중적인 목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다지 나의 진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나의 진짜 목표는 뭘까? 사람들 말대로 대학을 가고 대기업을 취업하고 돈도 많이 벌고, 그래서 노후 자금을 모아두면 좋을 것 같긴 하지만, 정말로 이게 내가 바라는 전부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내가 왜 살고 있는 거지?’같은 질문이 들 때가 있다. ‘이런 수많은 똑같은 꿈을 가진 사람 중에 한 사람에 불과한데 나는 지금 뭐 하러 살고 있는 거지?’ 아마 지금 그게 뭔지 몰라서 여기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 같다.

"생명 가진 모든 것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은 자기 정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기 정화가 없으면서 아힘사의 법칙을 지킨다는 것은 허망한 꿈일 뿐이다. 혼이 정결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실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 정화는 생활의 모든 행동의 정화를 뜻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정화란 잘 옮겨가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정화는 필연적으로 자기의 환경 정화에까지 가고야 만다."

자기를 정화시켜 모든 것을 평등하게 대한다는 것은 그 존재를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는 뜻 같았다. 인간이 권위가 있다고 막 살생을 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간디가 한 말은 살생에 관한 것이었지만, 만약 살생에 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살아가는 것에 관한 것이라면 어땠을까? 모두에게 가능한 평등이라는 것이 있을까? 아니, 아마 없을 것이다. 이 세상 ‘모두’가 동의하고 맞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없다.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평등은 어떻게 실현해야 되는 걸까? 모두를 같은 위치에 놓이게 하는 것이 내가 알던 평등이었다. 그러나 만약에 그게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평등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각자의 평등을 실행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간디는 그것을 자신의 말로 ‘정화’라고 한 것 같다. 각자가 각자의 최선을 다 한다면, 분명 한 곳에서 멈추지 않고 퍼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간디는 이런 말을 쓰며 책을 마친다. 오직 ‘진리’만이 유일한 신이라고. 여기서 간디가 말한 ‘진리 실험’은 무엇일까? 끝까지 간디는 딱 하나의 답을 내진 않았지만 도덕과 관련된 것 같다. 간디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지 않은 행동은 하지 않았고, 했더라도 나중에 반성하고 그런 실수를 다시 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응축시킨 것 아닐까? 아니 어쩌면 그에게는 그의 삶 자체가 진리 실험이 아니었을까? 그가 ‘진리’에 관해 정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그는 무언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알아낸 것 같았다. 누군가의 말로는 정의할 수 없는 자신의 삶에서만 찾을 수 있는 그런 특별한 것 말이다.

"나는 세상을 향해 새로운 것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진실과 비폭력은 오래 시간 인간과 함께 했다. I have nothing new to teach the world. Truth and non-violence are as old as the hills.”

 

글_이우(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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