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회장의 ‘素履(소리)’ 하기
天澤 履 ䷉
初九. 素履 往 无咎
초구효는 평소의 도의에 따라 밟아 나아가면 허물이 없다.
리 괘는 예의 실천, 본분의 이행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하늘을 뜻하는 건괘가 위에 있고 연못을 뜻하는 태괘가 아래에 있다. 본래 하늘은 위에 있고 연못은 그 아래에 있는 것이니 위와 아래의 구분과 높음과 낮음을 뜻한다. 즉 위, 아래 관계가 확실한 상태이니 각자 자리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 예의 실천이다. 예를 들어 회사의 사장이 회사를 이끌어 가는 것이고 운동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 기초를 다지는 것이 예의 실천이다.
이런 리 괘에서 나는 초구효에 눈이 갔다. 초구효의 위치를 보면 제일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효이다. 지위가 제일 낮은 효로 볼 수도 있지만 시간적 순서로 보면 처음을 뜻하기도 한다. 모든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든지 처음이 있다. 중간부터 시작할 수는 없다. 처음 하는 일이라면 해야 할 본분은 매우 소박하다. 이 첫걸음을 천천히, 차근차근, 그리고 편안하게 나아가면 허물이 없다. 편안하다는 것은 신입이든 사장이든 자신이 있는 자리를 정확하게 알고 인정하는 것이다. 인정을 해야만 마음이 차분해지고 주위가 보인다. 자신의 일이 무엇인지 보이고 집중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능력도 출중하지 못한데 그저 높은 지위와 높은 연봉만 탐하여 높은 자리에 가게 된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제대로 해내기가 힘들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길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학생이 남들을 가르치는 것과 비슷하다. 보기만 해도 너무 불편해 보인다. 이것이 素履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나하나 배운다는 마음으로 차근차근 밟아가는 것!
이런 초구효를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고2때 학생회장을 뽑는다. 한 학년에 한 반밖에 없으니 우리 반에서 뽑아야 할 차례가 온 것이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학생회에 관심도 없었다. 오로지 노는 것에만 관심이 쏠려있었다. 이 말은 즉 5년 동안 학생회 활동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학생회장에 출마했다. 갑자기 이런 변덕이 생긴 이유는 우선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학생회장으로 뽑히면 남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 같았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 반에서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하는 친구들이 단 한명도 없었다. 그러자 친구들이 나한테 너 한번 나가보라고 말하기 시작했고 그런 말을 들은 나는 용기를 얻었다. (사실 그런 말을 들어서 기분도 좋았다.) 내가 출마하겠다고 마음먹자마자 다른 친구도 선거에 출마를 했다. 누가 뽑히든 상관은 없었다. 인정 못 받는 건 조금 아쉽지만 학생회장이 되든 안 되든 나에게는 매우 큰 경험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뽑혀버렸다.
초구효는 본래 지위의 소박함에 스스로 편안해하지 못하면 그 나아감이 탐욕스럽고 조급하여 경거망동하게 되고, 빈천함에서 벗어나려고만 할 뿐 세상을 위해서 어떤 일을 도모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치에 나아갔더라도 교만하고 오만하게 될 것이 분명하므로, 나아가면 허물이 있다.(정이천, 『주역』, 글항아리, 4쇄(2020년), 263p)
자신의 본분에 편안해 한다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다. 나는 회장이라는 자리에 앉았지만 학생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왕초보 회장이라 학생회가 무엇이고 어떤 일을 하는지 공부를 하고 차근차근 나아가야 했다. 그렇지만 회장의 자리에만 신경을 썼다. 그저 감투에 심취해 있어, 그 자리만 좋았고,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 즉 ‘회장이 되면 학생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겠다!’ 이런 게 없었다. 이런 마음으로 회장이 되니 제대로 일을 할 리가 없었다. 그저 회장의 타이틀을 지켜내기 위해 일하는 척만 했다. 학생회에 안건이 생기면 안건의 성격에 맞게 각 부서에 맡겼다. 맡기는 것 까지는 좋았지만 그 안건에 아예 관심이 없었다. ‘부서에서 잘 해주겠지~’ 라는 느낌이었다. 내가 회장으로서 한 일은 그저 회의만 진행한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 큰 일이 터져서 학부모와 선생님, 그리고 학생회장 이렇게 특별 위원회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학생들의 대표로 나온 자리였기에 학생들의 의견을 대변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했지만 나의 의견은 없이 그저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 갔다.
이런 식으로 일을 하니 학생회에서 나를 믿고 따라와 주는 친구들이 없었고 학생들도 나를 욕하기 시작했다. ‘일을 너무 못한다.’ ‘저게 무슨 학생회장이냐’ 등 많은 욕을 들었다. 처음에는 학생회장이라는 자리가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넘겼지만 욕이 끊이질 않으니 화가 났다. 그 원인을 나에게서 찾지 않고 오히려 학생들 탓을 해버렸다. 학생들이 나를 믿지 못하고 따라오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학생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욕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것들이 나의 허물이었다. 학생들에게 욕먹을 짓을 한 것, 같은 학생회 친구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것, 그리고 가장 큰 허물은 리더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나 스스로 걷어 차버린 것이다.
나의 자리는 학생회장이었지만 처음 해본 일이기에 초효의 단계였다. 초효처럼 자신의 능력 없음을 인정하고 이익이나 명성을 바라지 않고 나의 할 일을 해야 했다. 이렇게만 할 수 있었다면 다른 건들은 몰라도 리더에 대해서만은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생각이 얕고 좁았다. 학생들을 대표하는 자리가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리괘를 보니깐 그때 어떻게 행동을 해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素履’하는 것! 꼭 그 때뿐만이 아니고 일상에서도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글_김지형(감이당 주역스쿨 토요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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