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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나의 삶, 나의 글, 리좀

괜찮은 척, 하기싫은 척은 그만! 지금 시작하라!

by 북드라망 2012. 7. 17.

Step By Step


「1440년 - 매끄러운 공간과 홈이 패인 공간」은 열네 번째 고원으로, 『천 개의 고원』의 결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드라마틱하게(?!) 전개해왔던 여태까지의 방식을 내려놓고, 차분하게 몇 가지 모델들을 골라 ‘매끄러운 공간’과 ‘홈 패인 공간’이라는 개념쌍을 설명한다. 낯선 개념이지만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어 온 논의구도 그대로니까 말이다. 유목민이 달려가는 사막의 매끄러운 공간, 구획되고 경계 지어진 홈 패인 공간, 그리고 이 두 종류의 공간이 언제나 중첩되고 혼합되면서 펼쳐지는 우리들의 현실.

고원과 고원을 연결하는 이 매력적인 개념들은 추상과 현실 사이에 걸쳐 있다. 이번 글에서는 이 개념들과 함께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해서 설명해 보려고 한다.



모래알의 노래를 들어라 - 공간

나는 여기서 살고 있다.

살아간다는 말은 수많은 방향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공간과의 관계에서는 거의 고찰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집에서 살고 서울에서 살고 학교에서 살 따름이다. 그래서, 더 좋은 집을 가지고 더 좋은 학교에 가야 한다고? 이 순간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명제 역시 가볍게 무너진다. 여전히 머릿속 밑바닥에서는 나와 공간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윤리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물리적 차원에서도 한 번 말해보자. 우리는 시공간의 일부다. 우리 자체가 공간이라면, 우리는 이 시공간을 ‘변형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직감적으로 그럴 수 없다는 생각부터 먼저 든다. 우린 공간에 그냥 ‘놓여있을’ 뿐이다. 배우가 무대 위에 서 있듯이, 우리는 공간을 하나의 풍경으로서, 거기 원래부터 그렇게 놓여 있는 물리적인 지대로 이해하고 있다. 시간이 <역사>에 꽉 매여 일직선으로 쭉 펴져야 했다면 공간은 (고전)물리학에 매여 움직일 수도 변형될 수도 없게 박혀버린 셈이다. 밀레니엄도 지났는데 우리의 인식은 여전히 17세기다. 뉴턴이 발명했던 절대시공간은 이미 20세기 초에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으로 그 자리를 내줘야 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왜 굳이 인식을 바꿔야 한단 말인가?

『천 개의 고원』에도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이 있다.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도대체 이것들은 ‘어떤 공간’인가. 암만 눈 씻고 찾아봐도 현실에서 “매끄러워”라는 푯말을 붙이고 있는 지역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은 면적과 풍토를 계산할 수도 없고, 경계선으로 구획되어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철학적 영역에서만 존재하는 관념적인 공간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특정한 영역이 매끄러운 공간이 되느냐 홈 패인 공간이 되느냐는 그때그때의 배치에 따라 바뀌기 때문이다. “사막이나 스텝, 바다에서도 얼마든지 홈을 파고 살 수 있다. 도시에서조차 매끄럽게 된 채로 살 수 있고, 도시의 유목민이 될 수 있다.” 사막이 매끄러운 공간이고 도시가 홈 패인 공간이라고 설명하던 와중 갑자기 이 둘의 경계선을 확 지워버리는 이 센스. 저자들은 이 곤란한 개념을 통해 우리들에게 ‘공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고찰해보기를 요구한다.

공간이 세팅된 무대처럼 준비되어 있다는 생각은 지구에게도 낯선 것이다. 태초의 지구, 희뿌연 가스 밖에 없었던 그곳에 생명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만들었던 것은 또한 생명이었다. 박테리아들이 만들어내는 토사물이 쌓여서 환경을 이룬 것이다. 지금도 지구는 계속 그 모습을 바꿔가고 있다. 인간은 자신들의 행보(산업화)를 따라서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몹시 걱정하고 있지만, 사실 지구 입장에서는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정도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공간의 존재양식과 인간의 존재양식은 서로 맞닿아 있다. 특정 공간에 적응하는 것과 그곳을 일정하게 ‘공간화’하는 것은 동시에 일어난다. 재미있는 건, 나 역시 온갖 박테리아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공간이 공간을 만들고 있다니! 공간이란 미리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일렁이고 변형하는 모래사막처럼 그 자체로 움직이는 것이다.

갑자기 공간이라는 말이 확 트인다. 내가 존재함과 동시에 여기도 존재하게 된다는 생각은 세계에 대한 감각방식을 바꾼다. 내가 있고, 나를 통과하면서 펼쳐지는 강렬함들이 있고, 그것들이 차지하는 만큼이 공간이자 세계가 된다. 머릿속에 있는 공간측정용 개념들은 일시정지 된다. 만약 우리가 유목민들처럼 아직까지 예민한 신체를 가져서 피부를 파고드는 감각들로 구성되는 ‘공간’을 ‘느낄 수 있다’면, 모든 곳이 공간의 중심이 되어 결국 공간의 중심점은 사라지지 않겠는가. 무너진 수평선 너머로 펼쳐지는 것은 촉각적이고 음향적인 공간이다. 냄새, 바람, 소음이 내 몸에 실질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사막, 스텝, 빙원에서처럼 매끈한 공간을 강렬함들, 바람과 소음, 힘이나 촉각적·음향적 질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얼음이 깨지는 소리나 모래알들의 노래.” 과연 국경선이나 토지면적, 지역명과 같은 몇 개의 기준에서 공간의 본질을 찾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 기준들은 공간 고유의 움직임과 힘, 모래알의 노래 등을 보이지 않게 감싸고 있는 포장지와 같다. 오히려 우리는 그 구획선 사이의 좁은 틈새에서 ‘무한한’ 공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인식을 바꿔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인식 너머에 새로운 공간이 있을 뿐이다…

매끄러운 공간과 홈 패인 공간은 공간화의 두 가지 양태다. 그런데 이 새로운 공간과의 만남은 매끄러운 공간에서만 이루어진다. 공간을 구획하고 고정시키는 것이야말로 홈 패인 공간의 본질, 사유의 홈 패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세계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홈을 만듦으로써 여기를 ‘홈 패인 공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지 공간이 원래부터 홈 패인 공간으로 존재했던 건 아니니까. 나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공간의 배치를 바꾼다. 결과는 언제나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의 사이 어딘가 이다. 세계는 늘 이 두 영역의 혼합체다. 이 세계인 나도 마찬가지다.


시에르핀스키의 스펀지


한 스텝으로 움직이는 전체

여기서 논의가 끝나버리면 하나마나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세계가 언제나 혼합되어 있다고 보지만 그 혼합체 속에서 “혼합의 방향(=의미)”은 구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매끈한 공간이 홈이 패인 공간에 포획되어 감싸이는가 아니면 홈이 패인 공간이 매끈한 공간 속으로 융해되어 매끈한 공간을 펼치도록 해주는가?”(907쪽)

결국엔 이 질문이다. 공간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그 속에서 나 역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면, 우리는 <삶>이라는 고정된 양식이나 공간의 정체성을 묻기보다는, 이 공간 안에서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공간을 만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현명하다. 즉 공간의 배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바다는 오랫동안 매끄러운 공간이었는데 15세기 위도와 경도의 발명으로 인해 가장 홈 패인 공간이 되었다. 도시는 애초에 홈 패인 공간으로 설계되었지만 의도치 않게 “거대빈민가, 임시거주자, 유목민과 혈거민”과 같은 매끄러운 공간이 빈번하게 출현하는 장소가 되었다.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 ㅡ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두 종류의 여행’이라고도 표현한다. 중요한 건 나의 어드레스를 바다 혹은 도시에 등록하는 게 아니라, 공간과 나 사이의 계속되는 흐름이라는 의미일 테다.

그렇다면 이 여행들은 어떻게 다른 걸까? 들뢰즈와 가타리는 대여섯 개의 모델들로 설명하는데(기술모델, 바다모델, 음악모델…), 나의 여행방식(?)을 설명하기 위해서 잠깐 수학모델을 데려와 보겠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평행선 공리

들뢰즈와 가타리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홈 패인 공간에,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매끄러운 공간에 각각 대응시킨다. “마이농과 러셀은 거리(distance)라는 개념을 채용해 이것을 크기(magnitude)라는 개념과 대립시켰다.”(922쪽) 크기는 홈 패인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도구다. 크기라는 단위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질적 변화를 겪지 않는 일정한 대상(균질한 시공간)이 전제되어야 한다. 혹은 크기를 측정하는 순간에 그런 종류의 시공간이 출현한다. 도대체 大니 小니 하는 결론이 의미가 있다는 건 무슨 상황인가? 크기라는 ‘고정된 차이’ 빼고는 다 똑같다는 것, 그럼으로써 ‘비교 가능해진다’는 것. 동일한 차원에서 공간은 일정한 크기로 계량되고 분배된다. 반면, 거리는 아예 계량 자체를 시도할 수 없게끔 되어 있다. 이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선분과 다르다. 매끄러운 공간은 등질적이지 않고 이질적인 조각들로 이어진 모자이크 같은 공간이다. 여기에는 ‘패인 홈’ 대신 n개의 결정인에 의해 정의되는 각각의 다양체들이 존재한다. 거리란 이런 다양체들을 표시하는 단위다. 서로 무관한 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연속적 변주를 (길이가 아닌) 거리라고 하는 것이다. “순서가 정해진 차이들의 집합”(923). 그러므로 거리는 분할될 때마다 전체본성이 바뀐다. 아킬레우스의 달리기를 분할하면 걸음들로 나눠지지만, 그 걸음들을 다 더한다고 해서 달리기 자체를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 각각의 근방은 유클리드 공간의 작은 조각과 비슷해 보이지만 하나의 근방에서 다음 근방으로의 연결은 규정되지 않으며, 무한한 방식으로 행해질 수 있다. 이리하여 가장 일반적인 리만 공간은 서로 나란히 놓여 있기는 하지만 서로 관계는 맺지 않는 조각들의 무정형 모임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다양체는 어떤 계량적 체계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빈도 또한 오히려 근방의 집합에 적용되는 축적의 조건에 의해 규정된다. (926)


당연하게도 전혀 다른 스타일의 여행이 펼쳐질 수밖에 없다. 전자에서는 정해진 루트대로 이동하는 패키지여행이 될 것이다. 혹은 이국적인 풍경에 감탄하면서 그것을 계량하려고 들 것이다. 그뿐이다. 홈 파인 공간에서는 각각의 차원(1차원, 2차원, 3차원…)이 섞이지 않고 따로따로 불연속적으로 존재하는데, 차원을 이동하는 것은 여행하는 나의 권한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후자의 방식이다.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리만공간이나 폰 코흐(Von Koch) 곡선과 같은 희한한 차원들을 거침없이 오갈 수 있는 걸까? 방법은 바로 축적과 빈도다. 축적이 ‘균질한 것들의 크기’가 아니게 될 때, 고정된 목적을 향해 고정된 벡터를 가지지 않을 때, 그것은 “형식으로서의 대칭성이 아니라 역량으로서의 반복성”을 이끌어낸다. 패치워크의 특이성은 한 조각이 덧붙여질 때마다 전체가 다 변한다는 것에 있다. 이질성이 축적될수록, 차이가 반복될수록 매번 전체 차원이 변화하게 된다. 그것은 정수의 차원 사이에 자리 잡은 새로운 차원으로 (1.261859차원 같은!) 우리를 이끈다.



리만공간은 매우 동적이다, 이 이미지처럼. ^^


차원을 넘나드는 것이 나의 한 스텝에 달려 있다. 매번의 스텝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줄지 모른다. 다음 조각보로 무엇을 연결할지는 그때 가봐야 안다. 그런데도 흐름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며 심지어 축적된다. 고정된 차원에서 떨어져 나온 자는 방황하는 게 아니라 그 사이의 다른 차원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인생의 의미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누군가는 규칙적으로 교차하는 뜨개질을 더 좋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방법의 전부는 아니다.

이게 한 곳에서 전체를 장악하는 유목민들의 삶의 스타일이다. 바람의 노래부터 모래알갱이가 서걱거리는 소리까지 ‘촉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이유도, 모든 곳에 다른 모자이크의 파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관통해가는 전쟁기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 스텝마다 전체가 바뀐다. 그러니 결국 앞에서의 물음을 재차 반복할 수밖에 없다. 스텝을 내딛을 것인가, ‘어떤 한 스텝’을?


효과를 증식시켜 무한한 운동을 계속하는 기계적 힘인 반복 역량을 풀어놓는 것은 빗나감, 탈중심화 또는 적어도 주변적 운동을 통해 실행되는 자유로운 행동의 고유함이다. (949쪽)


폰 코흐의 곡선

 

사막을 살아간다

사막이라고 하면 아무것도 살 수 없는 황량한 모래벌판이 생각난다. 하지만 그것도 큰 편견이다. 사막에서도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개체들이 있다. 모래 속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양한 힘들이 우글거리고 있으며, 유목민들은 사막이 홈그라운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왜 우리를 사막으로 데려다놓았는가. 도시보다 더 좋다고 생각해서 아닐 것이다. 오히려 사막은 가도 가도 똑같게 느껴지는 모래벌판 위에서 예민한 후각과 청각, 촉각을 발달시킨다는 특성이 있다. 위아래나 동서남북이 결정되지 않으며, 경계선마저도 계속해서 이동한다. 사막과 더불어 우리 역시 기관 없는 신체가 된다. 그곳에서 우리는 ‘차원의 경계선’을 넘어서 몰랐던 감각들과 접속한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기에 사막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 가장 평평한 곳이다. 존재론적 위계가 사라진 공간. 그래서 사막이 아니더라도 매끄러운 공간은 늘 어떤 종류의 사막이다. 빙원, 초원이며, 모든 고원들이다.

『천 개의 고원』은 나에게 살아있는 것의 즐거움과 철학하는 것의 즐거움을 동시에 안겨준 책이다. 이것이 펼쳐 보이는 ‘살아있음에 대한 철학’이 진짜 즐겁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사상의 한계와 의의가 어떻고, 철학사상에서 그들의 맥락이 어떻고, 철학을 공부한지 얼마 되지 않는 나로서는 평가할 수 없는 부분들이다. 물론 한계가 없는 게 아니다. 저자들이 세상의 모든 곳을 낱낱이 훑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놓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천 개의 고원』이라는 안경을 썼을 때 보이는 세상은 그야말로 ‘역동적이기’ 때문이다. 배치라는 개념은 똑같게 보이는 세상 속에서 매번 다른 식으로 난리부르스가 터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무리 시시한 지구라도 어쨌든 사건은 매번 일어나며 그것을 일으키는 것은 ‘나’라는 다양체다. 기묘한 삶의 긍정! 이 역동성은 법칙도 구조도 아니며, 오히려 그런 견고한 선분들로부터 탈출하는 도주선의 떨림이다. 공간이 떨리고 있다.


이 선은 비유기적이지만 생생하게 살아있으며 비유기적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생생하게 살아있다. …물질이 물질을 가로지르는 특질, 흐름 또는 도약으로 표현하는 생명의 역량 … 모든 것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은, 모든 것이 유기적이고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유기체란 삶의 전도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비유기적이며 배아 상태인 강렬한 삶, 기관 없는 강력한 삶, 기관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더 생명력 있는 <몸체> - 유기체들 사이를 지나가는 모든 것. (950~951쪽)


르네 마그리트, <탈주>


강렬하고 강력한 삶의 힘은 유기적으로 잘 조직된 제도를 따라가는 것에서가 아니라 거기에서 탈출함으로써 발생한다. 생명의 역량이 흐르는 곳은 매끄러운 공간이다. 한 스텝 한 스텝이 매번 세상을 바꿔놓는 공간, 축적된 성과가 잘 모여 ‘나중에’ 도래할 좋은 날을 꿈꾸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여기’에서 매번 전체를 변화시키는 숨 쉬는 공간이다. 어차피 여기는 더 이상 튼튼한 홈 패인 공간도 우거진 녹음도 아니다. 정주민들의 삶을 지켜줄 나무들이 다 베어졌고 우리는 허허벌판에 맨몸으로 서 있다.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뜻의 호모 사케르(Homo-Sacer)는 정확하게 우리들 신체의 한가운데를 겨냥한다. 이곳은 새로운 종류의 매끄러운 공간인가? 한 점에서 순식간에 모든 곳을 장악하는 자본의 역량에는 감탄할 정도다. (“매끈한 공간 자체가 해방적인 것은 아니다.” -953쪽)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들의 사막을 만드는 데 착수해야 한다. 자본처럼 모두를 무장해제 시키는 일괄된 매끄러움이 아니라, 내 신체가 이질적이라고 감각하는 영역과 끊임없이 접속함으로써 매끄러워지는 그런 공간을. 그렇지 않으면 이 미끈한 표면에 덮여 밑에서 숨 막혀 죽을지 모른다. 괜찮은 척하거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무기력한 절망은 충분하다. 충분하지 않은 것은 행동이고, 움직일 줄 모르는 사유, 감각, 강렬도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의 매끈한 공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절대로 믿지 말아라.”

- 김해완(남산강학원 Q&?)


※ 덧


『천 개의 고원』과 더불어 이 연재코너도 끄트머리에 서 있다. 모든 고원을 소개하지는 않았다. ‘얼굴성’이라는 개념을 다룬 일곱 번째 고원, 음악과 배치에 대해 설명하는 ‘리토르넬로’ 열한 번째 고원, ‘포획장치’에 대한 열세 번째 고원은 지면부족 및 시간부족(;)의 이유 등으로 부득이하게 빠뜨리게 되었다. (‘되기’에 대한 열 번째 고원이 마지막 글로 소개될 예정이다.)


빽빽하고 딱딱한 내용으로 읽는 이들을 괴롭게 만든 것 같아 죄책감(?)도 들고 이 책의 감동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무엇보다 글 쓰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한 고원 한 고원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이런 지면을 얻게 된 것이 내게는 몹시 소중한 기회였고, 한 분에게라도 그런 만남이 되었다면 참 기쁘겠다. 모두 『천 개의 고원』을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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