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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뉴욕 : 도시와 지성

마음-지옥의 방랑자 : 뉴욕과 에릭 호퍼

by 북드라망 2017. 6. 30.

마음-지옥의 방랑자 : 뉴욕과 에릭 호퍼



뉴욕-방랑의 끝


새벽 두 시. 현재 뉴욕을 떠나는 비행기를 타기까지 딱 열두시간이 남기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사 년 전 멋모르고 뉴욕에 온 후 한국으로 돌아가는 처음이자 마지막 비행기다. 뉴욕의 마지막 밤에 글을 쓰면서 지나친 감상에 빠지지 않을까 겁이 난다. 훗날 이 글을 떠올리며 ‘이불킥’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불필요한 감상을 털어버린 후에도 하나의 사실만은 내 마음에 분명하게 남는다. 내가 뉴욕을 떠나는데 마침내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 평범한 사실 앞에서 나는 자축(自祝)을 아끼지 않으련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뉴욕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고, 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뉴욕을 떠나기로 결심했는지는 나 자신 밖에는 알 수 없다. 남들의 눈에는 내 모습이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워 보일 것이다. 나는 학업을 마쳤고, 이삿짐을 정리했고, 귀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러나 이 당연한 행보의 이면에는 당연하지 않은 내면의 방랑이 있었다. 뉴욕은 변화를 극단적으로, 비정상적인 속도로 강요하는 이상한 환경이다. 지난 삼 년 반 동안 나의 생활은 나를 해체하면서 동시에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싸움이었다.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조건이 사라진 상황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끊임없이 설명해야만 하는 상황이 양쪽에서 내 목을 조르던 시간이었다. 이제는 다 끝났으니까 하는 말인데, 그 과정은 지옥과 같았다 말하겠다. 휴우!



진실은 지옥에 있다


뉴욕살이는 왜 이토록 힘들까?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옳은 말이다. 뉴욕은 비싼 도시다. 렌트비와 생활비는 상상을 초월하고, 노동 착취는 도를 넘었다. 고작 빅맥 하나 사먹을 수 있는 시급을 받으며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에 나는 동료와 이런 농담을 하곤 했다. 복권에 당첨되지 않는 한 뉴욕에는 정착하지 않겠다고. 돈 없는 사람에게 뉴욕은 지옥이라고.




그러나 이 지옥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돈의 부재가 가져다주는 절망감은 호모 사피엔스의 생존본능보다 훨씬 격렬하고 부자연스러운데, 이는 돈이 궁극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몸이 아니라 정신이기 때문이다. 돈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또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간에 타인의 존중을 항상 보장받는다. 아마도 우리의 내면을 100% 만족시켜줄 진심 어린 존중은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그 존중 덕분에 우리는 ‘나답게’ 행동할 수 있다. 인간은 쉽게 스스로를 증오하는 동물이라서 이 보호막을 포기하지 못한다. 돈은 개인과 사회 사이의 불화를 메우는 임시 접착제이며, 어디든지 갈 수 있게 도와주는 ‘멘탈 갑옷’이다.


나는 뉴욕에서 돈이 신(神)이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뉴욕은 정신적으로 아주 위험한 장소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성’과 ‘자유’를 뉴욕만의 가치라며 찬양하지만, 사실 이는 위태롭게 쌓아올린 종탑의 꼭대기만 쳐다보며 저 종이 아름답지 않느냐고 칭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칭찬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돈으로 몹시 안전하게 무장한 관광객이다.) 뉴욕은 자유와 다양성을 개개인의 멘탈을 갉아먹는 방향으로 발전시켜왔다. “만약 스스로가 무능하다면, 자유는 대체 무엇에 쓸모 있는가?”[각주:1] 자유는 내 무능력을 증명하는 무한한 시험이 되고, 다양성은 내 사회적 지위를 위협하는 적대적인 환경이 된다.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는 선택의 자유가 절망으로 변질되는 까닭을 과학적으로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의 행복에는 자연적 행복과 합성적 행복(synthesized happiness)이 있다. 자연적 행복이 포만감이나 성적 쾌락처럼 주어진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오는 만족이라면, 합성적 행복은 나의 선택을 전체 상황 속에서 시뮬레이션하면서 오는 만족이다. 이때 핵심은 합성적 행복은 주관적이어서 거의 모든 조건에서 통한다는 점, 그 대신 조건에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본인이 원하는 것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자유라면, 자유는 자연적 행복의 친구입니다. (...) 하지만 자유는 반대로 합성적 행복의 적입니다.”[각주:2]


뉴욕에서는 합성적 행복이 불가능하다. 이곳은 한계를 제거하는 데 열중하는 열린 장소다. 더 많은 문화, 더 많은 인종, 더 많은 교육, 더 많은 성공, 상품, 사업, 유행, 관광, 에너지......! 그렇지만 이런 요소들에 인간적인 일관성이나 유기적인 관계를 부여하려는 노력은 없다. 오직 자본의 논리만 있을 뿐이다. 이런 분열증적인 상황 속에서 개인은 스스로 세상에 대한 좌표를 그릴 수도, 스스로를 설명할 수도 없게 된다. 뉴욕에서의 삶은 부자연스러운 단절로 가득하다. 이로써 뉴욕은 만인을 부적응자로 만든다. 부적응자가 적응자가 되는 방법은 하나 뿐이다. 돈 벌어서 성공하기. (뉴욕 식으로 말하자면, ‘다양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자유롭게’ 꿈을 이루기.)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적응자였다. 영어를 못했고, 소수 인종인 아시아인이었으며, 학벌은 네트워크가 빈약한 커뮤니티 칼리지였다. 연고도 없고 돈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뉴욕 ‘중심부’에 진입하고픈 욕망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 길을 찾지도 못했다. 이런 부적응자의 결말은 둘 중 하나다. 분열되거나 혹은 고립되거나. 이 두 극을 왔다갔다하면서, 델러웨이 부인의 말마따나 “단 하루일지라도 사는 것이 아주, 아주 위험하다는 느낌”[각주:3]을 안고 살았다. 자존심이 상해서 친구들에게도 쉽게 이런 이야기를 못했다. (내가 내 무능을 증명하려고 이 자유의 도시에 왔단 말인가?) 그런데 모두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나와 다르지 않은 처지에 있었다. 각자가 마주하고 있는 ‘지옥’과 그 지옥을 탈출하려는 시도를 듣게 되자, 나는 이 어둡고 솔직한 이야기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거기에는 선악(善惡), 우현(愚賢), 진가(眞假)의 여부를 떠나서 공통된 진정성이 있었다. 바로 자기만의 합성적 행복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이었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부패한 마음이 뿜어내는 독소든, 유약한 가장이 자식에게 지나치게 쏟아내는 사랑이든, 지식인 이민자가 영어를 배우기를 거부하면서 마지막으로 내세우는 자존심이든, 이 에너지에는 자기 자신과 씨름하는 인간의 몸짓이 담겨 있다. 그제야 나는 내 상황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그 누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 부적응은 인간과 인생의 본질이다. 이 부적응을 해결해보려는 각자의 마음 상태가 진정한 차이와 다양성을 만들어낸다.


세상과 인간은 이토록 미스터리하다. 이 매혹을 느낄 줄 안다면 우리는 지옥에서도 헛된 희망과 무력한 냉소 중 어느 쪽에도 빠지지 않고 덤덤히 살아갈 수 있으리라. 나는 이 멋진 가르침을 뉴욕의 여러 인간군상, 그리고 어디서나 인간의 마음은 자기만의 지옥을 응시한다는 것을 보여준 뉴욕 출신 홈리스 철학자에게서 배웠다. 미련 없이 뉴욕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던 부적응자, 인간의 마음 탐구를 자기가 늘 돌아갈 집으로 여겼던 방랑자. 그의 이름은 에릭 호퍼(Eric Hoffer)다.



에릭 호퍼, 뉴욕의 진정한 아웃사이더


에릭 호퍼가 뉴욕 출신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사실 호퍼와 관련한 대부분의 이야기가 확인되지 않았다. 호퍼의 자서전을 제외하고는 그에 대한 어떤 공식적인 기록도 미국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평생 학교도, 병원도, 정부기관도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어떻게 20세기에 태어난 인간이 이럴 수 있을까? 호퍼의 인생스토리는 마치 한 편의 신화다. 고대 그리스 신화 이야기의 한 에피소드를 따와서 현대판으로 각색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다. 




호퍼는 1898년 뉴욕시 브롱스의 독일계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호퍼의 삶에서 뉴욕은 어떤 중요한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그의 유년기는 완벽하게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호퍼가 다섯 살 때 어머니가 호퍼를 안고 걷다가 계단에서 구르는 사고가 있었는데, 그 여파로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이 년 후 호퍼는 시력을 잃었던 것이다. 그 후로 호퍼는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오롯이 유모의 돌봄을 받으며 집 안에서만 살았다.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는 호퍼를 ‘백치(idiot)’라고 부르며 가까이 하지 않았고, 집 밖에서는 호퍼를 아는 친구가 한 명 없었다. 학교도 갈 수 없었고 집안이 가난하여 병원도 한 번 가지 않았다.


그런데 호퍼가 열여덟 세가 되자 기적이 일어났다. 시력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호퍼는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이며 눈이 당연히 다시 멀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전까지 읽을 수 있는 책을 다 읽자고 마음먹었다. 호퍼는 집 근처에 있는 도서관을 제 집처럼 들락거리며 바깥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은 채 책만 팠다. 그러나 세상은 호퍼의 시력이 아니라 아버지를 앗아갔다. 아버지가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호퍼는 어떤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의 동료 목수들이 그에게 $300의 돈을 마련해주었고, 막 스무 살 청년이 된 호퍼는 그 돈을 가지고 자기 인생에서 처음으로 스스로 결정을 내린다. 캘리포니아 주로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서부는 겨울에도 따뜻하니 얼어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 후로 ‘주노야독,’ 즉 낮에는 잡노동을 하고 밤에는 독서를 하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전부 사실이라면 호퍼는 영웅 혹은 천재의 운명을 타고 태어난 것이다. 5살 때 이미 영어와 독일어 두 언어로 글 읽기를 깨친 것도 놀라운데, 그 후 13년간의 공백이 있었는데도 아무 문제 없이 수준 높은 독서를 시작한다? 십 대를 완전한 고립무원의 상태로 보냈는데 이십 대에는 스스로를 돌보고 독학할 만큼 성숙한 인간이 된다? 그리고 치료 한 번 받지 않았는데 시력이 자연 치유된다? 웬만해서는 믿기 힘든 이야기다. 훗날 호퍼의 책이 유명해진 후에 이 홈리스 철학자의 지성에 매료된 사람들은 그의 인생을 추적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호퍼의 인터뷰가 공중파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는데도 뉴욕 브롱스에서 호퍼를 안다는 사람 한 명 나오지 않았다. 에릭 호퍼는 정말로 ‘아무 곳도 아닌 곳(nowhere)’에서 튀어나온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였다.


 『부둣가의 철학자』라는 호퍼의 평전을 쓴 토마스 벳헬은 새로운 가설을 내놓는다. 호퍼는 뉴욕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심지어 평생 뉴욕에도 가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호퍼는 20대와 30대를 떠돌이 노동자로 살다가 40대 때야 비로소 샌프란시스코 부둣가에 정착하는데, 이 당시 그와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은 호퍼의 영어에는 독일어 억양이 강하게 섞여있었다고 증언했다. 독일 사람과 만나면 독일어를 유창하게 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들은 호퍼가 미국 태생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렵게 한다. 벳헬은 호퍼가 사실 독일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고, 부모님을 여읜 후 멕시코를 통해서 미국으로 불법 입국했다고 추측한다. 호퍼가 자신의 유년기를 신화처럼 꾸며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당시 미국이 불법이민자 단속을 강력하게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호퍼는 미국을 자신의 진정한 고국으로 여겼고, 그래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진짜 태생을 숨겼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진실이든 간에, 호퍼가 자신의 고향 아닌 고향으로 뉴욕을 골랐다는 것은 충분히 상징적이다. 뉴욕에서는 에릭 호퍼처럼 대단하고도 미스터리한 인간들이 분명 꽤 많이 살고 있을 것이다. 세상의 온갖 유형의 사람들이 숨어드는 장소니까 말이다. 뉴욕을 아웃사이더의 도시로 본다면, 뉴욕에서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호퍼는 진정한 뉴요커(아웃사이더)인 셈이다. 



쓸모없는 인간들의 인간성


호퍼는 목적을 가지고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관심사는 다양하고, 독서의 폭은 끝없으며, 글쓰기는 산발적이다. 그러나 호퍼가 평생 꾸준히 관심을 기울였던 주제는 자신과 같은 부적응자들의 인생이었다. 떠돌이 노동자로 살아가면서 호퍼는 사회에서 퇴출당한 “인간 쓰레기 더미들”과 어울렸고, 그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결코 보잘 것 없지 않았다. 세상에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는 조건을 박탈당한 이 부적응자들은 내면 깊은 곳에 스스로에 대한 깊은 불만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불만은 적절한 때와 장소를 만나게 되면 엄청난 에너지로 전환된다. 때로는 혁명으로, 때로는 폭동으로, 때로는 창조로. 미국의 경우 이들은 ‘개척자’의 역할을 맡았다.

  이 경험 덕분에 호퍼는 “인간 쓰레기”야말로 오히려 인간이라는 피조물의 본질을 제대로 보여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간은 실로 매혹적인 피조물이다. 치욕과 나약함을 자부심과 믿음으로 바꾸는 짓밟힌 영혼의 연금술만큼 인간에게 매혹적인 것은 없다. (...) 자기를 포기함으로써 우리는 저 밑바닥에 실존하는 유일한 짐으로부터 해방된다. 아무리 자기 자신을 거룩한 대의와 일체화하려해도, 덧없는 자신에 대한 공포와 전율만큼 현실적이고 뼈에 사무치는 공포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돌이킬 수 없는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단명하는 자신만큼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없다.”[각주:4]




아마도 호퍼의 통찰에는 스스로를 의미 없는 ‘쓰레기’로 여겼던 그의 과거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 호퍼는 이렇게 노동만 하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자살을 시도했던 적이 있었으나, 스스로를 ‘노동자’가 아니라 ‘방랑자’로 여겨보자며 생각을 바꾸었었다. 그렇다. 누구나 자기만의 지옥이 있다. 인간 종(種)만이 독특하게 발전시킨 마음이라는 영역 때문이다. 그곳의 밑바닥을 거닐었던 호퍼의 방랑기를 따라가보자. 그의 방랑에는 뉴욕과 그 너머까지 지구를 가득 메우고 있는 부적응자 인간들의 삼라만상이 녹아 있으며, 우리 자신도 분명 그 중 한 명일 것이다.

  1. Eric Hoffer, , HarperCollins, p.31 [본문으로]
  2. 댄 길버트, https://www.ted.com/talks/dan_gilbert_asks_why_are_we_happy/transcript?language=ko [본문으로]
  3. 버지니아 울프, <델러웨이 부인>, 정명희 역, 솔, 19쪽, 2006 [본문으로]
  4. 에릭 호퍼, <영혼의 연금술>, 방대수 역, 이다미디어, 201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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