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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닌하오 공자, 짜이찌엔 논어

『논어』 공자 제자 열전 : 안회, 천개의 물음, 천 하나의 대답

by 북드라망 2017. 5. 25.

닌하오 공자, 짜이찌앤 『논어』

 : 안회, 천개의 물음, 천 하나의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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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와 제자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늘 강의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논어』를 둘러싼 배치에서 공자의 제자들은 절대 조연이 아닙니다. 저는 이 점이 각별히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특히 『논어』 독서에서는 사실상 절대적으로 성패를 좌우하는 포인트라고도 생각합니다.

 

『논어』는 구전으로 전하던 스승의 말씀이 기록으로 정착된 텍스트입니다. 그런데 스승 제자 사이라고는 해도 그 상황이 오늘날 강의 시간처럼 지정되어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설혹 함께 모여 스승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논어』가 전하는 강학의 풍경은 그런 집단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대부분은 두 서너 명과 나누는 대화 형태였습니다. 즉 공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스승과 함께 있는 그 상황 자체가 공부였던 것입니다.

 

그런 말씀들이 제자들을 통해 또 다른 제자들에게 전해집니다. 그중 어떤 말씀들은 공자 및 공자 학단의 가르침과 관련해 이미 많은 것을 공통으로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겁니다. 그럴 경우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일일이 전하지 않아도 될 말들은 생략하기도 하고, 또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내용을 구성(!)해야 했을 겁니다. 기억으로 구전하기 위해서는 내용을 최소화시켜야 하고, 핵심 위주로 남겨야 했을 테니 말입니다. 대화 상황과 관련된 배경이나 내용 외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생략되겠죠.

 

 

공자님의 말씀은 어떻게 전해졌을까?


하여튼 이처럼 각자가 배우고 익힌 말씀들이 먼 훗날 자기가 제자들을 갖게 되었을 때 전해지기도 하고, 또 함께 공부하던 다른 제자 그룹들하고 나누기도 하고 그랬던 겁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직접 들은 사람이 전하는 것이었으니 생략된 부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설혹 듣는 사람들이 궁금해해도 대답할 수 있었겠죠. 하지만 이 말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두서너 다리만 건너도 전혀 엉뚱한 얘기가 될 수가 있는 거죠. 실제 그렇기도 했을 겁니다. 자유 제자들이 스승께 전해 들은 말과 자하 제자들이 스승께 전해 들은 말이 달라서 충동하는 경우처럼 전승되는 과정에서 여러 변수가 생겨납니다.

 

아예 맥락이 사라지고 그냥 말씀만 덩그러니 남은 경우들도 많습니다. 일종의 경구 같은 거죠. “흘러가는 것이 물과 같구나”라거나,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멍해지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이런 구절들은 그 자체로 이리저리 의미를 생산할 수 있고, 이 말만으로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어쩌면 어떤 구체적인 어떤 상황 위에서 공자께서 하신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논어』에는 이런 구절들이 꽤 많습니다.

 

이럴 경우에 『논어』 읽기가 난감해지는 건 당연한데, 역사적으로 일군의 유학자 무리는 이런 대목을 만날 때마다 특별한 방식으로 읽었습니다. 어떤 특별한 방식이냐 하면, 스승 공자를 도덕적인 성인으로 읽는 것이었습니다. 간혹 스승님이 잘 이해 못할 말씀을 하셔도, “아, 우리 스승님께서 특별히 이유가 있어서 그러신 거다”라는 식이죠. 제가 조금 희화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만, 이런 사람들을 주자학자라고 합니다. 성리학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에요.

 

 

스승과 제자의 대화


 

『논어』에는 스승과 제자의 대화들이 크게 두 가지로 존재합니다. 한편에선 정황과 인물 등이 구체적으로 전해지는 경우, 다른 한편에서는 그냥 스승의 말씀들만 간략히 전해지는 경우. 주자학자들은 후자와 같은 문장들을 만날 때, 이것을 굉장히 도덕적인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즉 아주 인격적이고 완성되어 있고 초월적인 인격의 스승과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무조건 진리가 되는 방식의 말로, 우리가 말들을 다 해석해 듣는 겁니다. 굉장히 그럴 듯해 보이고 굉장히 멋있습니다. 스승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너무 완벽한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맛은 사라지고, 그 대신 아주 이상적인 성인의 모습만 남게 되지요. 우리가 공자에 대한 상들을 가질 때 보통 ‘굉장히 훌륭한 인격이긴 하지만 좀 고리타분한 도덕군자인 것 같은 느낌’. 공자가 그런 성인이 아니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공자를 그런 이미지로만 여길 때, 공자는 물론 성인이라는 말도 다분히 초월적이고 완벽해서 인간적인 맛이 없어지게 되고, 기타 군자라느니 유학자라느니 하는 이미지들이 전반적으로 완고하고 무거워집니다.

 

그런데 실제로 『논어』를 보면 여기에는 아주 다층적이고 현실적이고 인간미 풀풀 풍기는 공자가 있습니다. 막말 좀 하자면 솔직히 우리랑 별반 다를 것 없는 제자들이 수두룩하게 등장하고 그렇습니다. 진짜 고차원적인 스승과 재능있는 제자들만 있는 게 아니고, 보기에 따라선 우리가 주위에서 늘 볼 수 있는 평범한 제자들도 수두룩하게 있는 겁니다. 칠십 제자니 77 제자라니 하며 이야기되는 에이스급 제자들조차도 『논어』 안에서 서로 질투하고, 삐지고, 인정욕망에 불타고 그렇습니다, 스승이 한번 예뻐해 주면 막 기뻐했다가 혹은 막 삐졌다가 이런 마음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죠. 막상 보려고 보면 신기할 정도입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 없을 정도입니다. 근데 이런 점들을 본다고 해서 『논어』의 가치를, 공자의 권위를 낮추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그런 점들을 볼 수 있게 되면서 『논어』를 제대로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논어』가 단지 위대하고 우뚝한 한 성인의 초인간적인 말씀이 아니라는 것. 그곳은 아주 생생하게 매 순간들을 사건화해서 보여주는 언어들이 살아 꿈틀거리는 현장이었다는 것. 

 

 

같은 질문 다른 대답? 그 질문에 바로 이 대답


그래서 오늘은 이 제자들이 스승 공자와 벌이고 있는 이 대화라고 하는 측면에 주목해서, 이 대화의 상황들을 최대한 상상으로 재구성하고, 대화의 사이에 빠져있는 부분들을 우리가 최대한 유추해서, 이 글들을 어떻게 다르게 읽을 수 있는지 살펴볼 생각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그렇게 읽을 수 있는 『논어』가 그럴 듯하고, 그게 훨씬 더 우리가 실제 지금 어떤 생활을 하는 데 유용하거나 훨씬 더 지혜로운 방안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 앞으로 그런 방식의 『논어』 독해를 제안하고 싶은 겁니다.

 

자, 그 일례로, 인용문을 하나 보시죠. 지난 시간에 말로만 잠깐 드렸던 건데 오늘은 원문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선진> 편에 나오는 말인데요. 자로가 물었다. “들으면 바로 실행해야 합니까?” 선생님 말씀하셨다. “부형이 계시는데 어떻게 그것을 들었다고 곧장 실행에 옮길 수 있겠는가.” 염유가 물었다. “옳은 것을 들으면 바로 실행해야 합니까?” 선생님 말씀하셨다. “들으면 곧장 실행에 옮겨야지.” 공서화가 물었다. “자로가 묻기를 ‘들으면 바로 실행해야 합니까?’라 하니 선생님께서는 ‘부형이 있지 않으냐’ 하셨습니다. 염유가 똑같이 물었을 때는 선생님께서 ‘들으면 바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의심스러워, 감히 여쭙습니다. 선생님 말씀하셨다. “염유는 물러나는 성품이기 때문에 나아가도록 했고, 자로는 남을 누르는 성품이기 때문에 물러서도록 했을 뿐이다.”

 

같은 질문, 다른 대답. 제 식으로 말하면, 매 순간 대화는 그 대화 상대자와 대화자 둘만의 환원 불가능한 단 한 번의 관계인 거에요. A라는 제자가 와서 “선생님! 진지 잡수셨습니까!”하는 질문과 B라는 제자가 와서 “선생님, 진지 잡수셨습니까?”하는 질문은 똑같은 질문인 것 같지만 다른 질문이라는 거에요. 왜? A라는 제자는 밥을 사러 온 제자일 수 있고, B라는 제자는 밥을 훔치러 온 제자일 수 있어요. 얻어먹으러 온 제자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둘의 처지와 상황이 다르므로 이 같은 질문인 것처럼 보이는 질문에 다른 대답을 해 줄 수밖에 없는 거죠.

 

또는, 이미 A라는 사람의 상황과 스승이 연결되는 하나의 상황, B라는 제자와 스승이 연결되는 또 하나의 상황, 이미 다른 상황이기 때문에 이 질문은 다른 질문이다. 오늘 포인트는 이겁니다. 우리는 매번 다른 질문 앞에 선다. 『논어』라는 책은 매번 다른 질문 앞에 서는 스승이 매번 다른 대답을 해주는 기록이다. 또는, 매번 다른 대답을 하도록 스승이 매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져요. 그러니까, 스승이 똑같은 질문을 던져도 그것은 제자들에 따라서 다 다른 질문이 되는 거죠. 이런 쌍방의 과정이 살아있는 책이 『논어』다. 그래서 어느 한 구절도 허투루 읽을 수 있는 구절이 없다. 다만 불행하게도 이게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진행되어 오는 동안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상황과 맥락이 아무리 용을 써도 재구성되기가 어려운 것들이 상당히 있어요. 그래서 그거는 어쨌든, 우리가 계속 채우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그걸 고려하고 읽어낼 수 있는 한 최대한 더 재미있게 『논어』를 읽는 거, 그게 우리의 관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같은 질문 다른 대답


아, 또 이런 게 있어요. 아까 『논어』라는 책이 제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했는데요, 이 제자들 사이에도 알력이 있었고, 또 제자들 속에도 귄위를 가진 집단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몇 가지 표지들이 있습니다. 『논어』에는 많은 제자가 등장하는데, 스승과의 관계에서 보면 어차피 전부 제자들이니 나이 차가 많든 적든 모두 그냥 이름을 부릅니다. 그런데 『논어』에 보면 어떤 제자들은 이름이 아니라 존칭으로 불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논어』에는 공자님 말고도 성씨 뒤에 ‘자’ 자가 붙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유자, 증자. 뭐 이런 식입니다. 유자는 유약이고, 증자는 증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은 ‘자’ 자를 붙일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 이유는 『논어』라는 책을 편찬할 때, 이들의 제자들이 가장 힘이 막강했던 편집자 그룹이었기 때문이었지 않나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증자의 제자들과 유자의 제자들이 편집과정에서 굉장히 막강했다는 거죠. 이 말은 유자와 증자가 반드시 공자의 적통이라는 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걸 착각하면 안 돼요. ‘아, 『논어』 안에 지금 ‘자’ 자가 붙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니, 이 사람들이 당시에도 존경받는 적통이었나 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존경을 받는 스승들이었겠죠, 당대에. 그렇지만 공자 문하에서는 이들이 최고 적통이라든지 이런 의미와는 별개로, 일단은 『논어』라는 책이 편집될 때에 힘이 셌다는 것을 증명한다고만 해두겠습니다. 왜? 그 이유는 『논어』를 계속 읽어가다 보면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

 

우리가 『논어』라는 책을 읽을 때는 진짜 별것 아닌 것 같은 한 구절 한 구절에서 어떤 사람들은 엄청난 이야기보따리들을 얻어내요. 어떤 상황에서 재구성되었을 것이다. 어떤 시기의 글일 것이다. 어떤 맥락에 있는 것일 것이다. 등등. 이런 것들을 찾아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있는데, 오늘은 그런 역사적인 배경 이전에, 제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어떤 개성을 가지고 『논어』 안에 등장해서 이 책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가. 혹은 어떤 역할들인가 하는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논어』는 절대 공자에 의해 ‘저술’된 책이 아니라는 것, 그뿐만 아니라 공자만이 주연인 책도 아니라는 것, 최소한 『논어』는 공자 제자들의 저술이고, 주연도 공자뿐만 아니라 제자들까지라는 것 등등을 상기하면서 말입니다.

 

공자의 제자들을 그냥 조연으로 만들어버릴 때 『논어』는 재미가 없어질 뿐 아니라, 아주 평범하고 개성 없는 책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으면, 자꾸 스승님의 말씀만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배우는 사람으로서 스승님의 말씀이 무엇보다 중요하죠. 하지만 스승님의 말씀이 배움의 진리가 되는 것은, 그 말을 믿고 배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잊으면 『논어』는 정말 도덕 교과서가 되어버리는 거고 이게 어떤 제자한테 주는 말인지, 어떤 제자의 어떤 질문에 응대하는 대답인지를 반드시 잘 살펴야 합니다. 물론 절대 알 수 없는 구절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알 수 있는 구절들에서 더더욱 살펴나갈 때 다른 구절들에서 해석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일단 시간 문제도 있고 하니, 일단 한 세 명 정도의 대표적인 제자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첫 번째가 안회, 두 번째가 자로, 세 번째가 자공. 이상하시죠? 안회가 그래도 가장 유명한데... 원래 이런 이야기 구성에서 흥미진진한 이야기일수록 뒤에 나오는 거거든요.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자공이에요. 그래서 자공이야기를 제일 뒤로 뺐습니다. 혹시 쉬는 시간에 가실까 봐.(웃음) 그러니까, 쉬는 시간 이후가 오늘의 하이라이트 되겠네요. 전문용어로 아라비안나이트 셰헤라자드 수법이죠.(웃음). 음... 다음 주에는 춘추 시대 역사 이야기를 좀 할 건데, 그거는 이번 제자들보다 훨씬 재밌을지도...(웃음). 그럼. 안회 얘길 해보겠습니다.


문리스 (남산 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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