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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인문의역학! ▽/기탄동감

정(精)을 통해 익히는 삶의 윤리

by 북드라망 2016. 10. 27.

정(精)을 통해 익히는 삶의 윤리



연구실에 처음 접속하는 학인들을 보며, 나는 가끔 이곳에 처음 공부하러 왔을 때를 떠올리곤 한다. 익숙지 않은 공간, 모르는 사람들, 생소한 책들 등 그 모든 것이 새로웠던 그 때, 나에게 가장 낯설게 느껴졌던 것은 연구실에서 사용하는 언어였다. 같은 나라말인데 뭐 얼마나 차이가 있겠냐 싶겠지만 바깥(?)세상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이 용어들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 후, 귀동냥으로 여러 개념들을 주워들으며 그 말이 어떤 맥락에서 쓰이는지, 왜 중요한지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렇게 연구실 생활에 적응하던 무렵,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안에서 불문율처럼 자리 잡고 있던 문구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바로 ‘정(精)을 아껴라!!’ 대체 이 정(精)이 무엇이기에 아껴야 한다고 하는 걸까? 정말로 아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精이란 무엇인가!?



정(精)에 대하여


兩神相薄 合而成形 常先身生 是謂精. 精者 身之本也.

음양(부모)의 신이 합쳐져서 형체가 생기는데, 육체보다 먼저 생기는 것이 있으니, 이를 정(精)이라고 한다. 따라서 정은 몸의 근본이 된다. 


五穀之津液 和合而爲膏 內滲入于骨空 補益髓腦 而下流于陰股.

오곡의 진액이 화합하여 지고가 되는데, 이것이 속으로 들어가서는 뼛속에 스며들고 위로 올라가서는 뇌수를 보익해주며, 아래로 내려가서는 음부에 흘러든다.


-『동의보감』, 「내경편」, 정(精), 법인문화사 p230


『동의보감』에서 인용한 「영추」라는 책에서는 신체가 생기기 전, 그 몸체의 바탕이 되는 것을 정(精)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가 교합할 때 만들어진 유형의 물질로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물리적 토대이다. 이 정(精)은 부모에게서 받은 생식의 정(精)으로 ‘선천지정(先天之精)’이라 불린다. 이것은 신체보다 먼저 생겨나며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딱 한 번 받은 뒤 죽을 때까지 보충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선천지정(先天之精)’을 통해 몸을 갖춘 뒤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는 살아가는 동안 음식물을 섭취함으로써 ‘후천지정(後天之精)’이라는 또 다른 정(精)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음식물에서 얻는 모든 영양분이 정(精)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매일 먹는 밥, 즉 정미로운 기운을 가진 오곡(五穀)만이 ‘후천지정(後天之精)’을 만들 수 있다.

 


이렇듯 사람의 정(精)은 태어날 때 받은 ‘선천지정(先天之精)’과 태어나서 얻은 ‘후천지정(後天之精)’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정은 한 생명체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끊임없이 상호 의존한다. 선천의 정은 후천지정의 계속되는 지원으로 그 생리작용을 이어 나가고, 후천의 정 역시 선천지정의 도움이 있어야만 흡수와 생식을 끊임없이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두 정(精)은 신장(腎臟)에서 밀접하게 결합하여 신장(腎臟)의 정기를 구성하며 인체의 생명력과 생식력을 유지한다. 



정(精)이 소중한 이유


이와 같이 몸의 근본이 되는 정(精)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이 더욱 소중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것이 몸에 무한히 축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夫精者 極好之稱. 人之精 最貴而甚少. 在身中通有一升六合 此男子二八未泄之成數 稱得一斤. 積而滿者 三升 損而喪之者 不及一升.

무릇 정이란 지극히 좋은 것을 일컫는 말이다. 사람의 정은 가장 귀중하면서 양이 아주 적다. 사람 몸에는 정이 보통 1되 6홉이 있는데, 이것은 남자가 16세 경 아직 정액을 내보내기 전의 수량을 무게는 1근이 된다. 정액이 쌓여서 그득 차게 되면 3되에 이르지만 허손되거나 내보내서 줄어들면 1되도 못 된다. 


-『동의보감』, 「내경편」, 정(精), 법인문화사 p230


보통 사람의 몸에 정(精)은 1되 6홉이 있다고 한다. 리터로 환산했을 때 대략 2.8L, 후천지정으로 보충한다 해도 정(精)을 담을 수 있는 최대 용량은 3되, 5.4L 정도이다. 더군다나 한번 성교 할 때마다 반 홉(90ml)을 잃는다고 하니 아무 생각도 없이 무분별하게 사용한다면 밑천(?)이 금방 드러날 듯하다.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 몸의 정(精)이 깡그리 소진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肝精不固 目眩無光. 肺精不足 肌肉消瘦. 腎精不固 神氣減少. 脾精不堅 齒髮浮落. 

간 (肝)의 정이 든든치 못하면 눈이 어지럽고, 눈에 광채가 없다. 폐(肺)의 정이 부족하면 살이 빠진다. 신(腎)의 정이 든든치 못하면 신기(神氣)가 줄어든다. 비(脾)의 정이 든든치 못하면 치아이 뿌리가 드러나고 머리털이 빠진다. 


若眞精耗散 疾病卽生 死亡隨至.

만약 진정(眞精)이 소모되고 흩어지면 질병이 금방 생기고, 죽음이 뒤를 따른다.


-『동의보감』, 「내경편」, 정(精), 법인문화사 p231


『동의보감』에서는 정(精)을 몸의 생명수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끈적한 액체가 조금이라도 부족할 경우 신체의 어느 장부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정(精)은 자동차를 굴러갈 수 있게 하는 기름과도 같다. 연료가 없을 경우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자동차처럼, 정(精) 없는 우리 몸은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精)을 소모하는 데 있어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한다. 



어떻게 정(精)을 쓸 것인가


그런데 여기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다.『동의보감』에서는 정(精)을 언급함에 있어 음부에 있는 정액(精液)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또, 신장(腎臟)에 저장되어있는 정(精)만을 얘기하지도 않는다. 신기하게도 우리 몸의 정(精)은 오장을 비롯하여 혈맥, 뼛속, 뇌수 등 다양한 곳에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자리 잡고 있는 정(精)은 우리가 몸을 움직이거나, 음식물을 소화할 때, 노희사우공(怒喜思憂恐)의 감정이 일어날 때 등 그 장부의 기능을 쓸 때 끊임없이 소모된다. 고로 정(精)을 소비하는데 있어 성욕이 발단 되어 정액(精液)을 쏟는 경우는(제일로 지출이 크긴 하지만) 정(精)을 쓰는 한 가지 방법에 불가하다. 

  

이보시오, 정精을 어떻게 쓰실게요?


이렇듯 우리의 숨이 붙어 있는 동안 필연적으로 정(精)을 쓸 수밖에 없다. 실로 이렇다면 마음 속 자리 잡고 있는 ‘정(精)을 아껴라!!’ 문구를 조금 다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무조건적으로 아끼려하기 보다는 ‘정(精)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사유가 동반하며 말이다. 생각해보면, ‘유한한 정(精)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주어진 조건을 어떻게 재구성하여 자신의 윤리를 갖추어 갈 것인가’라는 삶의 문제로 확장시킬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이 사람들과 맞지 않아.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나야 해!’가 아닌‘지금 함께 하고 있는 이들이 그 누구보다도 최고야. 그러면 이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까?’라던가, ‘지금의 내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야 해!’가 아닌‘현재 나에게 주어진 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좋을 때야.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발 딛고 살아갈까?’라고 질문을 바꿀 수 있듯이 말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일어나는 욕망을 재배치하는 것, 그리하여 자신의 철학을 만들어 가는 것이 진실로 정(精)을 아낄 수 있는 양생(養生)의 첫 걸음이 아닐까 싶다. 

황범성(백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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