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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동아시아 역사책 읽기

"온달에게 시집가겠어요!" 남편을 선택한 두 여인

by 북드라망 2016. 8. 16.


고구려 왕실의 두 여인,

남편을 선택하다




역사책을 읽을 때마다 확인하는 것은 인간사에 규칙은 없다는 것이다. 당대에 통하는 삶의 규칙이나 윤리는 있지만, 역사책 속의 숱한 사건들은 늘 그것들을 배반한다. 우리가 역사책을 읽는 이유는 아마도 인간사의 규칙성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그 의외의 반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에게는 어떤 일이든 일어난다. 어떻게 이런 일이가 아니라 늘 그렇듯, 굉장히 놀랍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새삼스럽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는 반전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이런 일이’를 외치기보다는 그런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런 사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느냐를 살펴볼 따름이다.




1. 왕후로 살아남기


❚ 고국천왕의 왕후, 우씨의 역모


굉장한 반전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삼국시대 역사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그 이후로도 일어나기 어려운 사건을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건의 주인공은 고국천왕의 왕후 우씨. 삼국시대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사건의 중심에 선 왕후이다. 당돌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했으나, 현재 우리들에게 회자된 적이 없는 여인, 왕후 우씨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우씨가 사건의 주체가 된 것은 고국천왕이 죽고 나서이다. 고국천왕이 서거했는데, 우씨는 왕이 죽은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발표하지 않는다. 고구려는 결혼 풍습으로 형이 죽으면 아우가 형수를 처로 삼았다. 형사취수(兄死娶嫂)라는 관습상, 고국천왕의 형제가 우씨를 처로 삼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지만 왕위계승이 누구에게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우씨는 다시 결혼해도 왕후이고 싶었다. 그래서 왕의 죽음을 비밀에 부친 것이다. 물론 형제의 아내가 되는 건 관습이지만, 자신이 남편을 선택해 왕위에 올리는 일은 잘못이다. 그러나 우씨는 왕실에서 정해준 형제에게 시집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우씨는 왕의 아내이기를 원했다. 그러자면 남편이 왕이 되어야만 했다. 급기야 우씨는 자신이 직접 왕을 세우기 위한 행동에 돌입한다.


고국천왕은 장자가 아니었다. 고국천왕에게는 형이 있었다. 그 형의 이름은 발기. 어질지 못하다는 이유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동생인 고국천왕에게 왕위가 넘어갔던 것이다. 우씨는 고국천왕의 형인 발기에게 먼저 찾아갔다. 우씨는 밤중에 형 발기에게 찾아 가서 고국천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라고 권한다. 발기는 우씨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는다. 발기는 “하늘이 마련한 운수는 돌아갈 때가 있으니 함부로 논의할 수 없다”고 하며, 오히려 부녀자가 밤길을 함부로 다닌다고 꾸짖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발기는 왕이 되지 못했다.


그 다음 우씨는 두 번째 동생 연우에게 찾아간다. 아우 연우는 발기와는 사뭇 다르게 왕후를 맞이한다. 연우는 잔치도 베풀며 고기를 친히 잘라 우씨에게 대접했다. 연우가 고기를 자르다 손을 베자 우씨는 자신의 치마끈을 풀어 감아준다. 우씨와 연우가 은밀히 통한 것이다. 우씨와 연우의 공모는 성공한다. 우씨는 선왕의 유명이라는 거짓을 꾸며 연우를 왕으로 세우고, 연우는 우씨를 왕후로 삼는다. 이 연우가 바로 고국천왕의 뒤를 이은 산상왕이다.


물론 우씨의 반란이 조용히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발기는 장자였음에도 어질지 못하다는 이유로 왕위계승에서 밀렸던 적이 있다. 두 번째 왕이 될 기회가 다시 왔으나 우씨의 제안을 거절하여 아우 연우에게 또 밀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발기는 이번에는 그대로 수긍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태는 불리했다. 운수는 하늘이 정하는 법, 발기는 왕이 되지 못했다.



연나라 군사까지 끌어들여 반역을 기도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발기는 또 다른 동생 계수에게 진압되는 처참한 상황에까지 이른다. 발기는 반란의 실패로 자살을 하고 만다. 고국천왕에 비교해 인품이 떨어져서 왕이 될 수 없었고, 연우에 비교하면 기미를 읽는 능력이 떨어져서 왕이 될 수 없었다. 동생 계수도 연우 편에 선 걸 보면, 발기는 자기편 사람도 부족했던 것 같다. 자질도 안 되고, 기미도 포착할 줄 모르고, 사람도 얻지 못한 발기, 아무리 왕위 서열 1순위여도 왕이 될 수는 없었다.         



❚ 산상왕릉 옆에 묻어다오


우씨는 산상왕의 뒤를 이은 동천왕 시대까지 살았다. 왕태후가 되어 죽음을 맞이하면서 우씨는 유언을 내린다. “내가 행실을 잘못 가졌으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왕[고국천왕]을 보겠느냐? 만일 여러 신하들이 나의 시체를 구렁텅이에 버리지 못하겠거늘 나를 산상왕릉 옆에 장사지내 달라” 동천왕 8년 가을 9월 태후 우씨는 죽었다. 신하들은 우씨의 유언대로 왕태후를 산상왕릉 옆에 묻었다.


우씨의 유언을 보면 다소 혼란스럽다. 진짜 고국천왕에게 면목이 없었던 것일까 의문이 든다. 면목이 없어서 고국천왕 옆에 못 묻힌 게 아니라 진정한 속마음은 산상왕 옆에 묻히고 싶었던 게 아닐까? 선왕의 유언이라고 속여서 왕을 세운 잘못은 인정하지만, 전남편을 따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읽히지 않는다. 우씨의 기사에 덧붙은 무당의 이야기에 의거하면 우씨의 마음을 확실하게 가늠할 수 있다. 고국천왕의 귀신이 무당에게 와서 자신의 분노를 전했던 것이다. 무당이 전한 바, 고국천왕 귀신의 뜻은 이러했다.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 분함을 이기지 못해 드디어 우씨와 더불어 싸웠다. 낯이 뜨거워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다. 네가 조정에 말해 가리게 하라.” 그리하여 신하들은 고국천왕의 능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다.


"낯이 뜨거워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다. 네가 조정에 말해 가리게 하라.”



무당의 전언을 보건대, 우씨는 분명 아주 자발적으로 산상왕 옆에 묻히기를 희망했다. 아마도 자신이 선택한 남편, 산상왕에게 마음이 갔던 것 같다. 그리하여 귀신 우씨가 산상왕릉으로 걸어가자 급기야는 고국천왕이 폭발하고 만 것이다. 산상왕을 남편으로 선택한 우씨, 그리고 그 왕 옆에 묻힌 우씨의 마음. 참으로 자신의 감정과 의지에 충실한 우씨에게 고국천왕의 분노가 이해 안 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에 질세라 고국천왕에 맞서 싸우며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우씨, 당당하기 짝이 없다.


왕이 될 수는 없었지만. 왕후의 자리는 지키고 싶었던 우씨. 우씨가 왕이 되려면, 한고조 유방의 부인 여태후 만큼의 세력과 권력이 있어야 했지만, 우씨는 그렇게 할 수는 없었기에 자신의 손으로 남편을 선택하고 그를 왕으로 세웠던 것이다. 우씨는 그렇게 조용히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리고 왕실의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발기의 반란도 제압하고, 연우를 추대하여 왕의 자리에 앉히고 왕후의 자리를 쟁취했던 것이다. 고구려 왕실에서 이런 일은 다시 찾기 어렵다. 오직 한 여인, 우씨만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형사취수의 관습 안에서 남편을 선택하고 그를 왕으로 세우는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2. 결혼은 내 마음대로


❚ 평강왕의 딸, 궁실에서 나오다


『삼국사기』 열전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온달전」이다. '현처우부(賢妻愚夫)'의 전형으로 일컬어지는 '바보온달'의 이야기는 동화로, 혹은 남자를 성공시키는 능력 있는 여성들의 신드롬으로 회자된다. 온달이야기는 '남성의 성공은 곧 여성의 성공'이라는 등식을 유포하며 여성의 내조를 강조하는 이야기로 우리의 뇌리에 콕 박혀있다. 그야말로 평강왕의 딸은 '내조의 여왕'의 원조이다. 부자에 능력 있는 여성을 만나 금시발복, 입신출세하는 남성들의 꿈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해석이라고 할까?


『삼국사기』의 「온달전」을 다시 읽어보자. 꼼꼼하게 읽어보면 강조점이 다르다. 19세기의 대학자 김택영은 「온달전」을 조선 오천년 이래 손에 꼽는 명문장 중의 한 편으로 꼽은 바 있다. 문체도 문체지만 그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 환상적인 동화 이야기는 아니다. 얼핏 읽으면 부인을 잘 만나 성공한 남자 이야기인 듯하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온달전」을 가난하고 신분도 낮고 바보스런 남자가 신분 높고 돈 많고 똑똑한 여인을 만나 성공한 이야기로 읽는다. 물론 왕실의 공주를 만나 온달은 장군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온달전」에서 보여주는 핵심은 여기에 있지 않다. 주인공은 온달이지만, 이야기 속의 실제 주인공은 평강왕의 공주이다. 공주가 왕실의 결혼 규칙을 깨고 나와 스스로 남편을 선택한 이야기이다. 


아차산 입구의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동상.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온달은 말 그대로 바보가 아니다. 온달은 가난하지만 이미 유명했다. 왕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했다. 온달은 액면 그대로 바보가 아니다. 온달은 용모는 여의고 옷이 허름하여 우습게 보였으나 마음은 순박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어머니를 봉양하는 착한 아들에, 마음은 순수한 사람이지만, 허름한 옷차림으로 길거리에서 구걸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습게보고 바보라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순박하다는 것은 본바탕 그대로를 지니고 있는 매우 순수한 청년이라는 의미이다. 가난이나 구걸에도 흔들리지 않고 본바탕을 지니고 있다면 온달 또한 매우 능력이 뛰어난 청년이었음에 틀림없다. 공주는 온달의 품성을 일찌감치 알아본 모양이다.


문제는 왕의 딸이 울보라는 것. 울보 공주가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공주는 불만이 많은 소녀이다. 시도 때도 없이 운다. 궁중생활에 대한 불만족,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울음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딸에게 왕은 “그렇게 울면 사대부의 처가 될 수 없고 바보온달의 처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왕은 매번 이렇게 말했다.


불만 많은 소녀가 16세의 여인으로 성장한다. 왕은 공주를 고구려의 귀족가문 고씨에게 시집보내려 한다. 그런데 공주가 고씨에게 시집가라는 왕의 말을 거역한 것이다. 공주는 시집가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왕이 신의를 지키지 않는다고 따지기까지 한다. 어릴 때 온달에게 시집가라고 하더니 어찌하여 왕이 그 언약을 지키지 않느냐는 것이다.


필부도 자신이 한 말을 지킨다. 그러니 지존(至尊)이신 왕이 식언을 하지 않는 것은 원칙이다. 지존에게 농담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일단 뱉은 말은 지켜야 한다고 당당하게 주장한다. 이 지점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공주가 온달에게 시집가기 위해 '왕에게 희언이란 없다'를 물고 늘어질 수 있었던 것은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고대사회의 윤리가 작용했기 때문이리라. '말은 곧 행위로 증명되어야 한다.' 『논어』에서 공자가 말씀하지 않았는가? “말은 지켜져야 하고, 행동은 민첩해야 한다.”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행동하지 않는 말은 허언이자 식언이다. 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윤리는 바로 ‘신의’였다. 


사실 공주가 이렇게 왕에게 따진 것은 왕실의 법도대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주는 궁중에 불만이 많았다.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살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주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주체적인 삶을 원했던 것이다. 공주가 울보가 된 까닭은 이 때문이다. 주체적인 삶의 첫 관문이 바로 결혼. 공주는 혼사가 정해지자 완강하게 저항한 것이다. 왕실에서 정해준 귀족의 처가 아니라 마음이 맞는 사람의 처로 살기 위해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가난하여 추레하지만 마음만은 올곧고 순수한 온달은 공주가 배필로 맞이하고 싶었던 짝이다. 적어도 정해준 대로가 아니라 내 마음 가는대로 살고 싶었던 공주는 결국 궁실에서 쫓겨난다.


공주가 울보가 된 까닭은 궁을 떠나 주체적인 삶을 원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야기 전개를 보면 쫓겨난 것이지만, 공주는 궁궐에서의 탈출을 준비한 것처럼 보인다. 공주는 진귀한 금은팔걸이 수십 개를 손목에 걸고서 대궐문을 나와 홀로 걸었다. 루쉰이 말한 바 있지 않은가. 노라가 집에서 독립하려면, 적어도 생활을 뒷받침할 든든한 돈가방 하나가 준비되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거나, 타락하여 노리개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고. 공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독립해서 살 수 있는 재물을 준비하여 나왔던 것이다.



❚ 부부, 동심(同心)의 관계


궁궐에서 나온 공주는 곧바로 온달의 집으로 찾아간다. 가난하고 신분 낮은 온달과 그 어머니는 공주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귀신이나 여우가 아닌 다음에야 이렇게 살결이 희고 고우며, 향기 나는 여인이 이런 미천한 집에 와서 살겠다고 할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그러나 공주는 굽히지 않는다. 공주가 온달을 만나 한 말은 바로 동심(同心)이다. "예전 사람이 말하기를 한말의 곡식도 찧어서 함께 먹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기어서 같이 입을 수 있다 하였으니 만일 마음만 맞는다고 하면 어찌 꼭 부유하고 고귀해야만 같이 살겠습니까?"[古人言, 一斗粟猶可眷, 一尺布猶可縫, 則苟爲同心, 何必當貴, 然後可共乎.]


평강왕의 딸이 온달을 찾아온 것은 그런 믿음 때문이다. 공주에게 부부는 신분이나 재산에 의해 맺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마음이 합해져야 하는 관계이다. 공주는 온달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공주는 온달을 만남으로써 서로가 믿어주는 관계, 신의가 있는 부부로서 맺어지고 싶다는 발원을 이루게 된다. 그야말로 동지(同志)가 될 수 있는 남편을 찾은 것이다. 


뜻이 맞은 공주와 온달. 공주의 지혜로 온달은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 공주는 온달을 신뢰하고 온달은 공주를 신뢰한다. 공주의 재물은 생활의 기반이 되지만. 재물만으로 온달의 재능이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온달이 공주의 말을 믿고 따르며, 더불어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들다. 공주는 재물과 지혜를, 온달은 그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노력을 보여준다.


공주는 궁에서 가지고 나온 보석을 팔아서 집안을 일으키고, 온달에게 좋은 말을 사오게 하여 그 말을 준마로 길러낸다. 처음 말을 살 때에 공주가 온달에게 말하기를 "부디 저자 사람의 말을 사지 말고 나랏말로서 병들고 수척하여 버리게 된 것을 고른 다음 값을 치러야 한다." 하니 온달이 그 말을 따랐다. 공주는 값싸고 좋은 말을 정성스럽게 길렀고, 온달은 이 말을 타고 사냥 기술을 연마했다. 온달은 이 말을 끌고 사냥에 나아가 장수로 성장한다. 장수가 된 온달은 혁혁한 공을 이룬다. 부모의 나라 고구려를 위해 몸을 바치는 장수로 성공한 것이다. 왕은 온달이 뛰어난 장수로 성장하자 사위로 인정한다. 온달의 성공은, 궁중을 탈출하여 주체적으로 결혼한 공주의 성공에 다름 아니다. 공주는 무엇인가 되어가는 삶을 원했던 것이다. 만들어진 삶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면서 만들어가는 삶. 이것이 진정 살아있음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온달전」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온달은 공주에게 신라에 빼앗긴 고구려의 땅을 찾아 돌아오겠다는 맹세를 하고 아단성 전투에 참여한다.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굳은 맹세를 던지고 전투에 나아갔다. 그러나 온달은 신라군사와 싸우다 화살에 맞아 죽는다. 온달은 공주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온달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에 공주 곁으로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온달의 관은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생사는 결정되었으니 돌아가시라'고 서약을 풀어준 뒤에야 관이 움직였다.


자신이 뱉은 말에 대한 책임, 신의가 온달을 움직이는 윤리이다. 공주를 못 떠나서 관이 요지부동한 것이 아니다. 전쟁터에 나서기 전, 공주와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돌아온 데 대한 책임 때문에 관이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공주가 그 약속을 풀어주자 비로소 온달은 떠날 수 있었다. 평강왕의 공주는 마음을 나눌 사람을 남편으로 선택했고, 온달은 그런 부인을 위해 죽은 뒤까지 믿음을 지겼다.


고구려 왕실의 두 여인, 왕후 우씨와 평강왕의 공주는 어찌 보면 살고 싶은 대로 살았던 여성들이다. 왕후로 살아가기를 원한 우씨는 남편을 선택해 왕으로 만들었고, 자기 마음껏 살고 싶었던 평강왕의 공주는 왕실을 탈출하여 신분을 뛰어넘는 결혼을 쟁취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신이 선택한 사람에 대해 믿음을 다했다. 왕후 우씨는 자신이 선택한 남편 산상왕의 능 옆에 묻혔고, 평강왕의 공주는 약속의 땅을 차마 떠나지 못한 온달의 시신을 풀어주었다. 참으로 보기 드문, 그리고 참으로 독특한 여인 두 명이 「고구려본기」에 남아, 우리들에게 인생의 반전을 고민하게 한다. 우리들은 무엇을 위한, 무엇에 대한 전복을 꿈꾸는가?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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