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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나의 고전분투기

나의 고전분투기,『중용』을 시작하며

by 북드라망 2016. 5. 19.


『중용(中庸)』은 어떤 책인가? 



'중용'이라는 말의 일상적인 용법은 '치우치지 않음'의 의미로 쓰인다. 이 용법의 근거는 12세기 북송시대의 정자의 “중(中)이라는 것은 치우치지 않음[不偏 불편]을 말한다.”라는 주석이다. '치우치지 않는다'는 의미는 대개는 중간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이때 중간이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어정쩡함이나, 중립을 가장한 책임회피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용법은 『중용(中庸)』이라는 텍스트가 의미하는 중용의 의미를 심히 오해하는 것이다. 정자(程子)가 말하는 '치우치지 않음[不偏]'은 중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자(朱子)는 '치우침이 없고, 과함이 없고, 모자람이 없는 것[不偏不依 無過不及 불편불의 무과물급]'이라고 보다 상세한 주석을 덧붙이는데, 아마도 중간이라는 의미로 해석됨을 경계함 인 듯하다. 주자는 중용의 용(庸)에 대해서는 평상(平常)이라고 주석한다. 그러니까 주자에 따르면, 중용은 평상시의 일에서 不偏不依(불편불의) 無過不及(무과불급)을 행하는 것이다. 중용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앞으로의 연재에서 중요하게 다룰 것이기에 여기서는 단지 중용이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만 하고 넘어가겠다.  


정자가 말하는 '치우치지 않음'은 단지 중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용(中庸)』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과 마찬가지로  『중용(中庸)』 역시 처음부터 단행본은 아니었고, 『예기』의 한 편이었던 것을 주자가 뽑아내어 사서의 하나로 위치시키고 단행본으로 주석을 달았다. 이를 『중용장구』 라고 하는데, 『~장구(章句)』라는 이름이 붙은 텍스트는 주자가 원문을 장(章)으로 나누고, 다시 장(章)을 구(句)로 쪼개어서 주석을 단 책을 말한다. 『중용』을 자사(子思)의 단독 저술로 자신의 책에 기록한 사람은 사마천이었다. 하지만 청대에 와서 자사의 저술이라는 사실이 의심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고대의 다른 저술들과 달리 중용은 너무나 체계적인 저술이어서 기원전 4세기의 저술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1970년경부터 시작된 고분발굴사업에서 고대의 수많은 죽간(竹簡)이 발굴되었는데, 이 죽간사료들로부터 『중용(中庸)』이 기원전 4세기경에 지어진 자사의 저작이라는 것이 더욱 신빙성이 있게 되었다.


주자는 『중용장구』 서문에서 “옛 성인들의 책을 하나하나 뽑아보건대 그 핵심적인 뼈대를 제시하고 깊은 내용을 열어보여 주신 것이 이 『중용(中庸)』처럼 분명하고 다한 것은 있지 않다”고 중용을 평가하고 있다. 주자는 또 이 책을 논어와 맹자를 공부한 다음에야 비로소 이해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초학자인 주제에 『중용』이 어떠한 책인가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있으랴만, 내게 『중용』은 하늘의 이치가 어떻게 인간 삶의 준거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텍스트였고, 그 전에 읽은 『대학』의 토대가 되는 사유를 가르쳐준 책이었다.




『중용』은 총 33장으로 이루어진 텍스트인데, 주자는 이 책에 대해 말하기를 “처음에는 하나의 이치를 말하고, 중간에는 흩어져서 만사를 이루고, 마지막에는 다시 합쳐져서 하나의 이치가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중용』은 주제별로 크게 6개의 파트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중용의 1장이다. 주자가 '하나의 이치'라고 한 것이 바로 하늘이 만물에게 부여해 준 '성(性)'이다. 주자는 중용 1장으로부터 '성이 곧 이치'라는 성리학의 핵심 테제를 이끌어 낸다.


그 다음 2장에서~11장까지의 주제어는 '중용'이다. 여기서는 중용을 행하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을 비교하면서 군자의 중용이란 바로 시중(時中)이라는 중용의 핵심 테제가 나온다.  하지만 그 맛을 아는 이가 드문지 오래 되었는데,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은 그것을 하찮게 여겨 행해지지 않고, 어리석은 자들은 알지 못해서 행해지지 않는다는 공자의 탄식이 이어진다. 그리고 곧바로 진정한 지혜로운 자, 순임금의 중용과 공자의 애제자 안회의 중용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순임금은 성인이고, 안회도 거의 성인에 버금가는 자 아닌가? 그러니까 순임금이나 안회 정도는 되어야지, 아무나 시중(時中)을 넘볼 수는 없다는 말 같기도 하다. 심지어 공자는 나라를 평안케 하는 일, 높은 벼슬을 사양하는 일, 심지어 시퍼런 칼날 위에 올라서는 일은 하려면 할 수 있겠지만, 중용을 행하기는 어렵다고 이야기 한다. 


중용을 행하기가 어려운 것은 그 자체가 너무나 크고 높은 수준의 일이기 때문이 아니다.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도 중을 행하겠다고 해놓고는 한 달도 채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다. 면벽 수행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한 달도 해내지 못하는 것일까? 일상의 일이란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일이기에 대개는 소홀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용을 행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바로 (剛)이다. 장수 출신 공자 제자 자로가 강함에 대해 묻자, 군자의 강함을 말씀하신다. 강(剛)은 바로 중용을 계속하는 힘이다. 그래서 11장은 “중간에 그만두지 않는다”는 주제로 마무리된다.


'늦잠 자지 않기'같은 일상적인 일은 얼마나 계속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12장부터 19장까지는 「도(道)의 작용」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는 어디에나 드러나는 도의 편재성(遍在性)과 그 원인의 은미함을 함께 논하는 장이다. 어디에나 있는 도의 편재성은 비(費)자로 표현되는데, 주자는 '쓰임이 넓다'로 주석한다. 그러니까 비(費)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전능하심을 나타내는 무소부재와는 다른 것이다. 비(費)는 만천하에 드러나는 작용이고, 거기에 예외는 없다. 그러나 그 원인 되는 바[所以然 소이연]는 은미해서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는 말이다. 도는 군자의 도이든 천지만물의 작용이든 예외 없이 모두 적용되는 것이기에 하찮은 일이 따로 있을 수가 없지만, 그 원인은 은미하다.

여기에는 특별히 귀신장이라 불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실재함도 다루고 있는데, 유가의 귀신에 대한 이해는 '천지의 공통된 쓰임이자 조화의 자취'인데, 정말 품위 있고 아름다운 주석이다. 왜 봄이 오면 언 땅에서도 초목이 움을 틔우고, 가을이면 탐스런 열매를 매달고, 겨울에는 말라죽는지 그 조화의 속은 알 수 없지만, 그러한 질서, 즉 조화의 쓰임이 있다는 것은 초목의 움과 열매라는 그 조화의 자취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원인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해 버리지 않는다. 충서와 효, 장례와 제사에 대한 언급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데 모두 도의 작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다음 20장은 공자의 정치철학이 집약되어 있다. 노나라의 군주, 애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서 물었고 공자가 답했다. 애공의 질문에 공자는, 전범으로 삼을 만한 정치는 이미 옛 기록에 남아있으니 사람만 있으면 된다고 답한다. 그리고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군주가 수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군주라는 자리만으로 의(義)로 맺어진 동지를 얻을 수는 없다는 경고이다. 여기서 의(義)라고 하는 것은 요샛말로 의리가 아니다. 의(義)는 마땅함[宜 의]이다. 그러니까 인재는 높은 봉록과 지위, 그리고 평천하를 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보고 모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군주의 됨됨이를 보고 모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정치의 효과는 마치 갈대가 자라나는 것처럼 빠르게 나타난다고 공자는 말한다. 

하지만 애공은 그 가르침을 어려워한다. 그러자 공자는 현실에서 군주가 지켜야할 9가지 도리, 9경(經)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법까지 깨알 같이 말씀하신다. 9경을 제시했지만 공자가 말하는 요지는 사실 단 한 가지, 바로 성(誠)을 다하는 것이다. 성(誠)은 정성되고 거짓이 없는 것으로 천도의 운행원리요, 사람이 따라야할 바다. 중용의 주제어를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성(誠)'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사람을 얻으려면 사람의 도를 알아야 하고, 사람의 도를 알기 위해서는 하늘의 도를 알아야 한다고 대답한다. 단지 정치에 대해 물었을 뿐인데, 하늘의 도리까지 스케일이 넓어지니, 풀지 못할 문제를 제시받은 학생처럼 애공은 얼마나 난감했을까? 하지만 공자는 물러서지 않는다. 이 장의 압권은 아무래도 一人能知(일인능지) 己百知(기백지), 人十能知(인십능지) 己千知(기천지)에 있는 것 같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이 한 번에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백번 하면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이 열 번에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천 번을 하면 된다'는 뜻이다. 요컨대 군주가 성인의 길로 나아가려고 죽도록 노력하면 정치는 저절로 풀린다는 말씀이다.


한 번 해서 안되면 열 번, 그래도 안되면 천 번을 하면 된다!



그 다음 21장부터 32장까지는 하늘의 도와 사람의 도를 말하고 있는데, 20장의 공자의 말을 이어서 자사가 논술한 것이다. 이 부분이 『중용』의 클라이막스다. 21장은 『중용』의 핵심 테제인 “하늘이 만물에게 부여해 준 것을 성(性)이라 한다. 하늘이 부여한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도를 세상에 펴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에서, 성(性), 도(道), 교(敎)를 성(誠)을 중심에 두고 다시 풀이하고 있다. 주자가 풀이한 대로 여기서 부터는 다시 합쳐져서 하나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22장부터는 32장까지는 하늘의 도와 인간의 도가 번갈아 나오면서, 하늘의 도에 따라야하는 인간의 윤리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전개 된다. 32장에서는 오직 지극한 성(誠)을 지닌 자만이 천하를 경영할 수 있고, 천지 화육의 공을 알 수 있다는 내용으로 하나의 이치를 말하고 있다.  

여태까지 살펴 본 바로 『중용(中庸)』의 각 파트들은 결국 성인(聖人)으로 귀결된다. 성인(聖人)이란 고귀한 경지이긴 하지만, 스피노자의 말대로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드물다.”(윤리학, 5부) 공자는 왜 애초에 불가능한 목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 닿을 수 없는 이상이 아니라, 애공의 질문처럼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일 텐데 말이다. 그러나 공자가 제시하는 목표는 성인이 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매일 매일의 반복되는 일상이 바로 목표, 그 자체이지 않을까? 이것은 비록 실패했지만 과정도 의미 있을 거라는 입에 발린 위로의 말과는 다른 것이다. 목표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삶 그 자체가 바로 도달할 목표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대미를 장식하는 33장은 모두 9편의 싯구를 『시경(詩經)』에서 인용하면서 전개된다. 『시경』은 고대 중국의 풍속을 노래한 전승가요집이다. 원래 3000여편이던 것을 공자가 305편을 추려서 정리했다고 전해지는 시의 경전이다. 풍속을 노래한 시가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유가에서 시를 인용하는 방식은 언제나 파격적이다. 예컨대 “비단옷을 입고, 얇은 옷을 덧입었구나”라는 시를 인용하는 것을 보자. 시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를 노래한 것일 터. 하지만 시를 인용한 그 다음 구절은 군자는 화려함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한다고 코멘트한다. 덧입은 얇은 옷은 자신의 덕을 내세우지 않는 군자의 태도와 연결한 것이다. 이처럼 말과 글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공자나 자사가 시를 인용하는 방식은 기표중심의 언어학 이론을 단번에 날려버리고, 문제는 용법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주자는 『중용』을 일러 초학자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단언했다. 이 거대한 텍스트를 엄밀하게 학문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다. 하지만 초학자인 내가 가져다 쓸 수 있을 만큼은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글과 말은 기표가 의미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용법이라는 것을 굳이 비트겐슈타인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공자와 자사가 내게 『중용』이라는 텍스트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주자는 글 읽는 자가 깊이 읽고, 늘 생각하면 얻을 것이 있을 뿐 아니라 그 무궁무진한 용법은 죽을 때까지 마르지 않을 책이 『중용』이라 했으니, 나의 용법도 또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 앞으로의 연재에서 『중용』의 한글 해석은 동학들이 풀어쓴 북드라망의 낭송집, 『낭송 대학/중용』을 기준으로 하겠다.

글_최유미


낭송 대학 중용 - 10점
자사.증자 지음, 김벼리 풀어 읽은이, 우응순 감수/북드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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