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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해완's MVQ

도시를 떠나 거대한 야생의 땅 '그랜드 캐니언'에 가다

by 북드라망 2015. 8. 28.


땅의 노래




뉴욕에서 맞는 두 번째 여름 방학이 거의 끝나간다. 일한 기억밖에 없는데,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다. 작년에는 매인 곳 하나 없어 그냥 훌훌 떠나면 되었다. 워싱턴,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캐나다의 벤쿠버까지 아메리카 대륙을 찍고 다녔더랬다. 호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올해 내 일상은 시작부터 ‘정규직’의 냄새가 났다. 늦깍이로 대학교에 입학한 것도 모자라 내가 지원하지도 않은 알바 자리가 넝쿨째 굴러 들어왔고, 정규직 스케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써야 하는 원고가 있었다. 주말에는 밀린 숙제를 하다가 쓰러져 잠들기 일쑤였다. 아, 이 비루한 일상. 모든 장소가 그렇듯, 뉴욕은 어느 새 설레였던 이국적인 도시에서 내 일상을 무겁게 짓누르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이렇다 보니 올해는 여름 방학에 떠나는 휴가가 그렇게 귀할 수가 없었다. 말이 방학이지, 일에 묶여서 휴가도 한 번밖에 내지 못했다. 어디로 갈까? 나는 마음을 크게 먹었다. 그랜드 캐니언에 가자. 뉴욕을 떠나자.



야생성, 대도시와 대자연


답답한 도시를 떠나 자연으로 휴가를 떠난다는 발상은 구식이라고 생각했었다.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뭐랄까, 일에 찌든 회사원이 도시를 도피할 때 하는 생각처럼 보였다. 나는 초록 내음이 주는 심신의 평화가 필요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도시로부터 도피할 이유가 없었다. 도시가 더 재미있었던 것이다. 서울을 떠날 기회가 생기면 부산, 춘천, 경주 등등 다른 도에 있는 다른 도시를 먼저 생각했다.


하지만 자연이 도시로부터의 도피처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 미국에 와서야 도시와 자연의 구분선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이곳에서는 자연이 도시를 압도한다. 휴양지가 아니라 야생인 것이다. 3억 남짓 하는 미국 인구는 전 세계 3위를 차지하지만, 이 대륙에는 사람 손길이 닿지 않는 황무지가 수두룩하다. 심지어 지도상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지명도 많다. 이 거대한 땅이 우리를 삼켜버리지 않는 것은 순전히 자동차 덕분이다. 하지만 고속도로 하나 달랑 놓여있는 대평원을 몇 시간째 가로질러 가노라면, 차&도로&기름이라는 삼종 세트가 사라지는 순간 이 허허벌판에 홀로 뚝 떨어질 나란 사람은 얼마나 무능한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언들이 자연을 경외했던 것도 십분 이해가 된다. 그랜드 캐니언을 찾아가는 길목에서 마주친 아리조나의 초원은 그랜드 캐니언 못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이 앞에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세계는 너무나 작은 점이다.



그랜드 캐니언으로 가는 아리조나의 벌판



미국의 역사는 이 자연을 길들이는 과정이었다. 피와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였으나, 또한 이 대자연의 심연을 끝없이 마주해야 하는 두려운 역사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이 ‘자연 길들이기’에 성공했을까? 글쎄다. 확실히 인디언의 땅이었던 영감 넘치는 아메리카 대륙은 이제 없다. 대륙 구석구석 도로가 깔렸고 홈이 패였다. 그러나 자연 속 야생은 국가 체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런 반면, 미국의 대도시들은 이 생생한 자연에 집어 삼켜지지 않을 만큼 강력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다. 미국은 희한하게도 도시도 야생적이다. 20세기를 통과하면서 미국은 근대의 최첨단에 섰다. 노란 택시로 꽉 차 있는 뉴욕의 시가지, 최첨단 빌딩이 올려져 있는 시카고, 대마초와 인디 음악 씬으로 퇴폐적인 씨애틀은 전 세계적으로도 대표적인 도시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런 명성은 그냥 세워진 게 아니다. 미국의 도시는 이민자들에게 입구를 열어놓았다. 이 쉼 없는 유입이 도시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가열찬 원동력이 된다. 뉴욕에서 나는 보았다. 세계 각지에서 끝없이 밀려오는 사람들 간의 투쟁과 우정과 욕망이 이 도시를 영원한 도시의 대명사로 만든다는 것.


거칠게 말해, 미국이라는 나라는 야생성을 빼면 시체다. 어떤 체제로도 길들여지지 않는 원초적인 힘이 이 땅에 있다. 그렇다면 여행할 때 중요한 것은 도시냐 자연이냐가 아니라, 이 야생성을 체험하는 것이다. 비루한 일상을 날려버릴 낯선 힘!


석양이 질 때 즈음의 그랜드 캐니언의 모습





그랜드 캐니언, 지층은 아름답다


도시는 이제 그만 가도 된다. 사실, 작년에 도시를 너무 많이 여행 다녔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나 친구들이나 모두 운전 면허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고 싶었던 수많은 장소들이 자동차 없이는 접근이 불가능했다. 올해는 사정이 달랐다. 남자친구가 면허를 따기도 했고, 때마침 어머니가 뉴욕을 방문하여 우리의 여행에 합류했다. 베테랑 운전수의 등장이었다. 이들을 한껏 이용하여(?) 나는 그랜드 캐니언이라는 주사위를 던졌다.


그랜드 캐니언은 콜로라도 강이 지나가면서 만들어낸 거대한 협곡이다. 콜로라도 강의 치명적인 물살에 깎이고, 깎이고, 또 깎여, 고원의 지층이 훤히 드러나게 되었다. 이 땅의 나이는 굉장하다. 가장 오래된 지층은 18억년이나 된다. 지질학자들은 그랜드 캐니언을 가리켜 “가장 오래된 지층이 있는 가장 어린 계곡”이라고 부른다. 인디언들은 여기서 최소 4천 년 전부터 살았다고 하며, 미국인들은 150년 전부터 탐사를 시작했지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끝도 없이 나온다.


이 수수께끼의 땅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고원 꼭대기에 서서 강 아래 쪽을 굽어 보면 그 심연을 가늠할 수가 없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고원 가장자리를 따라 걸으면 층층별로 색깔이 다른 지층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감성이 메마른 사람이라도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풍경이다. 우리는 산책을 했고 드라이브를 떠났다. 나중에는 몇 시간 하이킹을 해서 협곡 아래쪽으로 직접 내려가 보기도 했다. 18억년 전의 시간을 내가 지금 직접 만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틈새 사이로 작은 선인장들이 뿌리를 내려 한 철 생명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랜드 캐니언은 물이 없기로 유명한 사막 고원 지대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왜 지층 개념을 발명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땅은 그냥 보면 평평하다. 그 속을 알 수 없을뿐더러, 그 속에 뭔가가 있다고 보통은 생각하지조차 않는다. 하지만 그런 땅들도 갈라보면 그랜드 캐니언처럼 경탄스러운 지층이, 수억년 동안 축적되어 온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엄청난 압력을 가해져 모래알갱이들이 딱딱하게 굳고, 그 안에서도 연속과 불연속이 계속 교차하면서 지구의 역사를 증명한다. 우리는 그것을 지반으로 딛고 살아간다. 그랜드 캐니언의 선인장처럼 말이다. 인생은 짧지만, 그 인생이 펼쳐지는 우주는 드넓다. 저 두 철학자는 이 풍경에서 인간 사회의 역사도 이렇게 형성되었다는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이다. 현재라는 점에서는 이 심연을 보지 못하지만, 우리의 지루한 일상을 잘라 단면을 드러내보면 거기서도 그랜드 캐니언 같은 노래가 들리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지층에서 탈주하는 꿈을 꾸었다. 그럼에도 지층은 아름답다. 이 숨 막히는 아름다움의 무게를 직접 본 사람이 그곳에서도 탈출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이킹 할 때 정면에서 찍은 그랜드 캐니언의 절벽





예측할 수 없는 여행


이 여행의 또 다른 묘미는 예측할 수 없는 돌발상황이었다. 그랜드 캐니언으로 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던 중, 어머니는 국제 운전 면허증을 집에서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 없이 그랜드 캐니언을 여행하라고? 그러나 집으로 되돌아가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비행기 탑승 시간이 코 앞이었다. 결국 이층에 사는 집주인 아저씨께 연락을 드려서 국제 운전 면허증 사진을 찍어서 전송해달라고 부탁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차 렌탈 센터가 상당히 허술했던 터라 별 문제 없이 차를 빌렸다.


또, 그랜드 캐니언 둘째 날에는 내가 급작스러운 복통에 시달렸다. 밤에 자면서 몸에 냉기가 들어온 듯하였다. 살면서 그렇게 배가 아파본 적은 처음이었다. 나중에는 피가 통하지 않는 것인지 손발까지 저렸다. 다행히 이번에는 어머니가 나섰다. 혹시 모른다며 챙겨 온 침을 꺼내 손발에 놓고, 급한 대로 열 손가락을 땄다. 그러자 얼마 후 손발에 온기가 돌아왔고, 복통이 가라앉았다. 하마터면 그랜드 캐니언에서 헬리콥터 911 엠뷸런스를 부를 뻔 했다.


마지막 사고는 남자친구가 장식했다. 운전면허증을 막 딴 이 친구는, 불행하게도 경험은 없고 자신감만 넘쳤다. 호기롭게 고속도로에서 운전하겠다고 핸들을 잡았지만 차선을 바꾸는 도중 옆차를 거의 들이받게 되었다. 하늘이 도우셨는지 사고는 없었다. 어머니는 초보 운전사도 경험이 필요하다며 남자친구보고 계속 운전하게 해주었지만, 앞좌석에 앉아 있었던 나는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덜덜 떨어야 했다.


그랜드 캐니언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온 것에 감사하며, 이제는 뉴욕에서의 일상을 계속 하련다. 이 도시의 야생성을 느끼고, 그 지층을 더듬어 봐야겠다.


그랜드 캐니언 그넟에 있는 작은 도시, 세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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