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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쿵푸스, 만나러 갑니다

[호모쿵푸스, 만나러 갑니다] 『주역』을 만나다: ‘소수성’으로 『주역』을 읽는 괴짜

by 북드라망 2024. 4. 22.

『주역』을 만나다: ‘소수성’으로 『주역』을 읽는 괴짜



문탁네트워크(이하 문탁) 점심시간. 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고 있다.

 

B: A가 쌤 보고 '똑똑한 과학자' 같대요.
자누리: 나?
C: 아니~ 무슨 '똑똑한 과학자'야. '괴짜 과학자'라고 했지.

주위 사람들 모두: (푸하하 웃으며 동의한다)

 

문탁에 처음 온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비누 공방에서 먼저 듣는다. 지금은 손을 뗐지만, '자누리 생활건강'의 '자누리'가 바로 이 선생님이다. 다음으로는 만능 기술자라는 인상을 받는다. 문탁, 파지사유, 인문약방으로 나뉘어 꼴도 내용도 다 다른 대형 홈페이지를 혼자 만들어서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틈틈이 동영상과 애니메이션도 제작한다.


화장품, 홈페이지, 영상, 애니메이션 모두 독학한 것만으로도 '괴짜 과학자'의 타이틀을 달기 충분한 것 같지만, 진정한 '괴짜'의 모습은 세미나와 강의에서 더 잘 보인다. 그는 논리적으로 글의 짜임새를 파악해서 색다른 개념이나 맥락을 제시한다. 어려워서 가끔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친절하게 풀어만 주신다면 '앗,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싶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논리를 따르면서도 세속의 시각과 어딘가 다르다. '괴짜'만이 낼 수 있는 틈이다.


그런 '괴짜'에게 이미 몇 년째 빠져있었고, 앞으로도 쭉 연구하고 싶은 책이 생겼다. 『주역』이다.

 



1. 주경야독 생업인의 공부기
어떻게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셨나요?
깊게는 하지 않았지만, 20대에는 학생운동도 하고 노동운동도 하면서 반자본주의가 제 삶의 일부라고 생각해 왔어요.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버느라 책을 못 보고 애들 키우는 데만 매진했어요.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요.


남편이 노동조합운동을 했는데, 어느날 "내가 네 삶을 대리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냐"더라고요. 저는 한 사람은 돈을 벌고 한 사람은 운동에 매진하자고 생각했거든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일차적으로는 배신감을 느꼈는데 사실 맞는 말이잖아요.


그래도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워서 다른 생각을 못 하다가 2009년에 문탁을 알게 됐어요. 마음먹고서도 6개월인가 더 있다가 무작정 찾아가서 요요 쌤과 상담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요요 쌤이 참 당황하셨을 것 같아요. 제가 너무 진지했거든요. 몸도 힘들고 시간도 없다 보니까 공부하러 가는 게 허투루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 그 정도의 진지함이 아니었다면 갈 수가 없었던 거예요.

 

일과 공부를 병행하셨던 거예요?
학생을 가르치고 나면 밤 10시, 11시에 시간이 비었어요.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으니까 주경야독이 됐어요.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 주경야독 자체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때부터 문탁에서 자누리는 밤을 새운다는 얘기가 회자되기 시작했죠.


학생 가르치는 일을 그만둔 지는 5~6년 됐어요. 돌아보니 제가 딱 먹고 살 만큼의 일만 하고 있더라고요. 애들이 다 학교를 그만두면서 돈이 덜 필요해지니까 과감하게 일을 때려치울 수 있었어요.


또 그때 문탁에서 자립경제를 실험했어요. 세미나에서 '그래서, 일상생활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질문을 늘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정말로 다른 경제를 만들어보자, 하면서 경제와 마을을 재정의하고 순환의 의미를 재설정하면서 마을경제, 마을작업장 활동을 했죠.


그때 내걸었던 것 중 하나가 공부하는 친구들이 이 안에서 먹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제가 화장품 만드는 사업단에 있었는데, 그 실험의 대표 케이스로 문탁에서는 꽤 큰 금액의 활동비를 받았어요.


경제 공부를 많이 하신 것 같으신데, 주역은 어떻게 공부하게 되셨나요?
어느 해에 마을 경제팀에서 근대성을 탐구했어요. 초기 공리주의라든가 국부론을 봤죠. 그때 서양에서 '개인'이 어떻게 출현하는지 공부하면서 답답하더라고요. 개인이냐 공동체냐, 이런 식의 대립 구도로 공부하는 게 별로 힘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개인'의 의미가 약한 곳이 동양이 아닐까 싶어서 그때 동양고전 세미나 팀에 들어갔어요.


맹자, 대학,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근사록을 읽었는데 거기에 온통 『주역』 얘기인 거예요.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지금과 다른 사유법이 있었나보다, 그게 『주역』이었나보다, 하면서 관심을 갖게 됐고요.


나중에 보니까 신유학 사상투쟁의 중심에도 『주역』이 있더라고요. 실용적으로 어떻게 절취했는지 보는 게 너무 흥미로웠어요. 당대에 『주역』에서 뭔가를 가지고 온 거잖아요. 여기에 뭐가 있다, 싶었죠.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 7~8년째 손을 못 놓고 있네요.


2. 주역과 소인, 어머니, 비국가
『주역』에 무슨 매력이 있다고 느끼시기에 7~8년째 공부하고 계신 걸까요?
그러니까요. 지금도 가끔 생각을 해봐요. 왜 『주역』을 못 놓을까. 일단은 양이 많아요. 문자도 많고, 괘만 64개에 효까지 하면 384개 거든요. 그러니까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어요. 주역을 좀 알려면 20년은 해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또 제가 호기심 덩어리인데요, 『주역』 체제가 특이하잖아요. 과거에 점이 쓰였는데 그게 미신이 아니었다면 어떤 것이었을지 궁금하고요. 성리학자들은 점서를 일상의 실용서로 읽으라고 강조하거든요. 『주역』이 한 대 이래로 중요한 자리에 있었고, 괘상(像)의 변화를 중요하게 여기던 흐름의 반대급부로 해석한 거예요.


『주역』 안에는 혼란함이 내재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주역』은 이분법으로 묶이지 않고, 반대되는 부분도 그 안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죠. 그게 매력적인 것 같아요. 『주역』을 읽는 것 자체가 모험인 거죠. 다들 각자 질문을 하면서 나름의 독법을 마련하며 읽으시더라고요.

선생님은 어떻게 주역을 읽고 계세요?
보통 『주역』을 정의하는 '『주역』이 변화의 책이다'라는 말이 그렇게 힘 있게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동서양을 비교할 때 서양은 고정불변을 추구하고 동양은 변화를 이야기한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해설하면 무난하긴 한데, 사실 서양 철학자들도 비슷해요. 혼란한 시대를 어떻게 넘어갈까, 하는 맥락이 있었을 텐데 그걸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면 단순화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요. 변화의 개념을 더 힘있게 가져오려면 '변화' 자체가 무언지 탐구해야겠다 생각해요.


또 유학자들은 『주역』을 사대부의 관점으로 재해석했어요. 왕부지 같은 분들은 『주역』이 군자, 그러니까 지식인을 위한 책이라고 하고요. 거기 있는 국가론적이고 정치론적인 부분, 가부장적인 관점들이 불편하더라고요. 최근에 신유물론이나 페미니즘 같은 책을 보면서 생각도 많이 바뀌고 있고요.


내가 봐야 하는 건 다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김시천이라는 한국 학자의 책과 강의를 보게 됐어요. 시대적 맥락을 모르고 현대로 가져오는 건 곤란하다고 하면서 동시에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분인데 군자가 아니라 소인을 옹호하시더라고요. 그걸 보니까 『주역』도 소인의 입장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거예요.

군자가 아닌 소인을 가져온다니, 색다른 해석이 될 수 있겠네요.
제가 못 하는 게 있어요. 예전에 운동에서 이론 투쟁할 때 저는 주류에 낄 수가 없었어요. 크게 둘로 나뉜 게 너무 불편했거든요. 그럴 때도 저는 제삼지대를 갔어요. 저는 그냥 소인인 거죠.

소인을 위한 『주역』은 어떤 거예요?
『주역』에 관한 정의 중에 '『주역』은 어머니의 책이다'라는 것도 있어요. 확실히 『주역』에는 음의 성향, 만물을 길러주고 포용하는 관점이 강한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부분은 권위 있는 『주역』 해설서에서는 다 비껴가요.


또 『주역』의 양이 방대하다고 했잖아요. 주나라라는 국가 시스템 이전에 이미 상당한 데이터가 쌓여 있었어야 될텐데, 그 데이터는 훨씬 비국가적이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하면 소인을 위한 『주역』은 소수성의 주역이죠. 소인, 어머니적인 것, 비국가적인 것, 더 거슬러서는 역사의 위로까지 올라갈 수도 있어요.


보통 『주역』 이전에 연산역, 귀장역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귀장(歸藏)'을 '저장한다'고 해석하는 분이 있어요. 농업 시대의 역인 거죠. '연산(連山)'의 산에는 채집해야 될 열매들이 있으니까 채집 시대의 역이라고 보고요. 그러니까 역이라는 것 안에 가부장제 이전의 채집과 관련된 흔적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있어요. 그걸 추적해 보고 싶어요.

 



3. 도시의 채집인이 되자
채집이라니 생소하게 느껴져요.
권력을 문제 삼으면 똑같이 권력적이게 되기 쉬워요. 사실 지배적인 것들은 양적으로는 소수고, 오히려 소수성이 양적으로 다수를 이루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마을경제 공부할 때도 보면 교환경제라는 게 사실 굉장히 취약하고 허술해요. 어떻게 사회가 계약서 한 장 혹은 권력의 창칼에 의해서만 이뤄지겠어요. 이게 유지될 수 있는 건 선물 경제가 밑에서 받쳐주니까 가능한 거거든요.


가부장제 사회에서도 여성들의 삶이 권력에 복종하는 삶이었다고만 보는 건 그분들의 삶을 폄하하는 거죠. 차별이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분들이 감내하면서 이 사회를 지탱해 준, 근저에 깔려 있는 더 큰 삶과 사유 양식이 있을 텐데 너무 당연해서 드러나지 않는 거예요.


저는 그걸 채집이라고 말하는 거죠. 농사나 정착은 이미 다 드러나 있지만, 우리는 채집을 하면서도 한다고 느끼지 못해요. 직관적인 예로 쓰레기를 채집하거나 분리수거 많이 하잖아요. 분리수거의 원천이 채집가들이에요. 르 귄은 최초의 도구가 산에서 채집한 걸 운반하기 위한 위한 장바구니였을 거라고도 해요. 우리가 여전히 쓰고 있는 거죠. 해석에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오늘날 채집인이 된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시대를 자꾸 절망의 시대로만 보잖아요. 그런데 사실 이미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많은 희망을 길어 올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게 자꾸 가치 폄하되고 있지만요.


우리의 힘을 되찾기 위해서는 삶의 양식을 다른 방식으로 설계해야 되겠죠. 그런 의미에서 채집이 근대적인 힘과 다른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도시에서 살고 있지만, 채집인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주역』을 읽으면서 스스로 좀 달라졌다고 느끼는 게 있으세요?
제가 공부를 좀 파고들면서 하는 스타일이에요. 어디서 걸리면 뉘앙스로 못 넘어가죠. 확실한 이유가, 논리가 있어야 이해가 돼요. 시간이 부족하니까 마음에 드는 책은 세미나가 끝나면 달달 외울 정도로 파기 시작해요.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나 마뚜라나 『앎의 나무』, 라투르 『판도라의 희망』 등을 그렇게 봤어요. 주로 인식론이네요.


거칠고 날카로운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커요. 인과론적이고 비판적으로 공부했거든요. 그런데 『주역』에는 해석법이 다양하잖아요. 효의 옆자리를 보기도 하고, 건너뛰어서 보기도 하고, 시간순으로 보기도 하고요. 처음에는 해석이 너무 다양하니까 좀 우습게도 보였는데, 주역을 보면 볼수록 뭐든 직선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러면서 부드러워지고 생각도 많이 유해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비논리적이라고 생각했을 것들을 경청하면서 왜 그렇게 해석했을까, 어떻게 엮어볼 수 있을까, 그 후를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친구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할까 봐 노골적으로 표하진 않는데, 마음속으로는 관대해진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주역』을 공부하면서 훈련이 된 거죠.

 


앞으로 주역으로 뭘 해보고 싶으세요?
일단은 여러 갈래로 뻗은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있어야 할 것 같고요. 그러고는 프로그램도 만들어 보고 싶고, 무엇보다 영상을 만들고 싶어요. 기술을 익히느라 시간이 걸리고 있지만요, 청년들이 『주역』을 접근하기에 좋을 것 같고요. 또 영상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 『주역』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자누리 쌤은 이과출신으로 수학과 과학을 가르쳤다. 그런데 논리적이기만 할 것 같아 보이는 그의 뿌리에는 강원도 산골이 있다. 소프트웨어나 책보다 먼저 디깅했던 건 강과 강가의 돌, 하늘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대신 돌을 쌓아 이글루를 만들고 잠수해서 물속 세계를 누볐다. 어쩌면 자누리 쌤이 영상을 만들고자 하는 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가 보아왔던, 보고 있는 세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게 아닐까.


대부분의 시간 동안 사람들을 서포트해 왔던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무언가 드러내 봐야겠다는 마음을 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어렵게 냈다.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그걸 글로 쓰고 영상으로 만드는 것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죽기 전에는 할 수 있으려나" 싶단다. 그래도 언젠간 해내면 좋겠다. 자누리 쌤의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보통 눈을 반짝이며 살짝 들뜨는 모습을 보인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세계를 볼 수도 있다는 풍요로운 가능성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인터뷰_김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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