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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걷다보면

[기린의 걷다보면] 작심 만보 소동

by 북드라망 2024. 4. 2.

작심 만보 소동

 

12월은 분주한 달이다. 공동체에서 1년간 공부한 내용을 갈무리한 에세이 발표도 가야하고 드문드문 송년회 일정도 있다. 주일에 이런 일정이 잡히면 휴일 걷기는 자연스럽게 미루어졌다. 그 사이 흐린 날까지 겹치며 걷기가 점점 더 귀찮아졌다. 12월 중순을 넘기니 몸놀림이 둔해졌지만 모른 척 하던 어느 날, 공동체와 연결되어 알게 된 지인이 공간을 새로 열었다고 해서 축하방문을 하게 되었다. 미리 와있던 분들과 합석을 하게 되었는데 걷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한 분은 걷기강좌를 연다고 했고, 지인은 23년 한 해 동안 줄기차게 걸어서 남산 주변으로 열 가지가 넘은 자신만의 코스도 있다고 했다. 그 효과를 간증하는데, 다 아는 얘기도 더 실감나게 들렸다. 지인은 최근 새로운 책을 냈는데 그만큼 걸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도 했다. 게을러지던 마음에 조금씩 탱탱한 기운이 서려졌다.

 

집에 돌아와서 지인이 알려준 유튜브를 검색했다. 걷기혁명이라고 적힌 썸네일을 비롯 기적의 걷기라느니 등등 제목도 현란했다. 그 중에 지인이 알려준 걷기 전문가로 소개된 영상을 찾아서 바르게 걷는 방법을 보았다. 영상에서 알려준 바로는, 발뒤꿈치부터 착지하면서 앞으로 내딛으며 걷는데, 이 때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면서 평소 보폭보다 10센티 정도 더 크게 걷는다는 기분으로 걸으라고 했다. 체간도 움직여 주라고 했는데, 찾아보니 머리와 팔다리를 제외한 몸통 부분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체간 즉 어깨, 가슴, 배 등의 근육에 적당한 힘을 주고 걸으면, 다리만으로 걷는 방법보다 여러 근육에 힘이 분산되어 편하게 걸을 수 있다고 했다. 방안에서 왔다갔다 따라 해보니 상반신이 좀 더 펴지는 것도 같았다. 뒤꿈치에 힘이 들어가니 아래층이 신경 쓰여 몇 번하다 그만두었다.

 

 

 

 

출근을 위해 걷는다든지 둘레길을 따라 걷다보면 덕분에 건강해지겠지 정도였다. 바르게 걷겠다고 자세를 교정하고 근육의 움직임까지 의식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저절로 움직여지는 상태에 의식을 집중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셈이다. 이 때 저절로는 균형이 잡힌 상태라기보다는 어느 쪽으로 치우쳐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언젠가부터 내 신발의 뒤축은 항상 바깥쪽으로 닳았다. 걸을 때 무게 중심이 바깥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걸을 때 의식적으로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자니 몸의 중심이 척추 쪽으로 이동했다. 저절로 내딛는 걸음을 의식적으로 교정하는 과정 자체가 몸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효과가 있었다. 아마도 이런 변화를 강조하기 위해 혁명이니 기적이니 하는 수사를 붙이는 모양이다.

 

해도 바뀌고 약국 근무도 정리한 터라 점심 먹은 이후에 공간을 나서서 좀 걸어보기로 했다. 공동체에 처음 왔을 때 공터였던 주변에 점점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빈 곳이 없게 건물들이 꽉 들어찼다. 그 사이로 난 골목들을 누비며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고 발바닥을 땅에 붙였다. 동시에 눈으로 들어오는 풍경에도 의식이 따라간다. 탄천 끝으로 동천배수지 건물이 완공되었네,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가면 어디까지 이어지나, 뒤꿈치에서 앞으로 내딛으며 엄지발가락에 힘줘야지. 바르게 걷겠다는 의지가 점점 한가롭게 걷는 여유를 잠식해 갔다. 내가 바랐던 효과가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

 

나의 충실하고 튼튼한 두 다리는 수천 번 수만 번을 휘적거리며 나를 목적지로 데려다 놓을 것이다. 그때 나는 나를 믿는 게 아니라 내가 수십 년 동안 쌓아온 ‘걷는 법’과 ‘걷는 습관’을 믿고 있다. 내 하반신의 수백 가지 근육들은 나름의 애를 쓰고 있다. 내 다리와 발은 그저 자신들의 리듬에 취하여 경쾌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을 뿐이다. 걷는 일에 몰입해 있을 때, 나는 ‘나’라는 존재(혹은 ‘자의식’이라 불릴 만한 것)가 내 몸의 리드미컬하고 산뜻한 ‘나아감’과 별반 관련이 없다는 걸 알게 되고, 때때로 몸의 자연스러운 리듬과 활기에 오히려 걸리적거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산책하는 마음』 (박지원지음_사이드웨이)

 

 

그렇다면, 나는 충실 튼실한 두 다리로 내내 걸어왔던 ‘습관’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산책을 하면서 “어슬렁거리는 삶의 즐거움”에 관한 믿음을 두텁게 써나간 저자의 에세이가 이렇게 부러울 수가!

 

 

 

 

그날 밤 나는 방 안에서 다시 걷기를 시도했다. 유튜브에서 본 내용을 상기하며 방안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걷다가 아무래도 아래층에 들릴 소음이 신경 쓰였다. 신발을 신고 걸어볼까? 현관 앞에 벗어둔 신발 바닥을 물휴지로 박박 닦은 다음 신고 걸어보았다. 콩콩 거리는 소리는 확실히 줄었다. 그러나 밖에서 걷는 활기를 따라갈 수 없었다. 몇 번 왔다 갔다 하다가 제풀에 지쳤다. 이게 다 새해 때문이다. 해도 바뀌고 뭔가 작심하고 실천해야 할 것 같은, 그래서 하루 만보 걷기라도 완수해야할 것 같은 기분 말이다. 그러나 이런 작심은 삼일을 못가 흐지부지 되기 마련, 새해맞이 작심 만보 걷기는 이렇게 끝났다.

 

 

글_기린(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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