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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세미나를소개합니다

[우.세.소] 문탁네트워크 <철학학교>의 공부를 소개합니다!

by 북드라망 2024. 1. 22.
북드라망과 책으로 인연의 그물망을 촘촘히 짜고 있는 공동체들이 있습니다. 감이당, 남산강학원, 사이재, 규문, 문탁네트워크, 인문공간 세종 등이 그곳인데요, 이 공동체들에서는 일주일에도 몇 개씩 세미나가 열립니다. 세미나 중에는 수년간 지속되는 것도 있고, 이제 막 두세 달 된 새내기 세미나도 있지요. 인문학 공부의 백미는 역시 세미나!^^라고 생각하는 북드라망에서 신년 새 코너로 "우리 세미나를 소개(자랑)합니다!"를 만들었습니다. "우.세.소"의 첫 글은 문탁네트워크 철학학교에서 '하드'한 서양철학 원전들을 독파하고 계신 호수샘이 써주셨습니다. 어려운 공부를 돌파했을 때 주는 쾌감을 느끼고 싶은 분들은 호수샘 글을 보시고, 철학학교 세미나에 접속해 주세요. 언제 칸트의 3부작을 읽어 보겠습니까. ㅎㅎ 게다가 열혈 세미나원들이 함께하니 금상첨화입니다. 그럼, 문탁네트워크 철학학교를 소개합니다!

 

문탁네트워크 <철학학교>의 공부를 소개합니다!


호수(철학학교 세미나원)

 



<철학학교> 이전, 그리고 시작
나는 2019년에 문탁네트워크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 이유는 돌아보면 한편으로는 소박했고 한편으로는 거창했다. 소박하게는 그저 이제 더는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수히 좋아서 하는 공부를 시작하고 싶었다. 거창하게는 지혜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당시 내가 그때까지 견지해온 세상에 대한 수많은 가정이 나 자신을 배척하는 것들이었다고 생각하게 된 터라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고 싶었다. 


첫 두 해에 주로 푸코와 스피노자를 읽었다. 들뢰즈의 스피노자 주석서도 읽었다. 힘들지만 새로운 공부에 흠뻑 빠졌다. 대학 시절 학부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지만 스피노자의 심신 이론은 너무나 새로웠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가 암시하는 언제나 끝까지 분투하는 과정으로서의 삶, 그리고 푸코가 <주체의 해석학> 마지막 강의에서 말하는 자기 시험의 형식으로서의 생은, 언제나 어떤 선택의 기로에서 맞고 틀림을 따지며 후회를 반복해왔던 나를 다시 보게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다른 호기심이 생겼다. 스피노자가 대결하는 데카르트가 정말로 뭐라고 말했는지 나는 궁금했다. 어쩌면 스피노자의 대결점이자 스승이었을 데카르트를 직접 읽고 그 뒤에 그를 다시 읽고 싶었다. 푸코는 그 책의 마지막 강의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언급했다. 왜 그런 것인지 이유가 알고 싶어서 찾아다니다 보니 그러려면 먼저 칸트를 알아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다. 나는 내게 일어난 귀한 변화들의 의미를 나 자신에게 더 잘 설명해주고 싶었다.


이러한 궁금증에 사로잡힌 채 시간을 보내던 2021년 초에 문탁에 어느 특이한 분이 나타났다. 글을 어찌나 잘 쓰고 말을 어찌나 잘하시는지 나는 마치 뭐에 홀린 것 같았다. 

(ㅋㅋㅋ)

갑자기 웃어서 죄송하지만, 웃음이 난다. (함께 웃는 분이 적어도 두세 명, 민망해할 분이 적어도 한 명은 있으리라고 짐작한다.) 문탁에서 새로 시작되는 강학원 <철학학교>를 소개하는 글이 닷새 동안 연달아 올라왔다. (링크-지금 다시 읽어보니 놀라운 점은 지난 3년여간(나는 21년 하이데거 시즌을 제외한 모든 시즌에 참여했다) 철학학교에서 공부하고 내가 갖게 된 새로운 문제의식의 상당 부분을 정군샘이 이 2021년 소개 글에서 이미 예고했다는 것이다. 각 철학자가 사용하는 ‘개념’들은 언뜻 같아 보일지라도 각기 중첩과 차이를 품고 있으며 종종 그것이 의도적이라는 것, 완결적인 단 하나의 철학을 제시하려는 시도에는 대체로 실은 그리 당연하지 않은 믿음들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 등등. 내가 어느 댓글에서 썼듯 정군샘의 약속은 정말로 대체로 많이 지켜졌다.) 내용을 떠올리려고 해도 이제는 ‘드릴’ 사진만 생각나서 그 글들을 다시 읽어보니 아, 정군 선생님은 그때 참으로 많은 것을 보장하였다. 가장 강렬한 메시지는 이 공부는 결코 해서 손해를 보려야 볼 수가 없는 일! 이라는 것이었다. 공부가 벽에 막혔습니까? 시원하게 뚫을 드릴이 여기 있습니다! 에 나는 솔직히 혹하지 않았지만, 서양철학사를 한 번 제대로 짚어봐야겠다고 벼르던 터였으니 주저 없이 신청했다. 그리고 묵직한 책의 목차에 나열된 이름 높은 철학자들을 한 주에 한 명에서 많게는 세 명까지 함께 가열차게 읽어나갔다. 세미나는 매시간 두 명이 요약 발제를 맡고, 모든 세미나 원이 질문을 올리면 이 질문들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듬해의 <차이와 반복> 세미나는 강독과 발제가 혼합되었지만, 질문과 토론은 언제나 빠지지 않았다. 작년의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스피노자⸱라이프니츠 읽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원하게 뚫을 드릴이 여기 있습니다!"




<철학학교>의 방식: 질문과 토론
프리랜서인 나는 출근일이 따로 없고 주로 마감일을 중심으로 일정이 짜인다. 굵직한 마감일은 일 년에 적으면 한 번 많아야 세 번 정도라서 그냥 대체로 수시로 일하는 편이다. 그런 나에게 <철학학교> 세미나가 있는 목요일은 일주일의 주기가 시작되고 끝나는 때다. 목요일 오전이면 발등에 떨어진 숙제를 허겁지겁 마치고, 초저녁에 시작된 밀도 높은 세미나가 머리가 얼얼하도록 강도 높게 진행되다가 밤 열 시 어떨 때는 열 시 반이 되어서야 끝나면, 나는 휴우, 또 한 주가 지나갔구나, 하고 숨을 고른다. 일에는 자주 없는 마감 기한을 구태여 끌어와 일주일에 한 번 부러 쫓기는 꼴이다. 함께 공부하는 다른 선생님들은 대개 세미나를 두어 개씩 참여하거나 직접 이끌고, 몇몇 분은 직장에 매일같이 출근하니 차마 엄살을 부릴 수는 없다. 모두가 조금씩 다르겠지만 대개는 매주 비슷한 과정을 치르리라 짐작한다.


세미나 전날 저녁마다 그 주의 텍스트를 마저, 또는 다시 읽는다. 마음으로는 늘 재독, 삼독을 꼼꼼히 해가고 싶지만 느릿느릿 읽다 보면 마지막에는 쫓기기 일쑤다. 첫해의 서양철학사 읽기는 특유의 압축성 때문에, 그리고 이후의 원전 읽기는 그 자체의 난해함과 시대, 언어 등 겹겹의 장벽들 때문에 독해가 쉽지 않았다. 겨우 일독을, 또는 다행히 재독을 마치면 이제부터 진짜 세미나 준비가 시작된다. 매시간 텍스트에서 각자 질문을 뽑아내 올려야 한다. 기한은 세미나가 열리는 목요일 당일 정오다. 이 역시 늘 전날 밤에 올리고 싶지만(나는 평소 마감 기한을 잘 지키는 사람이다, 믿어달라! 물론 마감일이 일 년에 고작 한 번에서 세 번 정도이지만....) 메모장을 열어 질문을 정리하다 보면 희한하게도 시간에 쫓기고 있음에도 혼자 세미나를 먼저 한바탕 치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유는 대체로 이러하다. 일단, 텍스트의 어떤 문장이 그냥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경우가 있다. 일단 예의상 그 문장을 한 번 더 꼼꼼히 읽어본다. 혹시 이런 말인가, 하는 짐작이 떠오른다. 정말 그런가, 확인하고 싶어진다. 내가 가진 다른 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을 찾아본다.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결국에는 아, 이런 말인가보다 싶다 하는 사이 안타깝게도(?) 궁금증이 해소되어버리고 만다. 다른 질문거리를 찾는다. 이번에는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저자의 전제나 주장을 나름대로 반박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음, 그러면 먼저, 내가 저자의 말을 정말로 이해한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 관련된 부분을 다시 찾아 읽는다. 이 과정에서도 질문 후보가 역시 안타깝게도 탈락할 수 있지만 알쏭달쏭할 때가 더 많다. 그러면... 메모에 준하는 아주 긴 질문을 올리게 된다. 


튜터인 정군샘이 세미나의 형식으로 질문과 토론을 처음 제시했을 때 당연히 발제보다는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지금도 대체로 발제보다는 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발제는 몇 주 걸러 한 번이지만 질문은 매시간이다. 작년인가 정군샘이 매시간 메모 쓰기를 병행하자고 제안했는데 나는 소심하되 완강하게 거부했다. 질문 만들기의 강도는 생각보다 높다. 채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문장이라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점에서 메모와 질문은 비슷할 수도 있지만, 질문은 내 생각이 저자의 생각으로부터 갈라지는 명확한 지점을 찾아내야 한다. 갈라지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이런 말로 이해하면 되겠지요?’ 라고 최소한 이견의 여지라도 남겨두어야 한다. 그리하여 다음 주 분량 읽어보고 질문 하나 가져오세요, 라는 가벼운 당부는 세미나 전에 이미 이루어지는 적극적 읽기, 조금 더 면밀하고 조금 더 비판적인, 그리하여 새로운 읽기를 이끌어낸다. 

 



사람들
이 모든 것이 과연 정군샘의 계산이고 설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성실함에 힘입은 것만은 분명하다. 튜터로서 그를 나는 아주 많이 신뢰한다. 세미나에는 언제나 그 주 다루는 텍스트가 이미 익숙한 세미나 원도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세미나 원도 있다. 하지만 잘 알고 있다고 해서 시큰둥하거나 잘 모른다고 해서 지루할 수 없는 것이, 질문을 만드는 일이 그토록 열의를 불러일으키는 일이라면 그 질문을 해결하는 과정 역시 열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튜터인 정군샘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세미나 원으로서의 정군샘 역시 대단히 흥미롭다. 올해부터는 에세이를 쓰지 않는다고 들은 것 같은데, 작년의 마지막 에세이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에세이에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좌르륵 써 놓았던 그를 생각한다면 과연 정말 그렇게 할 것인가 싶다. 아무튼 세미나 자리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는 이든, 말을 아끼는 이든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문제의식을 끝까지 벼리는 것을 나는 매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읽고 깨달은 내용이 자신의 삶에 어떻게 어우러질지까지 고민하는 선생님들로부터도 큰 배움을 얻는다.

흔한 이야기로 끝을 맺자면 삶의 전후가 나뉘는 기점들이 있다. 누군가를 만나기 전과 후, 어느 분야의 일을 시작하기 전과 후, 부모가 되기 전과 후……. 너무 거창한 말이 될지 모르지만 문탁네트워크를 만나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일은 내게 삶의 전후를 나누는 또 하나의 기점이 되었다. 아무튼 그때부터 나는 스스로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 같다. 올해의 <철학학교>는 칸트의 3대 비판서를 읽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문제의식으로 만날, 언제나 새로울 칸트 읽기의 자리를 고대한다. 


◆ 지금까지 <철학학교>가 읽은 텍스트

2021 군나르 시르베크⸱닐스 길리에의 『서양철학사』,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2022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2023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정념론』, 스피노자의 『에티카』⸱『정치론』,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 논고』⸱『모나드론』
2024 칸트의 3대 비판서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판단력 비판』을 올해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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